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86화 (86/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6화

히드라(2)

“거의 다 와갑니다!”

“이랴앗-!”

“저쪽! 저기 깃발을 지난 뒤에 갈라지는 겁니다!”

히드라를 유인한 전위팀은 주둔지의 바로 앞에 표시해 둔 지점을 통과한 후, 정해둔 경로에 따라 좌우로 나뉘어 흩어졌다.

히드라의 머리들이 양쪽을 바라보며 시선이 잠시 분산되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은신해 있던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퍼뜨리며 미리 준비한 함정을 발동시켰다.

샤아앗!

수상한 기운을 눈치 챈 히드라가 쇳소리 같은 울음을 내지르며 멈춰 서려 했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대지가 요동치며 히드라의 앞에 사람만 한 크기의 석벽 몇 개가 솟구쳤다.

히드라 같은 대형 몬스터의 이동을 막을 수 있는 높이는 아니었으나, 전위팀을 쫓아 달려오던 녀석의 발목을 걸기엔 딱 적당한 정도였다.

발에 챈 석벽은 바로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지만, 히드라 역시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쿠웅-

워낙 몸집이 크고 무거운 몬스터다보니, 묵직한 땅 울림과 함께 흙먼지가 확하고 주위로 퍼져 나갔다.

“위치로!”

“어서 서둘러!”

히드라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확인한 지휘관들의 지시에 따라, 주둔지 중앙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엄폐에서 벗어나 공성병기를 덮어두고 있던 위장막을 잡아당겼다.

“사격개시!”

“발사!”

장전을 마친 채 지반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발리스타와 캐터펄트들이, 일제히 투사체를 쏘아 보냈다.

이 세계의 기술로 만들어진 공성병기들의 사거리는 대략 3~400미터 정도.

히드라와의 거리도 딱 그쯤 되었다.

작전에 맞춰 미리 각도와 위치를 계산해 설치한 것이었기에, 발사된 투사체들은 오밀조밀한 탄착점을 형성하며 쓰러져 있는 히드라의 몸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발리스타의 대형화살과 캐터펄트에서 사출된 탄환무더기가 한 곳에 뒤섞인다.

오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히드라의 덩치가 워낙에 크다 보니, 대부분의 투사체가 빗나가지 않고 녀석의 몸에 틀어박혔다.

싀에에엑-!

히드라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고통보다는 분노의 감정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포효.

공성병기의 사격은 분명 유효한 효과를 보이긴 했으나, 히드라에게 치명적이라고 할 정도의 위력까지 발휘하진 못했다.

증오를 담은 다섯 쌍의 눈으로 병사들을 노려보며, 히드라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히드라가 뭔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수십 기의 기마가 뾰족한 창을 앞세우며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헤이- 햐!”

“머리만 많은 기형 도마뱀 따위에게 잡히지 마라!”

기사들은 고함을 지르며 히드라의 주변을 내달렸다.

용맹하게 외치고는 있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근처를 맴돌 뿐, 기사들의 돌진은 랜스차지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들의 역할은 전위팀이 돌아올 때까지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간이 창을 던지는 정도의 위협만 가하며 기사들이 히드라의 시선을 잡아두는 동안.

히드라를 유인하며 잠시 흩어졌던 전위팀은, 주둔지의 후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제와 마법사들 앞에서 다시 하나로 뭉쳤다.

“예루스시여, 당신의 종을 보호하소서!”

“빛의 가호가 함께할지니!”

신성력이 넘실거리며 온갖 축복과 보호의 성법들이 전위팀을 대상으로 펼쳐졌다.

정신을 맑게 해주는 청명한 기운과 몸 안에서 샘솟는 활력에 감탄하며, 알렉스는 살짝 욕심 어린 시선으로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보조계열 성법의 위력은 성기사보단 사제들이 훨씬 뛰어나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싸울 때마다 버프를 받고 싶은데.’

성법이 뛰어난 고위사제들을 계속 달고 다니며, 힐과 버프 셔틀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없는 일이라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에서만 그쳐야 했다.

“쭉 들이켜시게. 히드라의 독기를 마셔도 어느 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 걸세.”

