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4화
변이(2)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성검을 회수한 알렉스는 고뇌어린 눈으로 킹을 주시하며 몸의 긴장을 유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격한 반응을 보이며 변이를 일으키는 킹을 베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지만, 이 기현상에 신성력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자 쉬이 검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나 기적이 일어나 이 녀석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성유물에서 흘러나온 힘이 괴물처럼 바뀌어가는 킹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하고, 알렉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묵묵히 킹을 응시했다.
“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알렉스와 킹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사벨이 탄성을 터뜨렸다.
킹의 육체에서 또 다른 변화가 생겨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흉측하게 변해가던 외형이 다시금 말의 형상을 구성하며, 털이 빠지고 징그럽게 꿈틀거리던 피부에서 새로운 털이 자라난다.
다른 말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기존의 갈색 털과는 다른, 신비하게 느껴지는 금빛의 털이 아름답게 반짝이며 킹의 몸을 뒤덮었다.
프르륵.
가볍게 투레질을 한 킹이 엎드려 있던 자세에서 고개를 들었다.
손이 저릴 정도로 계속 성검을 꽉 움켜쥐고 있던 알렉스가, 킹과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럽게 녀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너 이 자식…… 괜찮아진 거냐?”
커다란 눈망울에는 더 이상 흉포하게 느껴지던 사나움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긴장을 완전히 풀진 않은 채 킹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댄 알렉스는, 킹의 몸 안에 미약하지만 익숙한 기운이 퍼져 있음을 감지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건 분명 신성력의 기운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졌다고 봐도 되나?’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파괴된 성유물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변이 도중에 흡수되며, 킹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긴 한다.
킹이 이성을 잃고 난폭해질 때마다 발동되곤 하던 성유물의 힘이, 이제는 완전히 몸 안에 스며들어 영구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분간 더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적어도 겉모습을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꼭 무슨 신수 소리를 들을 만한 생김새로 변했군.’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킹의 우아한 자태는, 전설이나 신화 속에 간혹 등장하곤 하는 성스러운 동물을 연상케 했다.
히히힝-!
자리에서 일어난 킹이 힘찬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아, 아름다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사벨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늙고 추레한 노마에서 누가 봐도 진귀한 명마처럼 변해버린 킹의 외형은, 말을 반려처럼 여기는 기사라면 매혹되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알렉스 경!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설명을 해주세요!”
킹의 멋들어진 외형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사벨은 궁금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솔직히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알렉스는 대충 성유물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하! 경께서 성유물을 파괴하는 걸 보며 깜짝 놀랐었는데, 역시 다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요! 그분께서 내리신 마지막 시험 같은 겁니까?”
“네 뭐, 그런 셈이죠. 하하…….”
“과연! 평범한 말이었지만 알렉스 경이 선택한 동반자라면, 분명 시련을 극복할 거라 믿었습니다.”
이사벨은 킹이 가끔 난폭하게 날뛰던 이유를, 한낱 짐승에 불과한 몸으로 성유물의 힘을 감당하느라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라 알고 있었다.
한데 알렉스가 성검으로 킹과 성유물을 동시에 찌르고 나서 저리 멋들어진 모습으로 변신을 하게 되자, 자주 그랬듯이 알아서 긍정적인 해석을 붙이고 납득하며 넘어갔다.
“혹시 제 로자리아도 저렇게…… 아! 베로드의 눈물 같은 성유물은 다시 구하긴 어렵겠군요. 으으…… 너무 부럽습니다!”
매끄럽게 빛나는 털을 휘날리며 서 있는 킹의 수려함에 완전히 반해 버렸는지, 이사벨은 손가락을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꼼지락대며 킹의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런 이사벨의 행동에, 킹은 모델이 자세를 잡는 것처럼 다리를 쭉 뻗고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러곤 이내 콧김을 훅 하고 내뿜더니, 입술을 씰룩거리며 알렉스를 쳐다본다.
