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77화
남부산맥(4)
용병길드에 도착해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요청하자, 길잡이를 고용하는 일은 순식간에 완료가 되었다.
지부장이 직접 굽실거리며 알렉스를 응대하더니, 잠시 후에 딱 맞는 인재라며 용병 한 명을 잡아와 그에게 바쳤다.
“여기 이놈이 판디움에서만 십 년을 구른 용병입니다. 칼솜씨는 딱히 볼 게 없지만, 인근 지리에는 아주 빠삭한 놈입죠.”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음. 잘 부탁하겠소.”
길게 끌 필요도 없는 일이기에 곧바로 떠날 준비를 갖춘 알렉스 일행은, 교구에서 알려준 정보들을 길잡이에게 전달하고 판디움을 나섰다.
바깥으로 나온 길잡이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방향을 잡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듣자 하니 놀 무리의 출현에 대해선 용병들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하긴 몬스터들의 세력 변동에 관해서는 이곳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이 더 잘 알고 있겠군. 그럼 굳이 교단에서 나서지 않아도 길드에서 처리했을 일이 아닌가?”
“헤헤…… 기사 나리, 저희 천것들은 돈이 되질 않는 일에는 아무도 나서질 않지 말입니다.”
“아, 그런 문제였나.”
무리 생활을 하는 놀을 제거하려면 용병들의 입장에선 적지 않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놀은 부산물의 가치가 전혀 없다시피 한 하등 돈이 되질 않는 몬스터다.
도시에서 토벌 의뢰가 맡겨진다면 모를까, 돈을 벌기 위해 목숨 걸고 한탕을 뛰는 용병들이 굳이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턴 제가 앞에 서서 놀들의 흔적을 탐색할 테니, 기사님들은 천천히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그러지.”
숲길을 따라 반나절을 이동하고 나자, 길잡이의 움직임이 점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지나간 무리가 있습니다. 여기 발자국과 털을 보아하니 놀이 확실하지 말입니다.”
털이 몇 가닥 엉킨 진흙 부스러기를 만지작거리며 흔적이 남겨진 시간을 가늠하는 길잡이의 뒤에서, 알렉스는 담담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있겠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며칠은 된 흔적이고 발자국도 희미해 측정이 어렵습니다.”
“그런가. 어차피 수가 몇이든 처리해야 할 것들이니, 일단 계속 들어가도록 하지.”
알렉스의 말을 들은 길잡이는, 흔적을 더듬는 척 몸을 돌리고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이거 괜찮을지 모르겠네. 일반적인 놀 무리면 보통은 스무 마리에 가까운 규모는 될 텐데.’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두 남녀 기사.
관록 있는 기사라면 놀 같은 몬스터 따위야 홀로 열 마리도 가뿐히 잡아낸다 들었지만, 자신의 의뢰주들은 솔직히 실력이 어떨지 조금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나이로 보였다.
‘진짜 기사는 맞겠지? 교단의 의뢰니 가짜일 리는 없겠지만…….’
그나마 교단의 일이라고 하니 철없는 애송이 귀족 자제들의 헛짓거리는 아니겠으나, 두 기사 모두 이동하는 내내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점이 괜히 거북했다.
용병들 사이에선 몬스터의 영역에서 저리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정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거나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나대는 초짜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알렉스와 이사벨은 그다지 경험 많은 기사처럼 보이는 외형은 아니었다.
‘엇?’
걱정스러운 마음에 괜히 자신을 추천한 용병길드의 지부장을 욕하던 길잡이는, 무언가의 기척을 감지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수신호를 보내자, 기사들이 얌전히 그 자리에 정지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대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길잡이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몬스터 특유의 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수풀 사이로 커다란 나무의 그늘에 모여 앉아, 낮잠에 빠져있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흔적을 쫓아 추적해 온 목표 대상인 놀들이었다.
