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2화
우연한 의뢰(3)
“여기서부터는 코볼트들의 영역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요. 초입부터 놈들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아직 한참은 더 들어가야 흔적을 찾을 수 있겠지만 말입죠.”
“그런가. 수고했군.”
“저, 기사님.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는 걸로…….”
“무슨 소리를 하나? 아직 트롤로 추정되는 그 몬스터는 찾아보지도 못했거늘.”
“하, 하지만 정말로 트롤이 나타난다면 저 같은 놈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요?”
“전투에 끼라고는 말할 생각도 없다. 일이 끝나고 부산물을 처리할 때나 나서면 되겠군.”
어림도 없다는 듯이 잘라내는 알렉스의 대답에, 용병 사내는 울상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전투에 끼고 안 끼고를 떠나서, 트롤 같은 무서운 몬스터를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그였다.
‘아무리 기사가 두 명이라도 트롤 사냥은 쉽게 장담할 수 없을 텐데. 나 같은 게 근처에 있다가 휘말리면, 저항도 못 하고 순식간에 뒈져버리는 거 아냐?’
사내는 푼돈에 욕심을 부렸다가 이상한 기사에게 코를 꿰이게 만든 과거의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잔뜩 욕설을 날려 주었다.
“알렉스 경! 저것 좀 보십시오. 몬스터의 흔적인 것 같습니다.”
초입이라 아직 뭐가 없을 것이란 용병 사내의 말과 달리, 이사벨이 금방 어떤 것을 발견했는지 알렉스를 불렀다.
조금 움직이자 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무언가의 사체가 보인다.
사실상 뼈 뭉치에 가죽 쪼가리 일부가 붙어 있는 정도.
뿌려놓은 것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뼈들을 살펴본 알렉스가, 조각난 두개골을 발견하고 원형을 대강 유추하며 긴가민가한 태도로 말했다.
“산짐승인가? 오소리나 너구리 비슷한 동물로 보이는군요. 늑대라기엔 조금 작은 느낌이고.”
난잡하게 퍼져 있는 뼛조각들을 보아하니, 무리를 이룬 무언가가 사냥감을 잘게 찢어 나눠 먹은 것으로 보인다.
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곧바로 머릿속에 코볼트 무리가 범인일 것이란 추측이 떠올랐다.
‘저 용병이 말한 대로 확실히 코볼트가 활동하는 구역이긴 한 모양이군.’
다른 흔적이 더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슬금슬금 다가와 사체를 살핀 용병이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엇! 이거 코볼트입니다요!”
“그래. 코볼트들의 사냥 흔적으로 보이는군.”
“아, 아니. 그것도 맞지만, 이 사체가 코볼트의 것이란 소리였습니다요.”
“으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자, 용병 사내가 뼛조각을 뒤적거리며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사이즈를 보니 확실합니다요. 코볼트 놈들은 오래 굶주리면 무리에서 가장 약하거나 다친 동족을 잡아먹기도 합죠.”
“호오, 코볼트에 대해 제법 잘 아나 보지?”
“흐흐.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놈들은 제 전문입죠.”
“딱 그 수준의 몬스터밖에 사냥할 실력이 안 되나 보군?”
무심코 뱉은 말이 팩트 폭력이 되었는지, 용병은 바로 기가 죽어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에, 뭐…… 딱히 받아주는 용병대도 없고, 비슷한 처지인 놈들끼리만 모여서 일을 하다 보니…….”
“흐음. 아무튼, 자네 말대로라면 배고픈 코볼트 무리가 이 근처를 지나갔다는 소리인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그것들이 마땅한 사냥감도 드문 이런 변두리까지 기어 나오는 경우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찾는 몬스터 때문인 것 같군.”
대적이 불가능한 천적에게 영역을 침범당했다면, 기존의 활동 구역을 벗어나 외곽까지 도망쳐 나올 만도 하다.
적어도 트롤이라 예상되는 괴물을 봤다는 토미의 이야기가, 잘못된 착각일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안쪽을 향해 더 진입한 알렉스 일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자신들이 찾던 목표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이익?
“으아악! 트, 트롤! 진짜 트롤이잖아!”