“다음엔 이것도. 부작용 없이 오감을 예민하게 끌어올려 주는 우리 학파의 비전 포션이오.”

“그리고 여기 근력 강화와 집중력의-”

사제들이 여러 종류의 성법을 전위팀에게 부여하는 작업이 끝나자, 곧바로 마법사들이 호화스러운 용기에 담긴 약물들을 내밀며 복용을 재촉했다.

‘으윽. 더럽게 맛없네.’

미각을 상실하는 대신 다른 감각을 강화시켜 주는 원리가 아닐까 싶은 맛의 포션들.

그래도 성능은 확실할 것이고 위험한 임무를 앞둔 상황이기에, 알렉스는 구역질을 참으며 그것들을 전부 목구멍으로 넘겼다.

사제들의 성법 버프에 이어 마법사들이 지원한 포션으로 도핑까지 마친 후.

알렉스를 필두로 한 전위팀은 작전의 신호를 기다리며, 히드라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삐이이익!

“신호다!”

“전부 빠져나가!”

효시가 쏘아지며 피리 소리가 허공을 울리자, 히드라의 시선을 끌며 시간을 벌고 있던 기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히드라의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법사들이 준비한 새로운 주문이 완성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이 히드라의 거대한 몸체를 에워쌌다.

샤아아아악-!

기사들을 쫓아 걸음을 옮기려던 히드라가 강한 반발력에 밀려나며 휘청거리더니, 약이 잔뜩 오른 모습으로 긴 포효를 내뱉었다.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바람의 벽은, 히드라를 한 자리에 가둬두는 커다란 감옥이 되어주었다.

“발사!”

구속된 히드라를 향해 새로이 장전을 마친 공성병기들이 다시 한번 투사체를 날려 보냈다.

투사체들은 첫 사격 때보다 더욱 강맹해진 위력적으로 히드라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강한 척력을 발생시키는 바람 장벽의 효과 덕분이었다.

이 마법은 히드라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안으로 날아드는 투사체의 위력을 가중시키는 효용까지 더해주었다.

스에에엑!

몸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대형화살이 전해주는 통증에, 히드라가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내지른다.

난동을 부리는 히드라의 거체가 무형의 벽을 때리자, 주문을 유지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다급히 마력의 흐름을 조절했다.

여러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지탱하고 있는 이 바람의 장벽은 상당히 괜찮은 성능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히드라가 작정하고 날뛴다면 오래 버틸 수 없는 낮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놈이 이 감옥을 부수는데 집중할 수 없도록, 신경을 분산시킬 다른 수단이 추가로 필요했다.

판디움의 영주가문에서 온 기사 두 명과 교구의 팔라딘 두 명, 거기에 알렉스와 이사벨까지 총 여섯 명.

방위군의 최정예를 뽑아 구성된 전위팀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쪽이다아-!”

“으하하핫! 날 잡아봐라!”

온갖 보조수단으로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증가시킨 전위팀의 기사들이, 끓어오르는 고양감에 함성을 지르며 히드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아압!”

방패를 앞세운 알렉스가 펄쩍거리며 날뛰기 시작한 히드라의 발걸음을 막아섰다.

놈이 장벽에 연달아 몸을 부딪치면 마법이 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기에, 자신이 나서서 충격을 적당히 분산시킬 생각이었다.

‘으윽! 예상은 했지만 엄청나네.’

히드라의 발길질을 한차례 받아낸 알렉스는, 팔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적들을 상대하며 숱하게 공격을 막고 견뎌내 왔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방패술 스킬로도 피해를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

압도적인 덩치에서 나오는 육중한 무게가 실린 히드라의 공격은, 아무리 알렉스라 해도 여러 번 연이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선은 확실하게 끌었군.’

벌레나 다름없는 조그만 인간이 자신의 발에 채고도 멀쩡한 것에 당황한 히드라가, 잠시 멈춰 서서 다섯 개의 머리를 전부 움직여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이어서 히드라의 머리들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알렉스를 집어삼키기 위해 화살처럼 쏘아져 다가왔다.

“흡!”

지원받은 비약 덕분에 한층 예민해진 감각으로 히드라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던 알렉스는, 재빨리 발을 놀려 위에서 내리꽂히는 히드라의 머리들을 피해냈다.

