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72화
지하유적(5)
“피해요!”
“으읏!?”
알렉스는 이사벨을 뒤에서 끌어안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방패로 버텨낼 수 있는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피할 수 있다면 막는 것보단 피하는 게 나았다.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바위 주먹이 철문에 틀어박혔다.
혹시나 저 충격으로 길이 뚫리진 않을까 기대하며 쳐다봤지만, 철판은 심하게 찌그러지긴 했어도 여전히 출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채였다.
‘염병할. 저렇게 구겨지면 제대로 열리기나 하려나? 그렇다고 때려서 부수려면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테고.’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알렉스를 향해, 다리에 이어 팔까지 짧아진 스톤골렘이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알렉스 경! 어떻게 하실 겁니까?”
“끄응. 잠시 피해 다니며 상황을 봅시다.”
무작정 싸우는 건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알렉스가 스톤골렘을 피해 거리를 벌리자 이사벨 역시 폴액스를 주워들고 뒤를 따른다.
‘저 펀치는 일회용인가? 만약 재사용이 가능하다면…….’
스톤골렘이 저 발사된 주먹을 회수하여 다시 활용할 수 있다면, 그걸 이용해서 문을 부수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녀석은 날려 보낸 주먹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짤막해진 팔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두 사람을 쫓아왔다.
부서진 다리처럼 몸체에서 분리된 부위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속도가 느려져서 아까처럼 붙어 싸워도 위험하진 않을 것 같군요.”
“리치도 짧아졌으니 공격을 피하며 때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앗! 방패의 상태가…… 방어가 어려우시다면 저 혼자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한두 번 정도는 어떻게 될 겁니다. 최대한 회피에 주력하며 저도 시선을 끌어보도록 하죠.”
스톤골렘을 피해 다니며 녀석의 움직임을 관찰하니, 사지 전부가 짧아진 탓에 동작 자체가 많이 어설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정도라면 전투능력 역시 상당히 떨어졌을 터.
어차피 싸움을 피하고 싶어도 이제는 놈을 해치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기에, 두 사람은 결국 스톤골렘과 끝장을 보기로 결정했다.
‘칼질은 어차피 해봐야 박히지도 않고.’
방어력이 어마어마한 놈이라 자신이 손상을 입힐 방법은 없었지만, 이사벨에게 모든 걸 맡겨두고 구경만 할 수는 없기에 스톤골렘의 주변을 돌며 헛손질을 유도했다.
“이야압!”
알렉스가 틈을 만들면 이사벨이 공격을 하는 지금까지와 동일한 전법이지만, 가드대신 회피를 하기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
커다란 주먹이 떨어지며 그만큼 타격 범위가 줄어든 탓에, 공격을 보고 반응해서 피할 수 있으니 상당히 쉬워진 싸움이었다.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겠습니다!”
“신성력이 부족하진 않겠습니까?”
“제법 줄긴 했지만 충분할 것 같습니다. 모자라겠다 싶으면 그때부터 적당히 템포를 조절하면 되겠지요.”
이사벨의 공격능력만 유지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른 성법은 거의 못쓴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 자신의 주특기만은 굉장히 능숙하게 다루는 이사벨.
성법의 신성력 소모 효율도 아주 뛰어난 모양인지, 힘이 다해 지치는 상황은 오진 않을 것으로 보였다.
단단한 스톤골렘의 몸체를 조금씩 깎아내는 단순한 작업이 오래 이어졌다.
사실상 전투라기보단 노동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당 부분이 손상된 몸통의 한 곳에서, 돌 재질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벨 경!”
“봤습니다! 저쪽에 있었군요!”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그것은, 분명 골렘의 심장부인 코어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코어만 파괴하면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이사벨이 반색하며 스톤골렘에게 재차 달려들려는 가운데, 녀석은 바닥에 몸을 엎드리며 바짝 웅크렸다.
“이 자식. 코어를 보호하겠다고 이러는 건가?”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위치를 확인했으니, 반대편에서 파고들어 가면 그만입니다.”
이사벨의 말대로 약점이 어딘지 발견했으니, 스톤골렘이 아무리 몸을 말고 있어 봐야 처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동력기관 노출. 급속복구 명령 수행.>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녀석에게서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 복구?”
