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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67화 (67/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67화

위장순례

‘역시 괜히 더 나대지 않길 잘했네.’

위에서부터 내려온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스는,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교황청에선 사도의 출현을 부정했다.

로안티카 대교구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논란은 순식간에 잠재워졌다.

교황청의 공표란 교인들에게 있어 곧 신의 말씀과 동일하기에.

알렉스의 서임식에서 일어난 현상은 그저 몇 가지 우연이 겹쳐 벌어진 일 정도로 치부되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괜히 신의 계시를 받았네 하며 일을 키우고 다녔었다면 수습하지도 못하고 큰 곤경에 빠졌을 뻔했다.

“그러면, 저도 이제 슬슬 다른 분들과 함께 임무에 투입될 수 있겠군요?”

“흠.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문제가 있긴 하다네.”

“음? 문제라니요?”

단장 프리츠와 독대 중이던 알렉스는, 또 뭔가가 남았다는 그의 말에 눈빛으로 의문을 표했다.

“사도가 탄생한 것은 아니라고 공표했지만, 교황청에선 경에게 꽤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더군. 자네를 그쪽으로 파견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었네.”

“파견? 교황청으로 말입니까? 저를 왜?”

“나야 직접 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어쨌든 자네의 서임식에서 독특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자네를 직접 보고 가치를 판별하고자 함이겠지.”

그렇게 말하는 프리츠의 표정에 살짝 불쾌한 기색이 서린다.

명확한 이유나 기간도 명시되지 않은 타 관구로의 파견 요청.

이유는 볼 것도 없이 뻔했다.

알렉스가 쓸 만한 인재면 앞으로는 자신들이 관리할 테니, 꿀꺽할 수 있게 입 앞으로 가져다 놓으란 소리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빼간다고요? 교황청이면 그럴 권한도 있는 겁니까?”

“엄연히 관구가 다른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지시가 아닌 요청이라고 말하는 걸세.”

교황이 기거하는 장소이기에 교황청이라는 이름을 내걸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교황청은 중앙 관구를 대표하는 대교구일 뿐이다.

중앙 관구에서야 가장 높은 기관이지만, 다른 관구의 인사에까지 간섭할 권한을 가지고 있진 않다.

물론 교황이 직접 명령을 내린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교단의 최고 권위자가 그런 자잘한 행정업무 하나하나에 관여하는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사람 하나 파견 보내달라는 게 겉보기엔 과한 요청도 아니니 말일세.”

중앙과 지방의 위세에 큰 차이가 있다 보니 권한이 나뉘어 있다 해도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라 할 수가 없어, 교황청에서 누구 하나를 콕 집어서 잠깐 보내달라고 말하면 어디의 신전이든지 따르지 않을 수가 없긴 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인재가 그쪽의 영입제안에 넘어가 소속구를 옮기겠다고 말하면, 그 후에는 더 손쓸 방법도 없는 것이지.”

“기껏 팔라딘을 양성한 교구에선 힘이 줄어들어 아쉽겠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보내주는 수밖에 없긴 하겠네요.”

“더 좋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개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니, 섭섭해도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일이긴 하다네.”

“음. 그런데 저한테 이리 적나라하게 다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알렉스의 말에 옅은 한숨을 내쉰 프리츠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숨긴다고 무마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자네도 교황청 직속 팔라딘의 자리에 욕심이 없진 않겠지. 언제쯤 출발하겠나?”

“아뇨. 저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습니다만.”

“으음?”

“교황청 직속이라, 듣기는 좋지만 별로 관심이 없어서 말이죠.”

명예? 있어서 나쁠 건 없지만, 굳이 매달리고 싶진 않다.

게다가 지원의 규모가 달라진다고 해봐야, 쓸 곳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신이 장비에 욕심을 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레벨로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사용함으로, 자신은 남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경험치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찾아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지.’

그러기 위해선 중앙 관구보단 상대적으로 치안 수준이 떨어지는 지방 쪽에서 활동하는 편이 훨씬 낫다.

중앙 대륙이라고 몬스터나 암흑교도 등의 적이 없진 않겠지만, 지방에 비하면 수가 적거나 훨씬 은밀하게 숨어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 분명할 터.

