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3화
변이
델은 몇 년째 고정된 소속 없이 밑바닥을 전전하는 하급 용병이었다.
재능을 인정받아 대형 용병단의 간부까지 올라가겠다는 꿈을 품고 용병업계에 뛰어들었지만, 현실의 벽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내세울 만한 재능 하나 없는, 널리고 널린 애송이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마땅히 다른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돈도 거의 되지 않는 저급한 몬스터나 사냥하며 근근이 먹고살고는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버틸 수는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저런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기사 나리들과 트롤 두 마리의 전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델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준성체 트롤의 시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머리가 잘려 나간 목에서 꿀렁거리며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트롤의 피가 그렇게 비싸게 팔린다고 하던데…… 저것만 챙겨도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거나 질 좋은 무구를 살 수 있지 않을까?’
기사와 트롤의 살벌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다가가고 싶진 않지만, 아까운 돈이 바닥에 뿌려져 증발하고 있는 것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부산물의 소유권은 당연히 기사들에게 있지만, 저렇게 회수하지 못해 버려지는 양을 지켜낸다면 자신의 몫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처음 보는 애새끼를 동정심으로 도와주려는 걸 봐서는, 속 좁은 인간들은 아닌 거 같으니까.’
싸우는 실력들을 보아하니 트롤들에게 당할 것 같진 않지만,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챙겨둔 트롤의 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될 테니,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해도, 두려움 때문에 차마 발이 떨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괜히 가까이 접근했다가 저 싸움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트롤 시체 옆에 나란히 누운 인간 시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니까.
고민에 빠진 델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억? 이놈이 왜 이래!?”
뒤쪽에서 그와 함께 머물러 있던 기사의 말이, 갑자기 전투의 현장을 향해 다가가려는 행동을 보였다.
다급히 고삐를 잡아 멈춰 세우려 했으나, 통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질질 끌려가고 만다.
‘무슨……? 기사들의 전마는 원래 이리 힘이 센 건가?’
당황에 빠진 채로 말에게 끌려가던 델은, 어느새 자신이 긴박한 전투의 현장에 가까이 발을 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이, 이런 시부럴.”
델의 얼굴색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기사와 이렇게 엮여본 적은 처음이라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많진 않지만, 기사들이 전마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다가 혹시나 말이 다치기라도 하면, 괜히 자신이 책임을 물어 탈탈 털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곳에 오기 전 혀를 뽑니 마니 했던 여기사의 살벌한 발언이 떠올라, 마음속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델의 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기어코 트롤의 시체 앞까지 다가온 킹은, 피가 흐르는 트롤의 목에 머리를 가져다 대고 게걸스럽게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흐엇!? 이런 미친!”
트롤의 피를 마시는 킹의 모습에 델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성체 트롤과 싸우느라 집중하고 있던 알렉스는, 바로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빠악!
‘크으. 그래, 이제 좀 강한 몬스터와 싸우는 느낌이 나는군.’
방패 위로 가해지는 충격이 확실히 준성체 트롤보다 더욱 강렬했다.
게다가 몽둥이를 다루는 솜씨도 훨씬 숙달되어 노련한 전사를 상대하는 느낌이라, 알렉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살짝 쾌감마저 느껴가며 전투에 깊이 빠져들었다.
찌르고 막고 베고 피하길 반복하며 전투에 몰입해 있던 알렉스는, 문득 상대에게 그리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쉽지 않은데?’
준성체 때와 마찬가지로 약점인 목을 노리자니, 머리 하나만큼 커진 크기 때문에 난이도가 급격히 뛰어올랐다.
점프를 뛰는 동작을 추가하지 않고서는 검이 닿는 리치 안에 녀석의 목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
놈의 목에 상처를 내려면 자연히 스스로의 움직임에도 허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경! 이쪽으로!”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적을 쓰러뜨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조금 애를 먹고 있자니, 자신을 부르는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시선을 옮기자 목에 폴액스가 틀어박힌 채 바닥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트롤과, 창대를 잡고 힘으로 녀석을 내리누르고 있는 이사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초인적인 근력으로 2미터에 달하는 장병기를 젓가락 휘두르듯 가볍게 다루고 있으니, 그녀는 알렉스처럼 키 차이로 인한 문제로 고전할 이유가 없었다.
터진 수도관처럼 콸콸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디바인 익시드(차이점이 있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까지 사용한 모양.
오우거조차 당해낼 수 없던 무지막지한 힘이니,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트롤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벗어나지 못하고 제압당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구 남발하지 말라니까는.’
빨리 한 놈을 처리하고 이쪽을 도우려는 생각이었을 테니, 지시 없이 힘을 사용했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알렉스가 몬스터의 처치에 기여할수록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로 숨통을 끊지 않고 양보하려는 예쁜 짓까지 해주고 있지 않은가.
“잘했습니다!”
알렉스는 자신이 상대하던 녀석을 내버려 두고 이사벨 쪽으로 달려가, 목이 반쯤 잘린 채 바동거리는 트롤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머리가 잘려 나간 트롤은 잠시 경련하다가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아…….”
알렉스가 놈을 해치우는 것을 확인한 이사벨은 곧장 디바인 익시드의 발동을 취소했다.