‘흐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사제들의 성법으로 신체능력도 향상된 상태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채 반응하지도 못하고 놈에게 삼켜질 뻔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짜증스러운 기색이 담긴 눈초리로 알렉스를 응시하던 히드라가, 이번에는 몸을 살짝 뒤틀면서 기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해 왔다.

부아악!

공기를 찢어발기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히드라의 꼬리가 알렉스를 노리고 날아든다.

알렉스는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위력이 실린 히드라의 몸짓을 전부 받아냈다간, 놈을 해치우기 전에 자신이 먼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방패를 앞세워 막는 대신,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히드라의 꼬리 채찍을 피해냈다.

공중으로 몸을 띄운 알렉스가 지면으로 내려오기 직전.

히드라의 머리 하나가 눈알을 번뜩거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알렉스를 향해 목을 뻗었다.

촘촘하게 자라난 예리한 이빨들이 알렉스를 물어뜯기 위해 다가온다.

“그렇게 나만 신경 쓰면 안 될 텐데?”

하지만 뱀처럼 쏘아진 머리가 알렉스에게 닿기도 전에, 히드라는 강렬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야 했다.

“천벌을 내리노라!”

신체능력이 강화된 것은 알렉스뿐 아니라 전위팀의 기사들 전부가 동일하다.

히드라의 몸통을 향해 몇 미터를 훌쩍 뛰어오른 이사벨이, 몸에 틀어박힌 화살대를 발판 삼아 다시금 도약하며 길게 내민 놈의 목을 폴액스로 내리찍었다.

히드라의 몸집은 어지간한 무기로는 상처를 입혀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지만, 인간이 다뤄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의 중병기인 이사벨의 폴액스는 문제없이 히드라의 목에 깊은 부상을 입혔다.

널찍한 쇠붙이가 비늘을 으깨며 파고들어 게걸스럽게 살점을 물어뜯는다.

사제들의 버프로 더욱 강력해진 이사벨은 디바인 익시드를 쓰지 않았음에도, 히드라의 목을 일격으로 절반쯤 잘라낼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했다.

히드라의 목을 걷어차 폴액스를 뽑은 이사벨이 지면으로 내려오자, 너덜너덜하게 벌어진 녀석의 상처에서 대량의 피가 분출하며 사방에 검붉은 비를 흩뿌렸다.

“물러나!”

“피에 닿지 않게 조심하시오!”

히드라의 혈액은 그 자체로 지독한 맹독으로 알려져 있기에, 근처에서 무기를 휘두르고 있던 다른 기사들은 서로에게 경고를 외치며 피가 닿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물론 각종 버프로 인해 이미 독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긴 하지만, 성법과 마법약품의 효능이 마냥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에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삐리리릭!

하늘로 쏘아진 효시가 소리를 내며 다시금 신호를 보내왔다.

재사격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였다.

아군의 투사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기사들은 위치를 조금씩 이동했다.

커다란 히드라의 몸체를 엄폐물로 삼으면 되기에, 굳이 장벽 바깥으로 빠져나올 필요까진 없었다.

전위팀이 사로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한 병사들이 세 번째의 사격을 실시했다.

퍼버벅!

싀에에엣-!

운이 따라주는지 발사된 투사체의 탄착점이 마침 부상당한 히드라의 목 부근에 집중되어, 녀석의 상처를 더욱 크게 벌려놓았다.

투둑.

결국 반쯤 잘려 있던 히드라의 한쪽 머리가,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뜯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좋았어! 히드라도 별거 아니군!”

“이제 네 개 남았소!”

“다들 이대로만 갑시다!”

히드라를 무찌르기 위해선 다섯 개의 머리를 전부 제거해야 한다.

작전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가고 있기에, 승산이 있음을 확신한 방위군 사람들이 밝아진 안색으로 환성을 내뱉었다.

조금 이른 환호이기는 했다.

몬스터가 가장 강력한 위력을 내는 시점은, 부상을 당해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목숨의 2할을 잃은 히드라의 남은 머리들이,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주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토해내려는 듯 목을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