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76화
남부산맥(3)
험한 지세로 인해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남부 지역은, 약초 채집이나 벌목 등의 산림업과 광업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위에 나열한 직종들에 종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숲과 산을 영역으로 삼는 몬스터들과 충돌을 빚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남부지역은 몬스터 헌팅을 주력으로 삼는 용병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구역이기도 하다.
“오오! 그리폰의 가죽이라니, 이건 아주 귀한 상품이군요!”
남부의 도시 판디움.
목적지로 삼은 장소에 도착한 알렉스는 오는 길에 해치웠던 그리폰에게서 얻은 소재들을 팔기 위해, 몬스터 부산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에 들렀다.
비행형 몬스터의 부산물은 지상 생활을 하는 몬스터들보다 사냥이 까다로워, 시장에 매물이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특히나 그리폰 같은 강력한 몬스터를 목표로 노릴 수 있는 실력 있는 용병대는 매우 드물어, 이쪽 업계에 오래 종사해온 상점 주인도 거래해 본 적이 드문 진귀한 물건이었다.
“혹시 기사님께서 직접 이놈을 사냥하신 겁니까?”
“동료와 둘…… 아니, 셋이 함께 잡은 거지만 아무튼 그렇소.”
“어이쿠! 기사 세분이서 그리폰을 처치한 것도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 아닙니까?”
정확히는 기사 둘에 말 한 마리였지만, 상점 주인은 젊은 기사 셋이 명예를 얻고자 힘을 합쳐 강한 몬스터를 사냥한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나이 어린 기사가 그리폰을 쉽게 잡았을 리는 없지. 병사나 용병 수십 명쯤 데려가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겠구먼. 쯧쯧!’
그마저도 기사들의 수만 셋이고, 부하들을 꽤나 갈아 넣었을 거란 추측이 함께였다.
물론, 내심은 그래도 겉으론 티를 내지 않는다.
기사 앞에선 무조건 아부를 떨며 비위를 맞춰주어야지, 괜한 소리를 했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소인이 눈이 어두워 영웅들을 미처 알아 뵙지 못했군요!”
“영웅은 무슨. 그보다 이거 가격은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의 기사들은 작은 이름값 하나만 생겨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나곤 하는데, 그리폰을 잡았다는 기사가 칭찬에도 너무 덤덤한 태도라 상점 주인은 일순 당황했다.
“어…… 일단 가죽 전체를 확인하고 견적을 내보겠습니다.”
두툼한 가죽뭉치를 푼 상점 주인은 전문가의 눈으로 상품을 면밀히 살피며 가치를 가늠했다.
알렉스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론 꽤나 기대하며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가격이 좀 돼야 하는데.’
그간 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지만, 지금은 사정상 돈이 꽤 필요했다.
스톤골렘과의 전투에서 판금갑옷이 손상되었기 때문.
박살 난 방패는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바로 교체했지만, 갑옷은 워낙 고가의 물품이라 수리비용조차 만만치 않았다.
해서 일단 임시조치로 뜯겨나간 옆구리 부분을 대강 때워두긴 했는데, 마침 이렇게 돈이 나올 구석이 생겼으니 가능하면 이 도시에서 갑옷을 제대로 수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가죽이면 제 감정으로는…… 이 정도 가격을 쳐드릴 수 있습니다.”
상점 주인이 제시한 금액을 들은 알렉스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낮은 가격이란 느낌은 아니지만, 그가 부른 금액이 판금갑옷의 수리비에 조금 못 미친다는 점이 아쉽다.
그리고 사실 이런 물품의 시세는 잘 모르지만, 바로 콜을 부르는 것보단 조금 튕겨줘야 가격이 더 올라가지 않겠는가.
“조금 기대에 못 미치는 가격인데.”
“통짜 사체였다면 이 두 배까지도 받으셨을 겁니다. 귀족분들이나 마법사들에게 비싸게 넘길 수 있었을 테니 말이지요.”
상점 주인의 말에 알렉스는 입맛을 다셨다.
‘다 가져올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겠지.’