마치 ‘내가 이렇게 잘난 놈이야’ 하고 말하는 듯한 시선에,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부터도 묘하게 지능이 높다고 느껴지는 녀석이긴 했는데, 어째 이제는 표정까지 사람 같은 느낌이라 살짝 징글맞아 보인다.
‘뭐 외모가 멋지게 변한 것 자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만.’
몸 전체에 또렷하게 두드러져 있는 탄탄한 근육과, 그럼에도 전혀 둔해 보이지 않는 날렵하게 빠진 몸매.
윤기가 넘치다 못해 찬란하게 빛나 보이는 금색의 털.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라고 말해도 납득할 만한 비주얼을 훑어보던 알렉스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응? 뭔가 이상한데?’
뭘 놓친 건가 고민하던 알렉스는, 어느 순간 답을 깨닫고 입을 벌렸다.
“어억!? 야, 너 왜…… 없냐?”
프륵?
그랬다.
분명 다리 사이에 있어야 할 우람한 수컷의 상징이, 변이를 거친 킹의 몸에선 사라져 찾아볼 수가 없었다.
히히힝!?
머리를 아래로 숙인 킹이 제 눈으로 하반신을 살펴보더니,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한 얼굴로 알렉스와 눈을 마주쳤다.
서늘한 바람이 둘 사이로 스쳐지나갔다.
“알렉스 경? 없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앗?”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사벨이 뒤늦게 알렉스의 말을 이해하고 킹을 살펴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킹의 성별이 바뀐 겁니까? 이것도 성유물의 영향인가요?”
“아니, 그게 저도 잘…….”
애초에 킹의 변이에 성유물이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친 건지 알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알렉스는 당황한 기색으로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괴물은 알을 낳는 몸체도 가지고 있었으니, 성별을 따지자면 암컷이라고 봐야 하나? 설마 그 심장의 힘에 의해 변이가 진행된 탓에 킹의 소중이가……?’
있었다가 없어지게 되어버리다니, 놀람을 넘어서 무서운 일이었다.
물론 알렉스가 애마의 달라진 점에 아무리 당황했다고 해도, 킹 스스로가 받은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킹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영혼이 나가버린 듯한 눈빛을 마주하며, 알렉스는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위, 위로해 줘야 하나?’
어색하게 킹을 바라보며 서 있자니, 이사벨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꽂는 말을 내뱉었다.
“앗! 그럼 이제 킹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으니, 퀸으로 개명을 해야 할까요?”
거대한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한 킹이 눈을 뒤집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기절한 자신의 애마를 내려다보던 알렉스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을 느끼고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저기…… 기사님들. 다 끝난 겁니까요?”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언제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델이, 슬쩍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음. 아직 있었군? 트롤들이 더 튀어나오는 걸 보고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야 당연히 기사님들이 그 뭐냐……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실 거라 믿었습죠!”
“하, 퍽이나 그러시겠군.”
따라오기 싫은 티를 물씬 풍겨놓고 잘도 아부를 떨어댄다.
“그런데 기사님의 말은 대체 무슨 일이…….”
“굳이 알 필요 없으니 관심 끄도록.”
“아, 넵.”
킹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을 지켜본 델이 의문을 드러냈지만, 굳이 관계없는 이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알렉스는 차가운 말투로 그의 관심을 끊어냈다.
“저, 그런데 트롤의 부산물들은 어떻게 합니까요? 시간이 너무 지나 버린 것 같긴 합니다만.”
“아, 이런.”
델의 말에 알렉스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탄식을 터뜨렸다.
트롤의 피는 몬스터 부산물 중에서도 제법 비싸게 거래되는 물품이다.
트롤을 세 마리나 사냥했으니 서둘러 피를 채취했다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었을 텐데, 킹의 변이에 신경이 팔려 다들 그쪽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목을 잘라놓고 시간이 꽤 지난 탓에, 트롤들의 시체에선 더 이상 피가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핏물이 스며들어 검붉은 색으로 물든 흙바닥을 내려다보며, 알렉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피에 젖은 흙이라도 퍼 담아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물질이 잔뜩 섞여버려서야 상품가치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깝군. 이봐,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나섰어야지. 전투엔 참여하지 않을 테니 부산물 수거나 하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옛? 하지만, 으윽…… 죄송합니다요.”