숨을 몰아쉬고 비틀거리는 것이 꽤나 힘을 소모한 것 같긴 하지만, 저번처럼 완전히 탈진에 이를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구와아악-!
가족을 전부 잃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가, 극도로 흥분하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녀석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이 대 일로 변한 상황을 역전시킬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서걱.
이어진 전투 끝에 결국 나머지 트롤의 머리 역시 바닥으로 떨어지며, 트롤 가족들은 그렇게 전원 목숨을 잃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사벨 경.”
“후훗.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입꼬리를 씩 올리는 이사벨에게 마주 웃어주고, 알렉스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알렉스 Lv 68]
[잔여 스킬 포인트 1]
전투 중이라 알림을 따로 체크하진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레벨이 올라 있었다.
트롤들이 준 경험치가 제법 짭짤했던 모양인지, 레벨 업 직후임에도 경험치 바가 다시 30퍼센트 정도 채워져 있었다.
‘이제 슬슬 70레벨이 멀지 않았네.’
알렉스는 고민 없이 스킬 포인트를 사용했다.
[신앙 Lv 9]
다음 레벨 업까지 신앙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해 마스터할 생각이다.
최근에는 딱히 신성력이 부족해 곤란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야만 70레벨에 원하는 스킬을 바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45레벨에 디바인 크로스를 배웠던 것처럼, 70레벨에도 선행조건을 채우면 개방되는 특별한 스킬들이 존재하고 있다.
‘뭘 배울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레벨 2개만 더 올리면 되는 일이네.’
“아앗? 알렉스 경!”
포인트를 사용하고 잠시 스킬창을 둘러보고 있자니, 이사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또 다른 적이 나타나기라도 했나 싶어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 알렉스는, 이사벨이 당황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 그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니, 이 자식이 또?”
킹이 죽은 트롤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억지로 끌고 왔던 용병 사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함께 보인다.
육식, 그것도 몬스터 고기를 먹는 말이라니.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면 당장 사악한 괴물로 몰려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이놈의 말 새끼는 왜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
아무리 주인인 자신이 성기사라고 하지만, 타고 다니는 애마가 이런 상태인 것이 교단에 전해지면 도저히 커버를 쳐줄 방도가 없었다.
“야 임마! 당장 멈추지 못해!?”
킹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간 알렉스가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크르르륵.
하지만 킹은 물러나기는커녕 맹수나 낼 법한 울음소리를 내며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이어서 킹의 몸에서 뼈가 뒤틀리기라도 하는지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며, 몸을 덮고 있던 털들이 우수수 뽑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흉측한 몰골이 되어가는 킹의 모습에, 근처에서 가만히 굳어 있던 델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지른다.
“으아악!? 괴, 괴물이다앗!”
“망할, 닥치고 있어!”
짜증스러운 마음에 괜히 델을 향해 성을 낸 알렉스는, 이를 갈며 킹을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평범한 말로 만들어 데리고 다니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결국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던 모양이다.
지잉.
알렉스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통제가 될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래도 여기에서 이 녀석과의 인연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신성력으로 가득한 빛의 칼날이 킹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새까만 핏물이 흘러내리며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그륵, 푸르륵!
목이 반쯤 잘린 킹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몸을 붙였다.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알렉스가 흠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당연히 거센 저항이 있을 줄 알았는데, 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려보기만 할 뿐 반항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너 이 자식…… 이런 썅…….”
알렉스는 킹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상황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에 품은 괴물의 힘 때문에 괴이하게 변해가고는 있었지만, 킹은 여전히 알렉스에 대한 충성심을 잃진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녀석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주인을 기억하고 따른다 해도 외형이 괴물처럼 변해버린다면, 교단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킹도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죽음을 각오한 것인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목을 빼고 앉아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한숨을 몰아쉰 알렉스가 킹의 목덜미 뒤쪽을 쳐다보았다.
안장 앞에 걸려 있는 베로드의 눈물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반짝거린다.
‘망할. 이딴 게 무슨 보물이라고. 성인의 힘이 담겼니 어쩌니 하더니,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잖아?’
애마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 심사가 뒤틀린 알렉스는, 성검을 역수로 잡으며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미안하다. 내가 뭔가를 더 해줄 수 있었더라면…….”
킹을 향해 작게 중얼거린 알렉스가 빛나고 있는 성유물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킹을 죽여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며 감정이 많이 흐트러지기도 했고, 기대와 달리 큰 효과를 내주지 못한 성유물에 대한 분노로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빛의 칼날이 푸른 보석을 파괴하며 킹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으엣! 알렉스 경!?”
성유물을 망가뜨리는 불경한 행동에 지켜보고 있던 이사벨이 눈을 크게 뜨며 기겁했지만, 막아서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파괴된 베로드의 눈물이 가루가 되어 킹의 몸 위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렉스는 기묘한 신성력의 파동이 주변으로 퍼지는 것을 감지했다.
‘……성유물이 파괴되면 원래 이런 현상이 생기나?’
으직, 으드득.
킹의 몸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막 성검을 뽑으려던 알렉스는, 주변에서 요동치던 신성력이 킹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감지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뭔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상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