야행성에 가까운 놈들인지라 이 시간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
놀들의 수를 세어본 길잡이는 생각보다 많아 보이는 놈들의 규모에 얼굴을 구겼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거의 서른 마리에 가까운 숫자다.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적이 더 있을 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면, 예상한 것보다 배 이상의 규모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사 둘로 괜찮은 건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질 못하니 원.’
남부 토박이로 몬스터 헌팅만 십 년째 해먹고 있는 그였지만, 기사라는 족속들과 함께 일을 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이 앞섰다.
일단 상황을 알리고 두 사람과 상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길잡이 용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뒷걸음질 치려 했다.
크웡?
그런데 낮잠을 즐기던 놀들이, 갑자기 귀를 쫑긋거리며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분명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은밀하게 이동했는데?
당황하던 길잡이는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놀들이 깨어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젊은 기사들 중 남자 쪽이 끌고 온 말이 몬스터의 냄새를 맡고 불안함을 느꼈는지, 투레질을 하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놀들은 귀가 매우 밝은 편이다.
‘제기랄! 타지도 못할 말은 도대체 왜 끌고 온 거야?’
우거진 숲속이라 어차피 말을 타고는 달릴 수 있는 지형도 아닌데, 굳이 말을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알아서 처신하겠지 하고 넘어갔더니 이 사단이 벌어졌다.
욕설을 삼키고 뒤돌아 뛰어온 용병은 의뢰주들을 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놀 서른 정도! 피하는 편이 좋겠지 말입니다!”
“맞게 잘 찾아왔나 보군. 고생했소. 뒤에서 잠시 쉬고 있으시오. 이사벨 경, 갑시다.”
“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갈 수 있겠군요.”
분명 급박하게 외쳤는데 어째 기사들은 전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알렉스와 이사벨은 침착한 태도로 무기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컹컹!
으워어얼!
개가 짖어대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터뜨리며, 놀 무리가 튀어나와 두 사람을 둘러쌌다.
지잉.
가벼운 떨림과 함께 알페리온이 칼날을 뿜어냈다.
알렉스는 자신을 덮쳐오는 놀들을 향해, 별로 힘을 실은 것 같지도 않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판금갑옷은 수리를 위해 맡긴 탓에 전체적인 방어능력이 떨어졌지만, 불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애초에 실력 차가 확연한 적들이기에 공격을 허용할 일도 없다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빛의 칼날이 허공에 한 줄기 선을 긋자, 놀 두 마리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방패를 쓸 일도 없겠군.’
수준급의 검술 스킬을 갖추고 본인의 레벨도 제법 높아졌다 보니, 놀들의 움직임이 애들 장난처럼 뻔히 눈에 보였다.
굳이 방패로 막으려 들 것도 없이 가벼운 발놀림으로 놈들의 틈을 파고들며 검을 움직인다.
간단한 동작 하나마다 놀들은 급소에 구멍이 생기며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이사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리치가 길고 무거운 폴액스를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나뭇가지 다루듯 휘두르니, 그녀에게 접근하던 놀들은 죄다 몸이 두 동강 나며 냄새나는 고깃덩어리로 변하게 되었다.
차마 전투라 부를 수도 없는, 그저 피비린내로 가득한 도살장의 모습이었다.
“허억.……”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길잡이는, 무시무시한 두 사람의 무용을 목격하고 입을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졌다.
말로만 듣던 기사의 무력이란 게 설마 저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놀랄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히히힝!
“어엇!”
기사가 데려온 말이 겁도 없이 학살의 현장에 뛰어들더니, 놀들을 걷어차거나 머리를 물어뜯으며 사냥에 동참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 미친. 저건 또 뭐야!’
자신도 이 근방에선 제법 실력에 자신 있는 용병으로, 놀이라면 혼자서 서너 마리까진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다.