특히나 다른 곳도 아니고 교황청 직속의 팔라딘이라면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기보단, 교내 고위직 요원의 호위에 동원되어 의전이나 따라다니는 일상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는 백날이 지나봐야 성장할 기회가 없다.

“저는 지금 이대로 글라즈번 소속인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파견은 됐고, 적당히 힘쓸 일 있는 임무에나 투입시켜 주시지요. 몬스터 퇴치 같은 종류면 딱 좋겠습니다만.”

알렉스의 대답에 프리츠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허어, 자네가 우리 교구에 그리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 솔직히 교황청에서 지목한 사람이 나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갈 자신이 있네만.”

그건 너무 솔직한데?

단장이면서 이런 소리를 해도 되는 건가.

“자네 생각이 그렇다니 고맙긴 한데, 조금 난감하긴 하군.”

“뭐가 또 문제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상대의 의도가 어쨌든 파견 요청 자체를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가 않다네. ‘본인이 가기 싫다고 함’이라고 적어 보내기는 곤란하지 않은가?”

“……뭐 너무 성의 없어 보이기는 하네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가 싫어도 파견은 다녀와야 하는 겁니까?”

서임식 때문에 관구 본당에 다녀온 것도 귀찮았는데, 이번에는 교황청까지 가야 한다는 소리인가 싶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물론 로안티카에선 성검을 공짜로 주워올 수 있어서 큰 이득이긴 했다만.’

교황청에서도 그런 행운이 따라줄 리는 없으니, 가봐야 늙다리 고위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숨만 막히지 않을까 싶다.

혹시나 교황을 마주하기라도 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살짝 겁이 나기도 하고 말이다.

알렉스가 온몸으로 가기 싫다는 표현을 드러내자,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프리츠가 이내 답을 내어놓았다.

“조금 억지를 부리면 그쪽의 요청을 피할 수 있을 것도 같군.”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남서 관구의 전통에는 초임 팔라딘의 순례행이 있지 않은가?”

“아?”

물론 모를 리가 없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힘이 미약했었던 자신이, 이사벨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니까.

마침 순례행을 돌던 이사벨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루미넌 백작가에서 언데드화 된 기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었다.

“본래 순례행은 바깥 생활을 겪어본 일이 적은 초임 팔라딘들에게, 임무를 맡기기 전에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

이름은 거창하지만 순례행은 단순히 사회체험을 하기 위한 여행에 불과하다.

어린 나이에 신전에 틀어박혀 평균적으로 십몇 년씩 걸리는 팔라딘 육성 과정을 거치고 세상에 나오게 되면, 자연히 외부에서의 임무 수행능력에 미진한 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길을 헤매느라 임무를 제시간에 처리하지 못한다거나, 융통성이 부족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놓친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그렇기에 다른 교구들을 쭉 돌아다니며 지리와 여정에 관한 감을 쌓고, 가벼운 부탁들을 처리함으로써 어떻게 주민들과 관계를 갖고 일머리를 풀어나가야 할지를 경험해 보게 하는 것이다.

“다만 자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지.”

“저는 원래부터 외부 출신이니 말입니까?”

“교리나 예법에 대해선 부족할지언정, 자네의 임무 수행능력에 대해선 더 증명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해서 순례행은 생략하고 자네 말처럼 적당한 임무에 바로 투입시킬 생각이었네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눈속임을 위한 틀을 씌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군.”

프리츠의 설명을 쭉 경청한 알렉스는 일리가 있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관할구역 내의 임무를 한번 나가게 되면,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기까지 짧으면 한 주에서 길면 한 달 정도가 걸리는 편.

하지만 순례행이라면 최소로 잡아도 반년은 돌아다녀야 하는 긴 여정이 된다.

중앙에서 ‘왜 교황청으로 파견 요청했는데 안 보내?’ 하고 따져도, ‘그 친구 아직 순례행에서 복귀 안 했는데? 우리 쪽 관례 무시하고 데려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 맞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

거기에 프리츠는 순례행에 들리는 다른 교구들과 연락을 통해, 자잘한 부탁이 아닌 진짜배기 임무들을 대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중앙 관구의 개입으로 남서부에서 발생한 커다란 소동들은 거의 다 진압되었지만, 손을 빌려준다면 기꺼워할 교구들이 아직 많이 있을 걸세.”

