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0화
우연한 의뢰
“이런, 정말로 오우거라니…… 아! 미안하네. 자네를 믿지 못해서 하는 소리는 아닐세.”
판디움의 성기사단장은 알렉스가 회수해온 오우거 사체를 확인하고 침음을 흘렸다.
“이해합니다. 저도 원래 오우거가 이런 도시 주변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아니라고 알고 있긴 합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도시들이란, 자연의 생태계를 기준으로는 역으로 변두리라 할 수 있는 위치.
먹이사슬의 정점에 속해 있는 오우거가 출몰할 만한 지역이 아니다.
타고난 포식자인 오우거는 먹잇감이 풍부한 깊은 숲속을 영역으로 삼아 활동하며, 어지간하면 자신이 정한 구역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없다.
활동 반경이 넓기 때문에 운 없는 여행자들이 가끔 잡아먹히긴 해도,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몬스터는 아닌 것이다.
‘그런 괴물들이 도시 주변에 흔히 출현하면, 애초에 주민들의 생활자체가 성립이 안 되겠지.’
오우거의 출몰을 알린 알렉스의 보고 내용은, 교단은 물론이고 영지 전체에 비상이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런 강력한 몬스터가 인간들의 생활 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도시에서 파악하고 있는 몬스터들의 세력도에 큰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
판디움은 식량의 자체 생산율이 적어 외부 영지와의 교역에 큰 의존도를 갖기에, 몬스터 생태계의 사소한 변동 하나도 악재로 적용될 수 있다.
“인근 몬스터 세력의 정보에 갱신이 필요하겠군. 귀한 정보를 알려주어 고맙네. 덕분에 빠른 대처로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일세.”
“제가 더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당분간 이 도시에 더 머물 예정입니다만.”
“……흐음. 쉽지 않은 전투를 치렀으니 조금 쉬는 게 어떤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내 따로 연락하도록 하겠네.”
경험치를 챙길 수 있는 활동이 있다면 참여하고자 운을 띄워봤지만, 성기사단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거부의 의사가 섞인 대답을 했다.
오우거를 해치운 알렉스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도시 내의 일에 깊게 관여시키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느낌이군.’
아마도 다른 교구에 소속된 팔라딘의 활약이 너무 돋보이게 되는 걸 원치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요.”
“음! 그대의 노고에 다시금 감사를 표하네. 예루스 님의 은혜가 언제까지고 함께하길 빌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것 같진 않았기에, 알렉스는 더 이상 이곳 교구에서 얻을 건 없다고 판단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언제쯤 판디움을 떠나실 겁니까?”
신전을 나서자 곧바로 일정을 묻는 이사벨에게, 알렉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을 해주었다.
“일단은 조금 더 머물 예정입니다.”
“곧 갑옷도 수리가 완료되지 않습니까?”
“예. 내일이면 찾을 수 있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바로 떠나진 않고 몬스터 사냥을 더 해볼 생각입니다.”
교구의 임무는 더 이상 없겠지만, 이렇게 몬스터를 찾기 쉬운 지역을 굳이 서둘러 떠나고 싶진 않았다.
경험치 바도 거의 다 채워진 상태이니, 이참에 레벨 업은 마저 치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용병길드도 한 번 더 들려야 하니, 이 근방에서 적당히 경험치를 올릴 만한 몬스터가 있는지 정보를 알아봐야겠군.’
길잡이를 맡았던 용병의 시신은 이미 길드를 거쳐 돌려보냈지만, 아직 보상에 대해선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기에 그쪽의 책임자를 다시 만나러 가기도 해야 했다.
길바닥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기에, 알렉스는 곧바로 용병길드를 찾아갔다.
“이봐, 저기 기사님들은 설마…….”
“오오!? 맞아! 오우거 슬레이어야!”
“허미 씨벌! 어떻게 악수 한번만 받아볼 수 없을까?”
“미친놈! 네깟 놈을 상대나 해주시겠냐?”
용병길드의 건물에 들어서자, 알렉스를 알아본 이들이 웅성거리며 내부가 꽤나 시끄러워졌다.
오우거 사체를 도시 내로 반입하는 과정을 나름대로 조용히 진행했었지만, 고작 기사 두 명이서 오우거를 사냥했다는 소문은 이미 판디움 내에 쫙 퍼져 있었다.
이곳 대륙의 무력을 대표하는 상징인 기사들에게 있어서도, 오우거와 같은 강력한 몬스터를 사냥한 것은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업적이 된다.
하물며 기사도 아닌 일개 용병들의 눈에는, 알렉스와 이사벨이 하늘 위의 존재처럼 여겨질 만도 했다.
“알렉스 경. 사람들이 다들 저희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지요.”
몸에 흉터가 가득한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선망을 담아 초롱초롱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모습에, 알렉스는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헛기침을 하며 인파를 지나쳤다.
명성이 자자해진 오우거 슬레이어의 방문에 금방 지부장이 달려 나왔고, 의뢰 중 사망한 용병의 처우에 대한 용건은 원만하게 처리가 되었다.
회수해온 오우거 사체가 꽤나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기에, 알렉스는 받은 대금의 상당 부분을 유가족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저희 같은 한낱 용병 따위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다니…… 반드시 이 일을 널리 알려 칭송토록 하겠습니다! 신성하고 명예로운 분들이시여!”