수레 같은 게 있다면 사체를 통째로 끌고 올 수 있었겠지만, 말의 등짐에 올릴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벗겨낸 가죽의 부피도 상당한 것을 그나마 킹이 보통 말이 아니라서 싣고 올 수 있었지, 다른 평범한 말이었다면 이 절반조차도 챙겨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목 주변을 제외하면 상처도 거의 없는데. 더 쳐줄 수 있지 않겟소?”
“아이고~ 이 정도면 잘 쳐드린 겁니다. 물론 그리폰의 가죽이 귀한 물건이긴 합니다만, 이건 박피 기술이 전혀 없는 초짜가 벗겨낸 모양이더군요? 품질이 그리 좋다고 말씀드리기가…….”
“내가 직접 벗겨서 그렇소. 그렇게 많이 상했는가?”
“어엇, 기, 기사님이 하신 겁니까? 크흠.”
“그쪽으론 지식을 갖추지 못해 부족함이 있긴 하겠군. 그래도 시간이 오래 흐른 게 아니라, 가죽 품질이 심하게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상인으로서의 흥정 기술이 몸에 밴 탓에 자연스럽게 상품에 대한 흠을 지적했던 상점 주인은, 괜히 기사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더 따지고 들지 못했다.
분야가 뭐가 되었든 기사에게 당신이 잘못한 게 있어서 돈을 더 못 쳐준다고 말하기는, 그에게도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흠! 그냥 뭐랄까, 최상품이 아니라 아깝다는 소리였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품가치는 있지요. 다시 생각해보니 기사님 말씀대로 면적에 비해 상처 부위가 적어 활용하기도 좋고…… 그럼 이런 가격은 어떻습니까?”
처음보다 10퍼센트 가까운 상승폭.
나쁘진 않지만 알렉스는 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아직 더 올려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현대의 상거래에서도 누구보다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낀 유통업자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상인들은 생산자와 소비자 양측을 후려치며 폭리를 취해왔다.
공정거래법 같은 규제가 희미한 이쪽 세계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더 비싸게 받아낼 수 있도록 연기를 좀 해줘야겠군.’
알렉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상점 주인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호의를 사려면 역시 신성력을 팔아먹는 게 좋다.
“자세히 보니 그대의 몸에 영 좋지 못한 기운이 조금 쌓여있군.”
“옙? 갑자기 무슨-”
“내 당신을 위해 잠시 기도를 올려 축복을 내리도록 하겠소.”
[블레싱]
알렉스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이자, 상점 주인이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신성력을 다룰 줄 안다고 여기저기에서 거들먹거리고 싶진 않지만, 갑옷 수리비를 생각하면 이 정도 쇼는 보여줄 만하다.
상대가 가난한 이었다면 이득 조금 보자고 이런 짓을 하진 않겠지만, 저쪽은 도시에 자신 소유의 상점을 세울 정도로 돈을 만지는 상인이 아닌가.
“허업! 서, 성기사님이셨습니까?”
“음. 부족하게나마 그분의 검으로써 봉사하고 있소.”
교단의 위세가 먹히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축복의 힘으로 몸에 활력이 돌자 깜짝 놀라 굳어진 상점 주인을 보며, 알렉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혓바닥을 능란하게 놀렸다.
“사실 본인이 판디움에 온 것은 도시의 안전을 위해, 몬스터를 격퇴하는 교단의 임무를 받기 위함으로-”
난 당신과 당신 가족들이 사는 이 땅을 지키러 온 사람이다.
그런데 이전 전투에서 갑옷이 망가져 버렸다.
이걸 팔아서 그 돈으로 갑옷을 고치고, 다시 몬스터와 싸울 것이다.
당신이 지불하는 돈이 신께 바칠 영광으로 돌아가게 된다.
알렉스는 플레이트 아머의 임시로 수선한 부분을 은근슬쩍 보여주며, 위와 같은 이야기를 잘 포장해서 들려주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예상은 했지만 많이도 남겨먹으려고 했구만.’
성기사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마음을 시작으로 하여, 알렉스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상점 주인의 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 제시한 가격의 두 배를 넘어 거의 세 배에 가까운 금액으로 그리폰 부산물을 팔아치운 알렉스는, 은화로 가득 찬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실소를 흘렸다.
어쨌거나 돈이 생겼으니 갑옷 수리비에 대한 부담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대로 도시에서 가장 큰 대장간을 찾은 알렉스는, 대금을 지불하고 판금갑옷의 수리를 맡겼다.
