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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66화 (66/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66화

무너진 벽.

박살 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판자 조각.

바닥에 쓰러져 바들거리고 있는 말들.

맹수의 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는 마사 안의 광경에, 알렉스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굳어졌다.

푸히힝?

현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사건을 일으킨 주범이, 알렉스를 돌아보고는 ‘왔어?’ 하는 눈빛을 보내며 반갑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뭔 푸히힝 이 지랄은, 이놈의 말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코피를 줄줄 흘리며 경련하는 말.

다리가 부러져 구슬프게 울고 있는 말.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다쳐서 쓰러져 있는 말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알렉스가 뻣뻣해져 오는 뒷목을 주무르고 있자니 마사의 관리인이 다가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저 미친- 아, 아니. 기사님의 말이 갑자기 날뛰며 벽과 기물들을 부수더니, 다른 칸에서 쉬고 있던 말들을 죄다 덮치고 말았지 뭡니까!”

“저 녀석이 갑자기 공격성을 드러냈단 겁니까? 이런…… 혹시 누구 다치신 분은 없습니까?”

“예? 아…… 뭐 그것도 공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 조금 다른 의미로 덮쳤다는 소리입니다만.”

“……?”

알렉스는 태연한 기색으로 건초를 우물거리고 있는 자신의 늙은 말을 다시 쳐다보았다.

튼튼한 근육으로 덮인 두 다리 사이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우람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에는 감춰져 있는 그곳이 저렇게 노출된 상태를 보니, 방금까지 열정적인 거사를 치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마수처럼 흉포해져 다른 녀석들을 공격한 게 아니라…… 발정이 났다는 거야?’

악마와 마수의 잡탕 같았던 괴물의 심장.

그리고 그 일부를 핥아먹은 말의 변화.

알렉스는 자신의 말을 보며 언제고 마수처럼 변이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그나마 최근까지 각별히 주시했음에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고, 동물에게만 영향을 준다는 성유물인 베로드의 눈물을 달아주며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한데 이 녀석이 뭔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리에, 가슴이 덜컹해서 달려왔더니만 이런 상황이라니.

“둘, 넷…… 여기 쓰러져 있는 여덟 마리 전부가, 저놈에게 그…… 당한 겁니까?”

“예. 제가 말과 함께 산 지가 30년도 넘었는데, 저렇게 정력이 대단한 놈은 처음 봅니다. 보통 교배기에도 관계가 많아야 하루에-”

“발견이 늦어서 통제하지 못하신 겁니까?”

굳이 자세히 알고 싶진 않은 이야기라 알렉스는 관리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소란이 벌어지자마자 막아보려고 올가미를 걸고 장대로 찔러 막아보기도 했지만, 어찌나 힘이 좋은지 죄다 끊고 부숴 버리는 통에…….”

“으음.”

녀석을 막아보려 했지만 더욱 흥분하여 날뛰는 바람에, 주변에 있는 것들이 이리 다 박살 나 난장판이 되었다는 소리.

주변을 둘러보던 알렉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저쪽에 있는 말들은 수컷들로 보이는데. 혹시 싸우다 다친 겁니까?”

“암놈 수놈 가리지 않고 전부 그…… 똑같이 당한 겁니다.”

오 이런 세상에?

어쩐지 저쪽에 쓰러져 있는 녀석들은 특히나 눈빛에 생기를 잃고 공허함만 가득해 보인다 싶더니.

알렉스는 기겁하여 자신의 말을 바라보았다.

흐히힝~

잇몸을 드러내며 씨익 웃는 녀석의 얼굴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대체 저 말은 뭡니까요?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품종에, 나이도 사람으로 치면 환갑은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으음, 정확히 그 말대로입니다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저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되살아난 이후로 아무리 달려도 지치는 않는 대단한 명마가 된 녀석이지만, 설마 그 넘치는 생명력을 이렇게 다른 말들에게 쏟아붓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성별까지 가리지 않고서 말이다.

“저게 알렉스 경의 말이라고?”

“과연…… 주인과 마찬가지로 비범하군.”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그런 거 아니야. 나랑 비교하지 마.

호위를 위해 뒤따르던 대교구의 팔라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알렉스는 얼굴에 열이 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변상을 어떻게…… 아니, 일단 치료를…….”

“다른 친구가 사제님들을 부르러 갔으니 곧 오실 겁니다. 죽거나 심하게 다친 말은 없으니 그나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사고를 쳤지만 다행히도 이곳이 신전 소속의 마사인지라, 별 탈은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위급 사제들이 지척에 널려 있으니, 숨만 붙어 있으면 어떤 부상이건 완치시킬 수 있을 터.

사고를 친 말의 주인이 대교구의 주목을 받고 있는 알렉스이기도 하니, 조금 눈치가 보이긴 하겠지만 깽값을 물어준다고 전전긍긍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로자리아! 아! 제 말은 무사한 것 같군요.”

알렉스의 곁에서 마사 안의 참상을 둘러보던 이사벨이, 그녀의 애마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구석 한편에서 두려움에 찬 기색으로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말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는 이사벨.

이사벨의 말 로자리아는 매력적인 흰색 털을 가진 아름다운 암말로, 분명 알렉스의 말과 가까운 곳에 있었을 텐데 소동에 휘말리진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사벨의 말은 괜찮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푸르륵! 히힝!

“뭐 임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환청이 들린 건지, 말의 울음소리가 마치 ‘파트너를 위해 선은 지켰으니 안심하라고!’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어째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환청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긴 한다.

잠시 기다렸다가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상황을 수습한 알렉스는, 늙은 말을 끌고 도망치듯 신전을 빠져나왔다.