“어이.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기 내 말 옆에 딱 붙어 있도록. 그러면 안전할 거다.”
사람보다 머리 몇 개쯤은 큰 몬스터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용병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표정이 되어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바로 등을 돌려 달아나지 않은 것은, 기사들에게 밉보였다간 살아도 산 게 아니란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
‘시, 시부럴! 그래도 기사가 둘인데 충분히 잡아낼 수 있겠지? 조금이라도 질 것 같으면 바로 빠져야겠다.’
말 옆에 있으면 안전할 거라는 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여차하면 타고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용병 사내는 알렉스의 지시대로 킹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워어억!
‘어디 수준이 어떤지 보실까?’
큼지막한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는 트롤의 앞을 막아선 알렉스가, 방패를 들어 녀석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묵직한 충격이 팔뚝을 타고 흐른다.
알렉스의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조금 약한데?’
방패 너머로 통증이 느껴질 정도의 충격이긴 한데, 예상한 것보다는 위력이 떨어진다.
의아해하던 알렉스는 이내 납득을 하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트롤 이전에 상대했던 몬스터가 오우거였다 보니, 아무래도 몸이 그때의 감각과 비교하며 어색해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트롤급의 몬스터면 60대 후반인 알렉스와 비슷한 수준의 레벨을 갖고 있을 테지만, 오우거와 놓고 견주기엔 격의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워낙 빡센 놈을 상대하다가 비슷한 수준인 적을 만나니,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구만.’
트롤과 한 번 부딪치고 빠진 알렉스는, 돕기 위해 다가오던 이사벨을 보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사벨 경! 저 혼자 해보겠습니다.”
“앗? 괜찮으시겠습니까?”
“충분합니다.”
방금 보인 일격으로 대충 견적이 나왔기에, 알렉스는 자신만만하게 트롤과 일대일 결투에 들어갔다.
‘마침 테스트할 것도 있고.’
[리플렉트 실드]
고함과 함께 몽둥이를 내리치는 트롤과 마주하며, 알렉스는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 익힌 스킬을 발동해보았다.
타격 부위의 각도를 조절해 트롤의 공격을 방패로 비스듬히 흘려보낸 알렉스는, 방패의 표면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솟구치는 것을 발견했다.
화살처럼 쏘아진 빛줄기는 트롤의 몸에 닿자, 나이프로 긁은 것 같은 가느다란 자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하. 이런 식인가.’
데미지 반사의 효과가 도대체 어떻게 구현될지 의문이었는데, 아무래도 타격을 받을 때마다 저 빛줄기가 대신 공격을 해주는 방식인 모양이다.
다시 한번 휘둘러지는 몽둥이에 알렉스는 이번엔 요령껏 피해를 줄이는 대신, 처음의 충돌처럼 정면에서 트롤의 공격을 받아내 보았다.
쿵.
시큰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지켜보자, 이전보다 더 선명한 빛줄기가 트롤의 몸을 베고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아까보다 더 깊고 넓어진 자상.
벌어진 상처로 핏방울이 맺힌다.
‘음. 이 정도인가.’
상대의 공격이 가하는 위력이 높을수록 반사 피해량도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몇 차례 더 공방을 이어간 알렉스는, 리플렉트 실드의 성능을 파악하고 실험을 종료했다.
‘방패 위를 때릴 때만 스킬이 제대로 발동하는군. 반사공격의 위치는 무작위인가. 이걸 조절할 수 있으면 더 효과적일 텐데. 조금 아쉽네.’
나쁘진 않지만 아주 좋다고 하기는 애매한 스킬이다.
반사공격이 눈에 보일 정도의 피해를 입히긴 하지만, 직접 검을 휘둘러 공격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떨어지는 위력.
그래도 게임과 달리 공격기회가 훨씬 제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막기만 해도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 자체는 유용하긴 하다.
특히 다수를 상대하며 수비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쓸모 있는 스킬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냥저냥 포인트 값은 하는 정도인가. 당장은 더 투자하기 조금 애매하긴 한데, 반사피해의 증가폭이 크게 늘어난다면 마스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알아보려던 건 다 끝났으니, 트롤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알페리온을 뽑은 알렉스는 슬슬 익숙해진 녀석의 공격 사이를 파고들며, 마음껏 검을 휘둘러 놈의 몸에 칼집을 만들어주었다.