핑계를 대기 위해 순례행의 프레임만 씌워두고, 사실상 다른 교구들로 파견 임무를 연속해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따로 휴식 없이 계속 임무를 돌아야 한다는 문제는 있겠지만, 어차피 자네는 신전 내의 생활은 그리 반기지 않는 것 같으니 상관없지 않겠나?”

“하하…… 잘 아시네요. 바깥을 돌아다니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어차피 교구 한곳에 머무르는 것보단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편이, 레벨을 올릴 기회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원치 않는 호출에 불려가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되기에, 알렉스는 프리츠의 제안에 따라 순례행의 간판을 단 장기 임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 * *

“그럼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알렉스 경.”

‘어라?’

알렉스는 방긋거리며 옆으로 따라붙는 이사벨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례행은 본디 초임 팔라딘이 혼자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게 하는 행사였지만, 알렉스의 경우는 대외적인 핑계로 순례행을 들먹일 뿐이지 사실상 장기 임무를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

그리고 팔라딘들의 임무는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조를 편성해서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렇게 함께 떠날 파트너가 또 이사벨로 배정될 줄은 몰랐다.

“저와 이사벨 경의 인연이 꽤 질긴 모양입니다.”

“혹시 저라서 불만이십니까?”

“아뇨! 그럴 리가.”

우락부락한 다른 아저씨들보다야 이사벨 쪽이 백만 배는 좋다.

다만 묘하게 계속 이사벨과 세트로 엮이는 것 같아 의아하긴 했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다른 분들은 이렇게까지 장기적인 임무는 그리 내켜 하지 않으시더군요.”

“이사벨 경은 괜찮은 겁니까?”

“저는 아직 임무의 수행 횟수 자체가 적은 편이라, 경험을 많이 쌓으려면 종류를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최소 반년은 외부를 돌아다녀야 하는 장기 임무이고 따로 적임자의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교구에 남아있는 팔라딘들에게 의사를 묻고 지원자를 받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다른 교구를 돌아다니며 장기적인 임무에 투입되길 원하는 팔라딘은 매우 드물었다.

결국, 이제 막 1년 차에서 벗어나 어떤 임무든지 의욕적으로 맡고 싶어 하는 이사벨이, 알렉스의 파트너로 배정되게 된 것이었다.

‘사실 혼자서 움직이는 쪽이 더 편하기는 한데, 동행이 붙는다면 다른 사람보다야 이사벨이 낫긴 하지.’

글라즈번 교구에서 이사벨의 실력은 수준급에 속하는 편이다.

‘공격에 몰빵해서 유틸성이 부족한 캐릭터라는 느낌은 있긴 하지만.’

그런 아쉬운 부분이야 어차피 다른 팔라딘이라고 완벽하진 않으니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명확한 장점이 있었다.

일단 팔라딘 중에서 가장 친분이 두텁고, 곁에 있으면 눈이 즐거워진다.

장기 임무로 올 한 해를 쭉 같이 다니게 될 파트너가 칙칙한 남성인 것보다야, 당연히 예쁘장한 여성인 편이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함께 해서 기쁘네요. 저 역시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알렉스의 환영을 받은 이사벨의 입가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생각해 보면 제 순례행은 알렉스 경을 만나기 전까진 밋밋함 그 자체였지요. 경과 함께라면 이번에도 뭐랄까…… 특별하고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듭니다.”

“그거 어째 별로 좋은 기대는 아닌 것 같군요.”

꼭 무슨 사건을 몰고 다니는 인물인 것처럼 말하다니.

출발 전부터 저런 소리를 들으니, 괜히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한 여정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설마 말이 씨가 되진 않겠지.’

고개를 들이미는 찝찝함을 억누르고, 알렉스는 킹의 안장 위로 올라탔다.

이제부터 남서부 전역의 교구들을 무대로 삼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

입맛에 맞는 임무들을 골라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알렉스는 힘세고 앙증맞은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글라즈번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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