알렉스의 핀잔에 델은 억울한 표정으로 뭔가 변명을 하려다가 그냥 넙죽 고개를 숙였다.
트롤을 썰어버리는 기사들에게 괜히 뻗대보느니 그냥 욕을 먹는 편이 나았다.
혹시나 이걸 트집 잡아 또 뭔가 시키려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지만, 알렉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더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솔직히 킹의 문제로 정신이 팔렸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이니, 일개 용병에게 책임을 전부 떠넘기는 건 영 품위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필요로 했던 경험치는 충분히 얻었고 킹이 품고 있던 문제까지 일단은 좋게 해결된 것으로 보이니, 어쨌거나 목적은 다 이루었다.
부산물로 인한 수입이야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아니기에, 괜히 귀찮게 더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알렉스는 일행들을 보며 복귀를 선언했다.
* * *
‘역시 기사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어야지.’
수리가 완료된 판금갑옷을 찾아와 장착한 알렉스는,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어색한 점이 있나 확인해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며칠 동안 입었던 사슬갑옷도 충분히 훌륭한 방어구긴 했지만, 판금갑옷과 비교하면 허술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보니 이제야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속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은 느낌이랄까?
‘흐, 이런 생각도 웃기긴 하네. 내가 언제부터 기사였다고 이런 쇳덩어리에 안정감을 느끼는 건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제는 마치 스스로가 꽤 오랫동안 기사 생활을 해온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따지고 보면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속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알렉스는 간단한 무장점검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서 준비를 기다리고 있던 이사벨이, 알렉스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걸어왔다.
“신전으로 가십니까?”
“네. 도움을 요청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으니까요.”
도시로 돌아온 알렉스는 델에게 토미를 찾아 의뢰의 완수를 알리도록 지시한 후, 판디움 교구의 신전을 다시 찾아 트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었다.
오우거의 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트롤들의 출몰 역시 심상치 않은 일인 것은 매한가지.
이미 처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냥 흘려 넘길 일은 아니기에, 같은 교구 소속의 식구로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 오우거 건으로 인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교구에선, 알렉스에게 당분간 도시에 머무르며 같이 상황을 지켜봐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성을 느끼고 마탑에 마법을 통한 광범위 탐색을 의뢰하려던 참이었다네. 오우거와 트롤이라니. 그런 놈들이 도시 인근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역시 몬스터들의 터전에 무언가 큰 이상이 생긴 모양일세.
-웨이브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아니길 바라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마법사들의 탐색결과가 나오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몬스터 생태계가 구성된 지역의 심처에서 간혹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여, 몬스터들의 세력 구도에 거대한 변동이 생겨날 때가 있다.
일종의 도미노 현상처럼 한 구역에서 벌어진 세력 변화가 다른 구역에까지 차례로 영향을 끼치며, 생태계 전체의 몬스터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벌 떼처럼 요동치는 상태.
그리고 그렇게 발생한 대격변에 의해 몬스터들이 기존의 영역에서 몰려나와, 인간들의 영토를 침범하기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몬스터 웨이브라고 칭한다.
‘내 입장에선 경험치 이벤트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알렉스를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던 판디움 교구도 현 사태가 웨이브의 징조처럼 보이자, 급하게 알렉스를 붙잡으며 대비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정말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진다면 한 사람의 손이라도 필요로 할 상황이 올 수 있으니, 타 교구의 인물이지만 무력이 검증된 두 사람의 협력을 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거 이 동네가 아주 꿀 같은 사냥터였네.’
알렉스 역시 몬스터들의 대규모 침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굳이 여길 떠나 기존의 여정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위급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니, 다른 영지로 떠나는 건 잠시 동안 보류해야겠네요.”
“주님의 안식처와 그분의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저희 팔라딘들의 의무이니, 실로 마땅히 그리해야 합니다.”
마법사들의 탐색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알렉스는 이번 일이 그냥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예감을 느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이곳에서 70레벨까지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이사벨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