방패 하나로 막기만 할 때도 크게 밀리지 않던 알렉스가 검까지 사용하자, 전투의 형세가 급격하게 한쪽으로 치우친다.
다만 몰아붙이는 양상에 비해서, 끝맺음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였다.
재생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트롤의 특별한 능력 때문.
깊은 부상을 만들어도 부글거리는 기포가 발생하며 상처가 눈에 띄는 속도로 아물어가니, 이사벨처럼 압도적인 공격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놈을 빠르게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걸리는 거야 딱히 문제 될 건 아니니 상관없지. 전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결국은 시간을 들이면 해치울 수 있겠군. 이참에 실전 감각이나 더 다듬어보는 거지 뭐.’
트롤의 약점은 심장과 머리뿐이다.
그중에서도 심장은 가슴을 덮는 근육과 뼈가 워낙 두터워, 공략하기가 쉽지가 않다.
게다가 심장을 찔러도 움직임이 조금 둔해질 뿐, 절반 이상을 파괴하는 게 아니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해버리고 말 정도로 트롤의 재생력은 대단하다.
가장 효과적인 처치법은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인데, 트롤의 목뼈는 신체 부위에서 가장 단단한 곳이라 이 역시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도 그나마 심장과 달리 외부에 돌출되어 있는 부분이기에, 공략하기가 조금 더 수월한 약점이기는 했다.
알렉스는 트롤의 공격을 받아내며, 차근차근 녀석의 목에 피해를 누적시켜갔다.
그와아악!
‘흐음. 내가 강해지긴 한 건가? 오우거와의 비교를 제외해도, 트롤이 예상한 것보다 너무 쉬운 느낌인데.’
시간이 조금 걸리다 뿐이지, 전투 상황은 매우 순조로웠다.
트롤이 계속 괴성을 지르며 거칠게 날뛰고 있지만, 알렉스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상황.
그런데 녀석을 거의 다 해치워갈 무렵,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워억!
그에에엑!
“허억! 트, 트롤이 또 있잖아!”
알렉스가 싸우는 모습에 뒤편에서 안심하고 있던 용병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또 다른 트롤의 모습에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새로 등장한 트롤은 기존의 녀석보다 훨씬 체구가 컸으며,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였다.
“어엇……?”
알렉스는 낭패스러운 심정을 느끼며 트롤들의 모습을 살폈다.
얼굴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는 체형.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트롤이었다.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 지금까지의 전투가 생각보다 쉬웠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저쪽이 성체구나! 이 녀석은 아직 덜 자란 트롤이었어.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설마 가족 단위로 있었다니.’
성체 트롤의 키는 3미터가량.
반면 알렉스가 상대하던 놈은 머리 하나쯤 더 작은 놈으로 준성체에 속하는 트롤이었다.
거의 다 자란 녀석이라 독립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아직은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개체였던 것이다.
“이사벨 경!”
“이야압!”
알렉스의 부름에 이사벨이 대답도 생략하고 다가와 있는 힘껏 폴액스를 휘둘렀다.
이제는 제법 손발을 맞춘 시간이 있다 보니, 길게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로 파악하고 행동에 나서준다.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던 준성체 트롤의 목에 폴액스의 날이 틀어박히며, 놈의 머리가 잘려나가 허공에서 빙그르르 회전했다.
막타를 놓치게 된 것은 조금 아쉽지만, 더 위험한 적을 앞둔 상황이니 미적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크에에에엑-!
면전에서 자식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본 트롤 부부가, 눈을 까뒤집고 광분하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씩 상대합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지켜보고만 있느라 좀이 쑤셨었는지, 이사벨이 활기찬 음성으로 대답하며 폴액스를 휘두를 수 있게 뒤로 젖혔다.
알렉스 역시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세를 고쳐 잡고 달려드는 트롤을 맞이했다.
두 명의 성기사와 두 마리의 트롤이 동시에 격돌하며,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