싸한 느낌에 멈칫하며 보고 있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방 안에서 갑자기 공기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스톤골렘을 중심으로 무언가 다량의 기운이 밀집되는 것이 느껴진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마력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기운일 것이 분명했다.
마치 청소기가 빨아들이는 것처럼, 여기저기 부서져 떨어져 나왔던 암석파편들이 스톤골렘을 향해 움직였다.
찌그러진 철문 주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두 개의 주먹도, 슬금슬금 본체가 있는 곳으로 굴러온다.
‘이런 시발! 사기 치지 마!’
설마 여기까지 와서 스톤골렘이 다시 원상복구가 된다면, 더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다시 처음부터 전투를 벌인다면 결과가 패배일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이사벨이 엎드려 있는 스톤골렘의 몸을 다급히 내리쳤다.
알렉스 역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검을 뽑아 녀석의 몸체를 후려친다.
‘아냐. 이래 봐야 소용없다.’
스톤골렘의 몸체가 복구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그전에 코어를 파괴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 시간에 어떻게든 문을 열고 도망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선다.
“이사벨 경! 지금 빠져나갑시다!”
“앗! 알겠습니다.”
출입구를 향해 달려간 이사벨이 철문을 붙잡고 힘을 썼다.
“으윽!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장의 수납부가 기존의 철문에 딱 맞춰져 있던 탓에, 찌그러진 철문은 아까와 달리 발목 높이에서 걸려 움직이질 않았다.
기어서라도 나갈 틈이 있으면 어떻게든 빠져나가겠지만, 그럴만한 공간도 나오지 않았다.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알렉스가 곧바로 철판 앞에 드러누워, 복부 위로 방패를 가져다 댔다.
“알렉스 경?”
“창을 방패 위로 지나가게 밀어 넣고 자루 끝을 눌러요!”
지렛대의 원리를 써보고자 함이었다.
받침으로 쓸 만한 단단한 물건이 없으니 자신이 몸을 대줘야 했다.
‘우리가 지나갈 틈만 생기면 된다.’
맨손으로는 힘이 부족하더라도 이렇게 한다면 철문을 조금이라도 더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어서!”
“네, 넷!”
이사벨은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면서도, 알렉스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흡!’
알렉스는 배에 힘을 꽉 주고 방패 위로 전해지는 묵직한 압력을 견뎌냈다.
끄그그긋!
그렇지 않아도 내구도가 간당간당한 방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불길한 소리를 냈지만, 효과는 확실히 있었는지 철문 또한 벽면을 긁으며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들려집니다! 거의 다됐습니다!”
“좋아요! 좀 더 힘내 보십…… 이런!”
이사벨을 응원하던 알렉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썅! 저렇게 빨리 복구가 된다고?’
바닥에 누워 있던 알렉스는 쭉 스톤골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파편이 뭉쳐지며 최초의 으리으리한 동체를 되찾은 녀석이 막 몸을 일으키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으윽!?”
방패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나버렸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복부를 내리누르며 알렉스의 갑옷을 점점 찌그러트리자, 이사벨이 흠칫하며 자신의 무기에서 손을 놓는다.
‘망할…… 더는 운도 따라주지 않는 건가.’
알렉스와 이사벨의 시선이 완전히 부활한 스톤골렘에게로 향했다.
혹시라도 주먹을 다시 날리면 그걸 이용해 철문의 파괴를 시도하기라도 할 텐데, 스톤골렘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쿵쿵거리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이이익!”
이사벨이 다시 내려간 철문에 달라붙으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끝인가 싶었던 알렉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맨손으로 발목 높이 이상 들리지 않았었으나, 한번 밀어 넣었던 부분이 펴지기라도 한 건지 지금은 다시 걸리지 않고 조금 더 철문이 올라가졌다.
간신히 사람이 기어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겨났다.
“알레엣, 스읏, 겨엉! 지나그윽! 세요!”
“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엎드리려던 알렉스는, 이내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신이 먼저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이사벨은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조금 전에는 이사벨이 틈을 만들면 자신이 철문에 몸을 밀어 넣어 받침이 되고, 그녀가 먼저 지나가 다시 반대편에서 들어 올려주는 동안 빠져나가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방패가 박살 난 지금은 더 이상 알렉스가 철문을 받칠 수단이 없었다.
‘방패 없이는 굳건한 태세 스킬이 제 효과를 내지 못해. 잠깐도 버티지 못하고 철문에 깔리는 순간 내 몸도 뭉개지겠지.’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자신과 이사벨 둘 모두가 이 방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가세요! 빨리이잇!”
