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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87화 (87/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7화

히드라(3)

히드라의 머리들이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입으로 무언가를 토해냈다.

푸르스름한 색이 감도는 검은 액체.

그것은 놈의 배 속에 들어 있던 소화액으로, 맹독성의 물질이 포함된 히드라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히드라가 토해낸 독액이 공중에서 넓게 퍼지며 사방에 비처럼 뿌려졌다.

“피하십시오!”

“갑옷 안으로 스며들지 않게 조심해!”

미리 독에 대한 대비를 갖추긴 했지만 가능하면 닿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기에, 전위팀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독액을 피해 몸을 움직였다.

그나마 알렉스는 방패가 있기에 우산을 쓰듯 머리를 가리며, 효율적인 동선으로 독액이 쏟아지는 범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퍼억!

“커흑!”

“안 돼! 엑스 경!”

전위팀에 속해 있던 기사 중 한 사람이, 신음을 토하며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쏟아지는 독액을 피하느라 신경이 팔려 있던 사이에, 은밀하게 휘둘러진 히드라의 꼬리가 다가와 그를 후려친 것이다.

사람의 몸통보다 두꺼운 꼬리로 가해지는 채찍질의 위력은, 아무리 단련된 기사의 육신이라 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흉갑이 볼품없이 우그러진 기사는 심한 충격에 내장이 파열되었는지, 다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입으로 핏물을 쏟아냈다.

온갖 버프 효과를 잔뜩 두른 덕에 즉사는 면했으나, 더는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

후방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는다면 소생할 수 있겠지만,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바람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엑스 경! 얌마! 당장 일어나지 못해!”

이전부터 제법 친밀한 교분을 가진 사이었는지, 또 다른 기사 한 사람이 다급한 표정으로 쓰러진 기사를 부르며 뛰어갔다.

그러나 그가 도달하는 것보다 먼저, 주둥이를 벌린 히드라의 머리가 쓰러진 기사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윽고 히드라의 입에 물린 기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아악!”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 낀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고자 발버둥 쳤으나, 히드라는 강한 턱 힘으로 이미 손상되어 있던 갑옷을 가뿐하게 으깨고 기사의 몸을 반으로 잘라내었다.

토막 나버린 기사의 상체가 히드라의 목구멍 속으로 삼켜졌다.

허리 아래 달린 두 다리만이, 역동적으로 흔들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엑스으읏! 으아아!”

친우를 잃은 기사가 핏발이 선 얼굴로 악을 지르며, 방향을 바꿔 히드라의 몸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트라들 경! 멈추시오! 신중하게- 이런!”

알렉스가 기사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냉철함을 잃은 기사는 히드라의 다른 머리들이 살포하는 독액을 맞아가며 무작정 돌진을 감행했다.

땅을 박차며 뛰어오른 기사가 히드라의 몸통 위를 기어 올라갔다.

이어서 그는 히드라의 등판 위를 뛰어다니며, 칼로 이곳저곳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싀에엣?

히드라는 피부에 벌레가 달라붙은 사람처럼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몸을 마구 뒤흔들면서 꼬리로 자신의 등을 내리쳤다.

“저, 저런!”

“무모한 짓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깜짝 놀라며 한 마디씩 뱉었었다.

모두들 그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져 죽게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히드라의 등에 올라탄 기사는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고, 휘둘러지는 꼬리를 피해내며 녀석의 몸에 자잘한 상처를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저렇게 흔들리는 등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니.

흡사 무슨 곡예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독을 저렇게 뒤집어썼는데, 괜찮은 건가?’

아무리 버프로 강화된 기사의 신체능력이라 해도, 중독이 된 상태라면 저런 활약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검푸른 독액을 덕지덕지 묻힌 채 분투하는 기사의 모습을 지켜보며, 알렉스는 마법사들의 비약이 예상보다 뛰어난 독 내성을 부여한 모양이라 생각했다.

