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75화
남부산맥(2)
대륙 남부 지역은 평지가 대부분인 서부와 달리 산이 많고 지세가 험해, 기본적으로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도시를 약간만 벗어나도 몬스터들의 영역이 근방에 분포되어 있어, 길을 조금 잘못 들었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그나마 일반적인 몬스터들은 활동구역이 거의 고정되어 있어, 각자의 영역과 영역이 맞물리는 곳에 놓인 길을 따라가면 큰 횡액은 모면할 수 있는 편.
다만 안전이 확보된 도로로 이동한다고 해도, 운이 없으면 무리에서 쫓겨나 떠도는 몬스터나 활동구역이 제멋대로인 소수의 몬스터들을 만나는 상황이 간혹 있었다.
알렉스 일행의 경우는 후자에 속했다.
삐이이익!
높은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알렉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생물이 덮쳐왔다.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합쳐놓은 듯한 생김새.
그리폰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몬스터였다.
비행형 몬스터 중에선 꽤나 상위권의 포식자에 속하는 놈으로, 익룡의 형상을 한 와이번과 더불어 창공의 지배자라는 자리를 두고 다투는 강력한 몬스터이기도 했다.
‘이런!?’
주변을 경계하며 움직이긴 했지만, 하늘까지 세심하게 살폈던 것은 아니기에, 놈이 지척까지 접근하고 나서야 습격을 감지할 수 있었다.
큼지막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순식간에 다가오는 모습에, 알렉스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방패를 들어 머리를 가렸다.
방패를 멀리 두지 않고 들고 있어서 다행이다.
기존의 무장이 박살 난 탓에 바이로크에서 대강 비슷한 방패를 구매했었는데, 아직 사용감이 어색해 손에 익숙해지고자 식사 도중에도 팔에 달고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음?’
굳건한 태세를 사용하며 충돌에 대비했으나, 어째 기다리던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흐히힝!
쿵!
그 대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아차!’
그리폰이 강하하는 비행경로에 그가 지나가고 있어 오해했지만, 애초에 놈이 노린 것은 알렉스가 아니라 일행의 말이었다.
그리폰은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가리는 것 없이 전부 잡아먹는 난폭한 몬스터지만, 특히나 말고기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드는 식성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안 돼! 킹!’
다급히 몸을 돌려 말들에게 달려가려던 알렉스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폰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몸을 처박고 뒹구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몸통으로 움푹 들어간 동그란 자국 두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설마 말을 덮치다가 뒷발질에 채여 나가떨어진 거야?’
이사벨의 말 로자리아는 강력한 포식자의 등장에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아 있으니, 저건 분명 자신의 애마인 킹이 이뤄낸 쾌거이리라.
프르륵!
알렉스의 그런 생각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킹은 콧김을 푸욱 내뿜고는 매어둔 줄을 끊고 그리폰을 향해 달려들었다.
“억! 야 임마! 멈춰!”
아무리 심상치 않은 힘을 몸에 품으며 체질이 변했다고 하지만, 말이라는 근본적인 종의 한계라는 게 있다.
절대적인 천적관계를 무시하고 그리폰에게 달려드는 킹의 모습에, 알렉스는 당황해서 큰 소리로 기함을 질렀다.
피에에엑!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그리폰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킹을 바라보곤, 날개를 활짝 펼치며 부리를 크게 벌려 괴성을 내뿜었다.
히히힝!
하지만 킹은 전혀 겁먹지 않고 투지로 가득한 울음을 터뜨리며, 질주에 담긴 힘을 고스란히 머리에 실어 그리폰을 들이받았다.
“허어?”
킹은 전마답게 기본적으로 강대한 기골을 갖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이란 종 전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
사자의 몸통을 닮은 대형 몬스터인 그리폰은 날개를 제외한 크기만 비교해도, 체격과 무게가 전마의 배 이상 되는 괴물이다.
체급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않으니, 몸으로 부딪혀봤자 밀려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한데 그런 상식적인 계산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킹의 몸통박치기에 당한 그리폰은 비명을 내지르며 대여섯 걸음 정도를 주르륵 밀려났다.
‘……지치지 않는 체력만 생긴 게 아니었구나.’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그리폰을 저렇게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니, 근력 또한 범상치 않은 수준으로 변한 모양이다.