계속 힘을 주느라 붉게 달아오른 이사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눈물이 방울져 있는 촉촉한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짧은 눈빛 교환뿐으로, 이사벨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둘 다 살아나갈 길은 없다는 걸 알고, 알렉스만이라도 빠져나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희생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앗!”
이사벨의 말이 맞다.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건 어차피 그녀 하나뿐이다.
같이 죽거나 알렉스 혼자라도 살거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쿵! 쿵!
지척까지 다가온 스톤골렘의 발소리가, 빨리 선택을 정할 것을 강요했다.
“……미안합니다. 이사벨 경.”
사과의 말을 내뱉으며 자세를 낮추는 알렉스의 모습에, 이사벨은 괜찮다는 듯이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스톤골렘이 못을 때리는 망치처럼, 거대한 주먹을 들어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콰앙!
“알렉스 경!?”
이사벨은 자신을 붙잡고 바닥을 구르는 알렉스를 보며, 새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째서! 왜 나가지 않은 겁니까!”
“제가 몸을 숙인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아, 이게 안 먹히네. 아무튼,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너무 뭐라고 하진 맙시다.”
“이익! 멍청이! 바보야! 살 수 있었는데 같이 죽겠다는 겁니까!”
빠져나갈 기회를 포기한 알렉스를 향해, 이사벨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악을 질렀다.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네. 이사벨 경과 함께 살아나가지 못할 거면, 그냥 같이 죽는 게 낫습니다.”
“으읏!?”
태연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이사벨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검을 뽑아 스톤골렘을 향해 겨누었다.
어차피 통하지 않는 건 알지만, 죽기 전의 마지막 발악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검이 부러지면 주먹이라도 휘두르다 죽을 것이다.
‘흐흐, 존나 쫄리네.’
검 끝이 바르르 떨린다.
여기서 삶이 끝나는 것을 각오하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지는 건 또 아닌 모양이다.
사실 개지랄 말고 그냥 빠져나갔어야 했다는 후회의 목소리가, 지금도 마음 한편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뭐, 시발. 원래 허세부리다 뒈지는 게 다리 세 개 달린 것들의 특성인데, 이제 와서 뭘 어쩔 거야?’
마음을 다잡으며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자니, 골렘이 주먹이 알렉스를 노리고 내질러졌다.
부앙!
방패가 없으니 한방이라도 직격을 허용하면 다시 일어나긴 힘들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해낸 알렉스가 스톤골렘의 품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카앙.
교범으로 써도 될 법한 깔끔한 베기였지만 맥 빠지는 소리만 울릴 뿐, 역시나 스톤골렘의 몸체를 파고들진 못했다.
깡. 카앙. 까각!
피하고 때리기를 반복하길 세 번.
제대로 된 유효타는 하나 없이, 계속해서 네 번째의 공방이 이어졌다.
콰직!
“크윽!”
이번에는 완전히 피해내지 못하고 옆구리를 스치는 바람에, 알렉스는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살짝 스쳤을 뿐이지만 어찌나 위력이 강맹했는지, 갑옷이 버티지 못하고 일부분이 박살 나며 떨어져 나갔다.
갑옷이 그 꼴이 났는데 안의 내용물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파편과 함께 옆구리의 살점 일부가 같이 뜯기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끄으…….”
“알렉스 겨엉-!”
흘리고 온 무기를 향해 뛰어가 막 그것을 챙겨 들던 이사벨이, 알렉스가 나가떨어지는 광경에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그러나 떨어져 있는 이사벨보다는 당연히 스톤골렘의 다음 동작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알렉스의 머리 위에서, 스톤골렘이 커다란 발을 들어 올렸다.
‘흐, 흐흐. 그래도 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칼질 몇 번 하고 바로 끝인가.’
알렉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절망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발이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은 끝을 맞이하게 된다.
아마도 케첩통이 밟힌 것처럼 짜부라지며, 붉은 액체를 찍! 하고 내뿜게 되겠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알렉스의 머릿속으로, 마지막에 대한 생각이 가득 채워지던 순간.
쿠웅!
‘……응?’
벌새의 날갯짓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던 알렉스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서렸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던 스톤골렘이, 갑자기 뒤로 넘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