전위팀의 다른 기사들 역시 같은 감상을 떠올렸는지, 서로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히드라의 독성이 생각보다 버틸만한 모양이오!”

“이렇게 피하지만 말고 가서 트라들 경을 도웁시다!”

알렉스는 의견을 말하는 기사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시 적극적으로 공세에 임해봅시다.”

“음! 동의할 줄 알았소!”

“얼굴로 날아오는 독액만 주의하면 될 것 같구려.”

히드라의 독액 살포에 늦지 않게 반응할 수 있도록 조금 뒤로 물러나 있던 전위팀은, 굳이 독액을 전부 피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며 다시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히드라가 허공에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독액이 갑옷에 닿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풍겨온다.

독기가 스멀스멀 갑옷 안으로 스며들어와 살짝 긴장했으나, 몸에서는 어떠한 거부 반응도 일어나진 않았다.

짐작대로 마법사들의 비약을 통해 일시적으로 생겨난 독에 대한 내성이, 히드라의 독액에 완벽히 저항할 수 있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비약의 지속시간은 족히 한나절 이상 간다는 설명을 들었었기에, 전위팀은 안심하고 히드라의 주위를 오가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몇 차례 더 공성병기의 사격이 이어졌고, 간간이 전위팀이 회심의 기회를 잡아 히드라의 목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더는 추가적인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고 있던 가운데, 마침내 히드라의 두 번째 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렇지!”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되겠어!”

남은 세 개의 머리도 누적된 피해로 인해 성한 상태는 아니기에, 사람들은 이대로 계속 전투를 이어간다면 무난하게 히드라를 무찌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머리가 줄어든 만큼 녀석의 전투력도 떨어졌을 테니, 충분히 그런 희망을 가져볼 만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방위군의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내고 있을 때였다.

“끄으윽…….”

친구를 잃고 광분한 탓에 가장 먼저 독액을 뒤집어쓰고 싸웠던 기사 트라들이, 신음을 흘리며 멈춰 서더니 그대로 픽 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트라들 경!?”

“어엇! 피해!”

콰지직.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떻게 도울 새도 없이, 히드라의 발이 쓰러진 그의 몸을 밟아 짓이겼다.

“이런……”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전위팀의 다른 기사들이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큭, 뭐지? 몸이 묘하게 무거워진 느낌이오!”

“후욱! 흐으, 어째 점점 숨쉬기가 불편해지고 있소.”

알렉스는 움직임이 조금씩 둔해져 가는 기사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중독 증상? 어째서…… 분명 독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였는데?’

원인은 히드라의 피 때문이었다.

히드라의 피와 소화액은 둘 다 인체에 치명적인 맹독이며, 각기 다른 성분을 지닌 독극물이다.

입으로 토해내는 독액만이라면 독 내성의 효과로 버텨낼 수 있었지만, 히드라의 머리를 베고 몸뚱이에 상처를 입혀가며 피가 계속 튀는 점을 간과한 것이 문제.

전투가 지속되는 동안 두 종류의 독이 점점 뒤섞이며, 비약의 효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독성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런 개 같은! 잘 풀리는가 싶었는데 이런 문제가 생기다니.’

알렉스는 이사벨과 시선을 마주쳤다.

따로 표현은 안 했지만 그녀 역시 다른 두 기사들처럼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곤혹스러운 심정을 담은 눈빛을 보내왔다.

살아남아 있는 전위팀의 인원 네 명 중에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신 한 명뿐이었다.

[정화의 불꽃]

비약의 독 내성 하나로만 버텨야 했던 다른 기사들과 달리, 알렉스는 상태이상을 해소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독 때문에 위기가 있었던 탓에 3레벨까지 찍어둔 정화의 불꽃 스킬이, 이번에도 스스로를 지켜내는데 단단히 한몫을 해주었다.

그러나 동료들을 두고 혼자서만 멀쩡해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빠악!