한데 어째 자신보다 더 잘 싸우는 게 아닐까 싶은 말을 보고 있자니, 용병으로의 자부심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놀들과의 전투는 고작 1분 남짓한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수준의 격차가 워낙 심했기에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경험치는 역시나 거의 없는 수준이군. 1퍼센트도 안 오른 것 같은데.’
놀을 열댓 마리 정도는 잡은 것 같은데, 레벨 차이가 크다 보니 영 경험치가 오르질 않았다.
그래도 잠깐 몸을 풀고 이만큼의 경험치면, 마냥 불평할 양은 또 아니긴 하다.
‘게임처럼 한 곳에서 계속 이런 규모로 리스폰이 되어준다면, 반복 작업을 통해 레벨을 올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말이지.’
게임과는 달리 몬스터들도 생태계란 게 있다 보니, 경험치를 얻을 기회를 찾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65레벨이면 사실 게임 유저의 기준으로는 고레벨도 아닌데, 현실이 된 이곳에선 벌써부터 레벨을 올리기가 꽤나 막막했다.
프히히힝!
“……또 지랄이네 저거.”
잠시 마음속으로 푸념을 늘어놓던 알렉스는, 놀을 전부 해치웠음에도 킹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타고 다닐만한 지형이 아니라 이사벨은 로자리아를 두고 왔지만, 킹은 눈에 닿지 않는 곳에 두기가 불안해 사냥에 함께 데려왔다.
어차피 놀에게 공격당한다고 해서 죽어버릴 녀석이 아님을 잘 알기에, 같이 있어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싸움만 벌어지면 미쳐 날뛰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커다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씩씩거리는 킹에게 다가간 알렉스는, 이전처럼 방패에 홀리 웨폰을 걸고 머리를 힘껏 후려쳐주었다.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녀석을 두어 대쯤 더 때려주자, 지난번처럼 베로드의 눈물에서 푸른빛이 발산되며 킹이 다시 온순함을 되찾았다.
‘……이게 내 신성력에 성유물이 반응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꼭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모양새라 마음이 좀 불편하네.’
세상에 자신의 말을 이렇게 두드려 패가며 타고 다니는 기사는 아마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정신을 차린 킹의 목을 두드려준 알렉스는, 길 안내를 해줄 용병을 부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놀 무리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조금 더 주변을 둘러봐야 할 것이다.
한데 이상하게 그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음? 이사벨 경. 길잡이가 어디로 갔는지 보셨습니까?”
“앗! 방금까지 저쪽에 있었던 거 같은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르겠네요.”
“거참…… 꽤나 몸을 사리는 용병이군.”
놀들과 맞부딪힐 때까지만 해도 뒤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새 겁이 나서 멀찌감치 도망가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찾기 위해, 알렉스가 막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으적.
머리 위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알렉스는, 충격적인 광경에 눈을 부릅뜨고 호흡을 멈추었다.
커다란 나무 위에 목이 꺾인 채로 죽어 있는 길잡이 용병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시체의 팔을 뜯어내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거대한 ‘그것’의 모습도.
‘……대체 언제 저런 게 다가온 거냐.’
근처에서 일행이 습격당할 동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매우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쿵.
나무 위에 있던 ‘그것’이 아래로 뛰어내려 알렉스와 이사벨의 앞에 섰다.
육중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경쾌한 몸놀림이다.
잠잠하던 감각이 뒤늦게 옅은 살기를 감지하고 경종을 울린다.
“예루스시여…….”
놈을 마주한 이사벨이 절로 자신의 신을 찾았다.
그럴 만도 하다.
눈앞에 있는 괴물은 몬스터 중에서도 아주 악명 높기로 유명한 녀석이었기에.
포악한 성격과 거대한 덩치를 가졌음에도, 수풀에 엎드린 표범처럼 은밀한 사냥 솜씨를 갖춘 숲속의 제왕.
명예를 드높이고자 자신을 사냥하려는 수많은 기사들을 역으로 짓밟으며, 기사 살해자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몬스터.
오우거.
판타지에 관심이 있다 싶은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