킹의 싸움은 그리폰을 머리로 들이받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린 킹이 그리폰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누런 황금빛 갈기 털이 무성하게 자라 있던 목 주변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젖어 들었다.
알렉스는 또 한 번 대경실색했다.
‘그걸 물어서 공격한다고? 미친…… 설마 저러다 이기는 거 아닌가?’
그리폰의 가죽은 굉장히 질겨 창칼이 쉬이 박히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얼마나 치악력이 강하기에 저리 핏물이 콸콸 흘러내리는지 모르겠다.
삐이이엣!
일개 말 따위에게 연달아 공격을 당한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리폰이, 피를 보자 강한 살기를 분출하며 킹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맹수는 부상을 입었을 때 가장 사나워지는 법이고, 몬스터는 그리폰은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맹수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녀석이다.
발톱 하나하나가 커다란 나이프나 다름없는 그리폰의 앞발질에, 킹의 가슴 주변이 난자당하며 상체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이런!”
너무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넋 놓고 구경하고 말았다.
알렉스는 늦게 개입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자루를 쥐어 들었다.
칼날이 달려 있지 않은 손잡이뿐인 무기.
모르는 이가 봤다면 지인의 유품이거나 무언가 의미가 담긴 장식물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폰의 옆구리 쪽을 향해 달려든 알렉스가, 알페리온에 마스터 레벨의 홀리 웨폰을 부여했다.
지잉.
가벼운 진동이 손안에서 울리며 기분 좋은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성검 알페리온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 말한테서 떨어져라! 이 새대가리야!”
빛줄기로 이루어진 칼날.
알페리온의 라이트세이버가, 그리폰의 날갯죽지를 파고들었다.
그리폰이 제법 강력한 몬스터긴 하지만, 여기 있는 자신과 이사벨의 전력이라면 놈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걱정되는 점이라면 날 수 있는 녀석이 손에 닿지 않는 하늘로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정도.
그렇기에 공격은 자연히 날개부위에 쏠리게 되었다.
끼에에엑!
한 번의 베기에 꽤 깊은 상처를 입은 그리폰이, 비명을 터뜨리며 황급히 뛰어올라 알렉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크! 손맛이 상당한걸? 역시 레벨빨은 깡패고 템빨은 진리이지.’
알페리온이 가진 병기로서의 성능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주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어느 영화 속의 기사들이 쓰는 광선검 같은 절삭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존에 쓰던 평범한 철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명검이다.
‘언젠가 모든 기능을 개방한 후에는,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가치를 지니게 될 테고 말이지.’
유일한 단점이라면 홀리 웨폰의 신성력 사용량과 별도로, 빛의 칼날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로 소모되는 신성력이 꽤 들어간다는 정도.
그렇지만 그쯤이야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알렉스는 그리폰을 향해 검을 겨누고, 곁눈질로 킹의 상태를 살폈다.
분명 상처가 꽤 깊었던 것 같은데 벌써부터 출혈이 거의 멎어가고 있었다.
‘체력과 근력뿐 아니라 재생력까지 갖춘 건가. 역시 육신의 성질이 완전히 괴물처럼 변해 버렸구나.’
저만한 재생력이면 그 방면으로 유명한 몬스터인 트롤과도 비견될 수준이다.
킹을 아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 살짝 두려움이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면 혹시 킹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괴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옅은 의혹이 마음 한편에 스며든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한 짐승이여!”
‘끄응. 이럴 때가 아니지. 잡생각은 나중에 하자.’
자신과 다른 방향에서 그리폰에게 달려드는 이사벨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냥에 집중했다.
이사벨이 폴액스를 가로로 크게 휘둘러 앞다리를 공격하려 하자, 그리폰은 폴짝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내며 그대로 이사벨을 덮쳤다.
노련한 그리폰이라면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사냥감을 몰아가겠지만, 녀석은 그리 경험이 많은 놈이 아니었는지 갈퀴손을 이용한 단조로운 공격만을 거듭 가해왔다.
“이야압-!”
부아아앙!
헛손질을 한 이사벨이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초인적이란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강대한 근력이 빗나간 폴액스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재차 연격을 가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자신이 덮치는 속도보다 빠르게 되돌아와 휘둘러지는 폴액스의 날을 마주하며, 그리폰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원심력이 더해지며 처음보다 더 강해진 참격이 그리폰의 목에 틀어박혔다.