“……너무 과한 반응이군. 부탁이니 그러지 마시오.”
사실 용병업계에선 이런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에 대해서, 제대로 보상을 해주는 의뢰주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의뢰가 끝나기도 전에 죽었으니 계약은 자동으로 해지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도의적 책임감을 느껴 잔금이라도 제대로 치러준다면 덕망 높은 위인으로 취급될 정도.
실정이 그렇다보니 기존 의뢰비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지불한 알렉스는, 용병길드 지부장의 눈에 거의 인세에 강림한 천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둔 덕분에, 용병길드를 찾게 만든 다른 용건 쪽도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다.
길드에서 파악하고 있는 주변 지역의 몬스터 세력도에 관한 정보.
용병들의 밥줄과 깊은 연관이 있기에 관계자가 아니면 함부로 공개하는 정보는 아니지만, 알렉스는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그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솔직히 가치가 떨어져 버린 정보인 탓에 쉽게 알려준 점도 있긴 하겠다만.’
신전에서도 이미 이야기가 있었듯이, 오우거의 출현 자체가 이 근방의 몬스터 생태계에 변동에 생겼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더 이상 최신이라 할 수 없는 정보를 넘겨준 것이니, 지부장의 입장에서도 크게 부담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알렉스 또한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숲을 돌아다니는 것보단 그런 정보라도 있는 편이 사냥 활동에 도움이 될 테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바깥까지 배웅하려는 지부장을 극구 말려 안으로 들여보낸 후.
어떻게든 교분을 쌓고 싶은 마음에 다가오는 용병들을 적당히 대응해 떼어놓고, 두 사람은 서둘러 용병길드를 빠져나갔다.
“어떤 몬스터를 사냥하실 생각이십니까?”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이사벨이 향후 일정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냈다.
“글쎄요. 조금 고민스럽긴 합니다. 들은 대로라면 가까운 지역은 대부분 별 볼 일 없는 수준의 몬스터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실력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군요.”
“그럼 더 깊숙한 곳까지 진입하면 되지요. 마침 저도 그분의 은총을 받아 새로운 성법을 터득하게 되었으니, 어지간해선 위험한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만만한 이사벨의 발언에, 알렉스는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 성법은 당분간은 실전에서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앗? 어째서요!?”
“신성력의 소모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지 않습니까.”
오우거를 제압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근력은 분명 대단하긴 하지만, 10여 초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탈진해서 쓰러졌던 걸 생각하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갔다가 이사벨 경이 쓰러져버리면, 저희 둘 다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으읏! 그건 처음이라 그랬을 뿐이지, 익숙해지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포인트를 투자한 만큼 딱 정해진 성능을 발휘하는 알렉스의 스킬과 달리, 이곳 성기사들의 성법은 훈련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가능하니 말이다.
다만 그렇게 성과를 보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란 점이 문제다.
“네. 그러기 위해선 안전한 장소에서 장기간의 수련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이사벨 경은 이쯤에서 저와 헤어지고, 교구로 복귀해 훈련활동에 전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우거를 만났을 때처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알렉스 경의 지시 없이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수긍하고 따라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듣지 않을 거면 돌아가라는 식의 소리에, 이사벨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살짝 안쓰럽긴 했지만,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다고 생각 없이 남발하다가 위험을 초래해선 곤란하니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디보자. 그럼 이제 목표를 정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해야 할지 고민이네. 정보가 정확하리란 보장도 없는 상황이라 너무 깊은 곳까지 돌아다니기는 또 그렇고.’
최소한 지난번 놀 무리 이상의 몬스터쯤은 사냥해야,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알렉스가 용병길드에서 얻은 정보를 떠올리며, 적당한 대상을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다.
“어허! 내가 아니고서야 그런 푼돈을 받고 일하려는 용병이 있을 것 같아?”
“정말 트롤을 잡아주시는 거죠?”
“왜 이리 의심이 많아? 집에 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소식을 전해준다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세요.”
‘응? 트롤이라고?’
어딘가에서 관심을 끄는 단어가 들려와, 알렉스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병길드의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
누가 봐도 칼밥을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복장의 사내와,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작은 남자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가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알렉스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잠깐. 그 이야기 자세히 좀 들을 수 있겠나?”
“넌 또 뭐, 허억! 기, 기사? 무, 무슨 용건잇, 이십니까요?”
알렉스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자, 인상을 쓰며 돌아보던 용병이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지금 트롤 사냥에 대한 말이 오간 거 같은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한데 알려주면 좋겠군.”
“예? 아, 그게…… 그냥 요 어린놈의 헛소리일 뿐입니다. 기사님께서 신경 쓰실 그런 일이 아닙니다요.”
사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를 붙잡고 있던 남자아이가 빽 하고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트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 아저씨가 그 괴물을 처리해 주겠다고 방금 돈을 받았잖아!”
“이, 이놈의 애새끼가!? 닥치고 있지 못해?”
“이봐. 닥쳐야 할 건 그쪽인 것 같은데.”
“헙! 죄, 죄송합니다.”
알렉스의 시선이 남자아이에게로 옮겨졌다.
아무래도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려면, 용병사내보다 아이의 말을 듣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아버지가 트롤에게 참변을 당하셨다고? 그 이야기 내게도 들려주겠니?”
알렉스가 부드러운 태도로 말을 걸자,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대화를 통해, 알렉스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