“그 성유물, 몰랐는데 성능이 굉장한 물건이었나 봅니다.”

“예? 어떤……?”

방금 전의 사건 때문에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동하고 있자니, 이사벨이 알렉스를 향해 말을 건네 왔다.

“교구에서 받은 성유물 말입니다. 그 때문에 경의 말이 완전히 달라진 것 아닙니까? 분명 전에는 나이가 많은 탓에 쇠약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

정확히는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겐 성유물의 효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알렉스야 자신의 말이 마수로 변이하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억제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며 달아준 것이지만, 베로드의 눈물은 본래 전투마의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용도로 쓰는 성유물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거 성유물의 부작용일 수도 있으려나?’

오늘의 일은 괴물 심장을 섭취하며 왕성한 체력을 보유하게 된 말에게, 성유물의 힘까지 중첩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서임식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늙은 말도 계속 마구간에 처박혀 있었으니, 몸에 쌓여가는 에너지를 분출하고자 한 행동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추론을 하고 있자니, 이사벨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조금 의외였습니다. 말을 그리 아끼진 않으셨던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성유물을 고르실 줄은. 전에는 금방 다른 말로 교체할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음. 그러려고 했었는데. 정이 들어서 그런지 막상 은퇴시키려니 섭섭하더군요.”

“하하! 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로자리아가 나이를 먹어 기력이 떨어진대도, 쉬이 다른 말로 눈을 돌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며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던 이사벨이,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 경의 말은 이름이 뭡니까? 들어본 기억이 없군요.”

“어, 그게…….”

아직 말의 이름을 정하지 못했던 알렉스는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이 들어 더 함께하고자 성유물까지 투자한 것처럼 말해놓고, 이름도 없다고 하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알렉스는 머리를 굴려서 주제의 핀트를 살짝 조정하기로 했다.

“사실은 이놈의 이름을 새로 지어줄 생각인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앗! 그것참 괜찮은 생각입니다! 은퇴를 앞두고 있던 말이 신성한 힘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의미 있는 이름을 새로 붙여주고자 하시는 거군요!”

육체의 성질이 달라진 것은 성유물이 아니라 악마의 힘이 섞인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의 심장에 의한 거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알렉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좋은 이름이 있으면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말입니까? 으음…….”

이사벨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쇠한 겉모습과 달리 강력한 힘으로 다른 말들의 복종을 이끌어내니, 킹(King)이라 부르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오.”

아까 그 모습은 색마나 강간마라고 불려도 할 말 없을 것 같은데, 저리 거창하게 포장을 해주다니?

“너무 과분한 이름 같은데요.”

“사실 타이런트(Tyrant)를 먼저 떠올렸지만, 좀 더 점잖은 이름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바꿨습니다. 너무 이름을 따라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흐음.”

타이런트, 폭군이라. 그건 꽤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 녀석에겐 좀 더 미개하고 야만적인, 이를테면 바바리안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사벨의 말대로 소위 닉값한다 표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곤란하니, 가능하면 고상한 이름이 좋긴 할 것 같다.

‘나한테 작명 센스가 별로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심플한 게 편하기도 하니 이사벨의 말대로 킹이란 이름을 붙여줄까?’

어차피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도 없기에, 알렉스는 이사벨의 의견을 채용하기로 했다.

“말 중의 왕이라네~”

“네?”

어디서 들어 본 가사가 떠올라 작게 흥얼거리자, 이사벨이 묘한 표정이 되어 이쪽을 바라본다.

“아, 아닙니다. 그럼 킹으로 하지요. 이 녀석이 이름에 걸맞게 체통을 좀 지켜주면 좋겠네요.”

“후후! 제법 영리한 말 같은데, 잘 타이르면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행입니다만.”

프히히힝! 헤헤헹!

타이밍 맞게 걱정 말라는 듯이 울부짖는 녀석.

말이란 꽤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 나이를 이만큼 먹은 녀석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사람과의 소통이 가능하긴 하다.

‘그래도 너무 묘하게 말을 잘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는데.’

알렉스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사고를 치면…… 그땐 무장해제를 시키는 수가 있다.”

프륵!?

더는 휘두르지 못하도록 무기(?)를 제거하겠다고 협박하자, 킹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 녀석, 사람의 언어를 제법 이해하는 듯하다.

이것도 내용물이 변질된 탓일까?

어째 말의 탈을 쓴 사람 같은 느낌이다.

“자, 부지런히 갑시다.”

어쨌거나 큰 사고 없이 소동이 무마되었으니, 앞으로 더 이런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살짝 기가 죽은 킹의 목덜미를 두드려주고, 알렉스는 호위대로 따라붙은 팔라딘들을 이끌며 글라즈번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 * *

“후우, 알렉스 경. 서임을 받으라고 보냈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글라즈번 교구의 성기사단장 프리츠는, 머쓱하게 웃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뭘 어떻게 했기에 무려 사도의 명칭이 언급되는 건가? 관구장께서 단단히 이르더군. 자네의 신변을 엄중히 관리하라고 말일세.”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오해라. 그래, 그 오해 때문에 저렇게 호위까지 달고 온 건가.”

“뭐…… 분명 착오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도라는 이름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보니?”

“후우, 아무튼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이상하게 사건에 휘말리는 친구로군. 자네 말대로 사도의 이름이 가볍지 않으니, 이에 대해선 윗선에서 곧 따로 조치가 내려오겠지.”

당분간 관내에서 조용히 대기하라는 이야기에, 알렉스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프리츠의 말대로 며칠 지나지 않아, 글라즈번 교구로 하나의 연락이 걸려왔다.

교황청 직통의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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