하필 맞은 곳이 킹이 물어뜯은 상처와 같은 부위라, 위력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되었다.
노렸다기보다는 운이 제법 따라준 결과지만 어쨌거나 효과는 굉장했다.
핏줄기를 내뿜으며 비명을 내지른 그리폰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달아나기 위해 땅을 박차고 날갯짓을 했다.
히히힝!
그러나 허공으로 완전히 몸을 띄우기 전에 재차 달려든 킹과 충돌하며, 그리폰은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퍼덕거리며 시간을 지체했다.
서걱.
그런 그리폰의 뒤로 접근해 뛰어오른 알렉스가, 머리 위로 성검을 높이 들어 녀석의 날갯죽지를 베어냈다.
정확히 날개에 힘을 전달하는 근육을 가른 덕분에, 놈은 탈출에 실패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날개 한쪽을 쓰지 못하게 된 그리폰은 여전히 사납고 강인했지만, 알렉스와 이사벨의 합공을 견뎌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킹의 조력도 꽤 도움이 되었기에, 신명 나게 두들겨 맞던 녀석은 결국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목숨이 다했다.
‘오. 경험치가 짭짤한 놈이군.’
레벨이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험치 바가 상당한 길이까지 늘어나는 것을 본 알렉스는, 만족스러움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꽈드득.
“윽!?”
방어 본능의 자동 가드가 발동하며 앞을 가린 방패가, 무언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냈다.
크르륵.
온몸에 힘줄이 과도하게 올라온 킹의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핏발이 선 눈으로 잔뜩 흥분한 채 방패를 물고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는 킹을 보며, 알렉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 이 자식이?”
입안이 찢어지고 피가 튀도록 방패를 물어뜯던 킹은 알렉스의 가드가 뚫릴 것처럼 보이질 않자, 방패를 놓고 콧김을 뿜으며 머리로 들이받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망할! 완전히 이성을 잃은 건가? 결국 성유물로도 이 녀석이 괴물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거야?’
입술을 잘근 깨물며 킹의 박치기를 받아낸 알렉스는, 방패에 홀리 웨폰을 부여하며 녀석의 머리를 향해 실드 차지를 날렸다.
뻐억!
고개가 휙 돌아간 킹이 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안타깝지만 주인도 몰라보고 덤벼드는 녀석을 데리고 다닐 순 없어. 그렇지 않아도 괴물 같은 몸으로 변한 이 녀석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분명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될 거다.’
정이 든 놈이라고 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결연한 감정과 함께 알렉스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서린다.
알렉스가 알페리온을 강하게 움켜쥐고, 킹을 베어내기 위한 결심을 마친 그때.
킹의 안장 앞에서 보는 이의 정신을 맑게 만드는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꽤 농도 짙은 신성력이 킹의 전신을 감쌌다.
‘……베로드의 눈물?’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성유물의 힘이 발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푸르륵?
킹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 내가 신성력을 담아 후려친 것에 성유물이 반응한 건가?’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킹을 보며, 알렉스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가 이내 검을 집어넣었다.
방금과 같이 계속 미쳐 날뛴다면 어쩔 수 없이 킹을 베었겠지만, 아직까지는 녀석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니 조금만 더 두고 보기로 마음먹은 것.
“알렉스 경? 방금 그건 무슨?”
“아. 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던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와, 알렉스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 고민하며 몸을 돌렸다.
“성유물의 성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킹이 난폭하게 굴어 매우 당황했습니다. 강한 힘의 대가로 부작용이 발생한 걸까요?”
“엇?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사벨은 킹이 흥분하여 날뛴 것이, 미물의 몸으로 성유물의 힘을 받아들인 탓에 생긴 부작용이라 지레짐작했다.
마침 이사벨이 알아서 좋은 변명거리를 찾아주었기에, 알렉스는 재빨리 수긍하며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저도 걱정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신께서 내린 시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킹이 꼭 부작용을 극복하고 오래도록 알렉스 경을 보필했으면 좋겠군요.”
“흐음. 예.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위태로울 뻔했던 킹과의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킹에 대한 불안을 잠시 내려놓고, 알렉스는 그리폰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