중독의 영향으로 동작이 굼떠져 버린 기사를 향해, 히드라의 꼬리가 벼락처럼 내려쳤다.

기사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압사당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신이시여…… 구원을…….”

아그작!

반대편에 떨어져 있던 다른 기사 역시 쏘아져 오는 히드라의 머리를 피하지 못해, 온몸을 물어뜯기며 결국 금속으로 포장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염병할.’

전위팀이 하나씩 목숨을 잃어가는 동안.

알렉스는 비틀거리고 있는 이사벨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장벽의 끝으로 뛰어갔다.

“그흐읏…… 아, 알렉스 경…….”

“가만히 있으세요. 곧 해독이 될 겁니다.”

알렉스의 갑옷 위로 따스한 빛을 내며 타오르던 백염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사벨에게 천천히 번져간다.

이전에도 이사벨을 치료하느라 비슷한 행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처럼 갑옷을 벗진 않았지만, 다행히 이 정도로도 충분히 효과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였다.

“후우.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놀랐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확인하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까는 다들 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않습니까.”

쉬이에에엑-!

히드라의 포효 소리가 알렉스와 이사벨의 대화를 끊어낸다.

전위팀의 다른 기사들을 전부 학살한 히드라가, 남은 생존자인 두 사람을 바라보며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시발…… 이제 어쩌지?’

주둔지 쪽을 힐끔 쳐다보자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히드라의 독을 견뎌낼 수단은 전위팀에게 지급된 소량의 비약이 전부였기에, 방위군에 속한 다른 기사들은 차마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발을 구르고만 있었다.

‘전위팀이 무너지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건 아닐 텐데. 빨리 뭔가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다!’

그래도 바람의 장벽 주문을 해제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작전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듯한데, 일단 당장 이쪽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알렉스 경. 그 능력은 몸이 닿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제게서 떨어지면 이사벨 경도 다시 중독되고 말 겁니다.”

이사벨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도 알렉스는 참 답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몸을 피한다는 선택 따위는 고려할 마음도 없지만, 이렇게 밀착한 상태에서는 둘 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알렉스 경, 제게 업히세요.”

“예?”

“놈이 옵니다! 어서요!”

장벽 끝으로 몸을 피했다고 해봐야 히드라가 몇 걸음만 옮기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기에, 알렉스는 가타부타 따지는 대신 곧바로 이사벨의 말을 따랐다.

‘……확실히 이러면 이사벨은 움직일 수 있긴 하겠네.’

업히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 자세라면 정화의 불꽃으로 독기를 태우면서 이사벨도 동작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반대로 알렉스가 이사벨을 업는다면 전투행위가 불가능하겠지만, 탈인간급의 괴력을 갖춘 이사벨은 알렉스를 매달고도 가뿐하게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문제라면 남이 보기에 조금 많이 추한 모양새일 거라는 정도.

‘하, 하하…… 쪽팔려 뒤지겠네. 저쪽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저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싶겠는데?’

위신이 바닥까지 굴러떨어지겠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알렉스 경! 더 꽉 붙잡아야 합니다!”

“후우, 네.”

알렉스는 두 다리로 이사벨의 허리를 감싸 단단하게 조였다.

성검은 허리춤에 꽂아 넣었지만, 방패는 언제 필요할지 모르기에 버리지 않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착용한 팔을 뒤로 돌려 등에 딱 붙였다.

이어서 남은 반대쪽 팔을 이사벨의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아담한 몸통을 꼭 끌어안았다.

‘진짜 모양 안 사네.’

목숨이 달린 일이니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지만,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숨 막히도록 낯 뜨거운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며, 알렉스는 이사벨에게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피하는 쪽으로 상대합시다. 히드라가 장벽보단 저희에게 더 신경을 쓰는 걸로 보이니, 굳이 맞부딪히려고 하지 않아도 역할 수행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히드라를 마주 보며, 한 몸이 된 두 사람은 전위팀의 임무를 속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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