며칠은 걸린다는 수리기간 동안 맨몸으로 돌아다닐 순 없기에, 그 동안 대여비를 내고 적당한 갑옷 하나를 빌리기로 했다.
‘뉴비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군.’
사용자의 체형에 맞춰 제작해야 하는 판금갑옷은 기성품이란 게 거의 없기에, 오랜만에 체인메일을 걸치고 초보자로 돌아온 심정을 느껴야했다.
“그렇게 입고 계시니 알렉스 경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예, 뭐. 하하. 그래도 그때보단 훌륭한 무장 상태이긴 합니다.”
“저와 같은 성유물 갑옷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경께서는 예루스님의 관심을 받고 계신 분이니, 금방 그런 보상을 받을 만한 공적을 쌓게 되실 겁니다.”
“……으음.”
이사벨의 성유물 갑옷 정도를 보상으로 받으려면 상당한 공적을 세워야할 텐데, 그건 분명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야 하는 것일 테니 쉬이 긍정을 표하긴 어려웠다.
도시 내에서 볼 일을 다 끝낸 후에서야, 알렉스는 느긋하게 판디움 교구의 신전으로 향했다.
몬스터가 많은 지역이긴 하지만 대단한 임무가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바이로크에서 경험했듯이 큼지막한 임무는 흔하지 않은 법이고, 적당한 임무가 있어도 이곳 소속의 팔라딘들이 우선적으로 투입될 테니 자신에게 돌아올 만한 건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설마 또 고블린 따위나 잡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 정도로 수준 떨어지는 상대와 전투를 치르진 않아도 되었다.
판디움 교구의 성기사단장은 알렉스와 이사벨을 반겨주며, 그들에게 적당한 임무를 부여해 주었다.
“놀…… 입니까?”
“그러하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구에서는 주기적으로 도시 주변을 돌며, 인근 몬스터들의 개채수가 늘지 않도록 관리를 해주고 있지.”
판디움의 팔라딘들은 도시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몬스터들의 영역이 인간들의 터전으로 확장되지 않도록 꾸준한 ‘청소’를 해왔다.
이를 통해 실전경험을 쌓고 도시주민들의 민심을 장악하며 영주 가문의 정기적인 봉헌까지 받고 있으니, 교단의 입장에선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보는 사업의 하나였다.
“최근 우리 측에서 정리해 둔 구역에, 놀 무리가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고 정착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모양일세. 아직 우리 성기사단이 출동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미뤄두고 중이네만, 자네들이 나서준다면 딱 적당한 임무가 될 것 같군 그래.”
놀은 이족보행하는 하이에나를 상상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생김새의 종족으로, 오크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지닌 몬스터이다.
기사가 상대하기엔 조금 격이 떨어지긴 해도, 그만하면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임무였다.
‘고작 고블린도 잡으러 다닌 마당에 놀이면 나쁘지 않지. 규모가 크지 않은 무리라니 경험치는 얼마 못 올리겠지만.’
어차피 갑옷의 수리기간도 있어서 뭐라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고, 기대하지 않은 것 치고 이만하면 괜찮은 임무다.
알렉스는 흔쾌히 판디움 성기사단장의 제안을 수락했다.
“저희가 말끔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참, 출발 전에 용병길드에 들려 교단의 이름으로 길잡이를 한명 뽑아가게. 몬스터의 영역이란 건 워낙 얼기설기 얽혀있어, 행여나 다른 곳에 잘못 발을 들이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말일세.”
“네. 그리하겠습니다.”
다른 몬스터가 더 나와 준다면 오히려 고맙겠지만, 알렉스는 괜한 소리는 생략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용병길드라. 마침 잘됐네. 이참에 그쪽은 분위기가 어떤지 좀 알아봐야겠어.’
순례행을 돌며 의무적으로 교구의 임무를 받고는 있지만, 경험치를 올릴 기회가 더 있다면 용병들의 일에 끼어들어볼 의향이 있다.
용병들과 어울리는 건 명예롭지 못하다고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지만 사냥으로 인한 경험치가 목적인 알렉스에게, 용병들의 생활은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놀 소탕이라는 임무와 용병들에 대한 호기심을 품에 안고, 알렉스는 신전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