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63화
로안티카 대교구
“알렉스 경. 이쪽입니다!”
“가고 있습니다.”
살짝 들뜬 기색으로 재촉하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말을 몰아 그녀의 뒤를 쫓았다.
관구 본당이 위치한 로안티카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대교구의 신전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제 일이 아님에도 떨리는군요. 대교구에서 관구장님께 서임을 받는다니!”
“이사벨 경은 이전에도 이곳에 온 적 있으시지 않습니까?”
“순례행 중에 방문한 적은 있습니다만, 그땐 추기경 예하를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시니 어쩔 수 없었지요.”
하긴 팔라딘이 아무리 귀한 전력이라 해도, 교단에서 겨우 두 명뿐인 추기경을 만나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각 나라의 왕족과 대귀족들을 상대하느라 바쁘신 몸이시니, 팔라딘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준다는 건 굉장히 특별한 경우이리라.
‘관구 본당은 보안도 철저할 테니, 적어도 이 안에서는 위험할 일이 없겠지?’
바로 얼마 전에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던 알렉스로서는, 안전한 장소에서 마음 편히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대교구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신분을 밝히고 각자의 공간을 배정받게 되었다.
다만 행사의 주인공인 알렉스는 따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대교구의 고위 성직자들을 만나는 절차를 끝낸 후에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대교구라 그런지 주교급 사제가 꽤 몰려 있네.’
도시의 규모만 따지면 글라즈번도 로안티카에 비해 크게 꿀리는 편은 아닌데, 다른 지역이라면 교구장을 맡을 수 있는 주교급 사제를 여기서만 열 명쯤은 만난 것 같다.
다들 중앙과의 연계 임무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는 알렉스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서, 했던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느라 꽤나 지겨웠다.
정작 알렉스를 불러들인 관구장은 오늘 바로 만나기 어렵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쪽으로. 이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관구장님의 일정이 여유롭지 않아 내일쯤 면담이 진행될 겁니다. 서임식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나흘 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더럽게 오래 기다리게 하네.
나흘이나 대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으니, 알렉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안내해 준 사제를 돌려보냈다.
‘우리 교구와는 얼마나 다른지 느긋하게 구경이나 해볼까. 방금까지는 사람들을 만난다고 정신 사나워서 뭐 보지도 못했으니.’
방에 틀어박혀 있어봐야 마땅히 할 일도 없기에, 알렉스는 관구장과의 면담을 기다리며 대교구의 신전을 구경했다.
“알렉스 경. 이쪽부터 저 끝까지가 전부 예배당이랍니다. 규모가 굉장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군요.”
“저쪽은 교리교실인가 봅니다. 앗! 세례당에서 영아 세례를 진행하는 모양입니다. 저 아이들 중에 미래의 팔라딘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핫!”
“아, 그렇군요.”
영혼 없는 대답을 연이어 내뱉으며, 알렉스는 아무 생각 없이 이사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할 짓이 없어 나오긴 했지만, 솔직히 신전이란 공간이 딱히 대단한 구경거리가 있는 장소는 아니다.
아예 처음 보는 구조물이라면 모를까, 알렉스의 눈에는 글라즈번의 신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게임 업데이트 패치 때 퍼센트 올라가는 거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겠네.’
그렇지만 오히려 신전 생활을 오래 한 이사벨은 마냥 신기하다는 듯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여기저기로 잘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닌다.
전에도 방문하여 보고 간 적이 있다면서 뭐가 그리 흥미롭다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 벽화를 좀 보십시오! 처음 마주했을 때도 크게 감탄하고 갔었는데, 다시 봐도 참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 드는군요.”
“이미 충분히 웅장한 크기셨…….”
“응? 혹시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흐음…… 아, 저쪽 지하에는 성유물 보관소가 있습니다. 구경해 보고 싶은데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으니 참 아쉽군요.”
멍하니 있다가 실수로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못 들었다니 다행이다.
여하튼 그렇게 대교구 신전에 틀어박혀 서임식 날짜까지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중.
하루가 지나며 이어진 관구장과의 면담에서, 알렉스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해서 우리 남서 관구의 명예를 높이 세운 자네를 치하하고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네.”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백 살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쭈글쭈글하고 왜소한 생김새를 한 아르미온 추기경은, 전체적인 겉모습을 봐서는 오늘내일할 것 같은 늙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활력이 넘치는 젊은 기사처럼 정광이 가득해,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전혀 노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과연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은 인상부터 남다르구나 싶었다.
“흘흘! 물론 허울뿐인 칭찬으로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닐세. 비록 알렉스 경이 이곳 소속은 아니지만, 관구장의 권한으로 대교구 소속의 팔라딘과 동등한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겠네.”
“엇, 혜택이라 하심은?”
심드렁한 내색을 최대한 숨기도록 표정을 관리하고 있던 알렉스는, 추기경의 말에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자잘한 지원이 여러 가지 있지만, 활동 구역이 다르면 어차피 의미가 없을 테고. 이곳에 보관된 성유물 중 하나를 내어줄까 하는데 어떤가? 물론 선택권은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군침이 싹 도는 이야기였다.
관구 본당인 이곳의 성유물 보관소라면, 당연히 다른 교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뛰어난 보물들로 채워져 있을 터.
그중에 원하는 종류까지 선택해서 가져갈 수 있게 해준다는 건, 소속구가 다른 알렉스에겐 상당한 혜택임이 분명했다.
“미흡한 제게 그리 도움을 주신다니, 저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렉스 경처럼 뛰어난 인재에게 지원을 해주는 게, 교단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투자겠지. 앞으로도 교단을 위해 더욱 많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겠나?”
“주 예루스를 섬김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자 할 뿐입니다.”
“물론이네. 흘흘!”
웃음을 흘리던 아르미온 추기경이, 이내 은근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선 큰 무대에 오를 필요가 있는 법일세. 혹시 나중에 우리 대교구로 전출해 올 생각은 없는가?”
“……소속을 옮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디까지나 의향을 물어보는 것뿐이라네. 하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알렉스 경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을 것 같군.”
노골적인 영입 제안에 알렉스는 난처한 얼굴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장비에 대한 욕심이 상당한 자신이지만, 섣불리 대답하기는 곤란한 이야기였다.
추기경은 짙은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당장 정하라는 소리는 아닐세. 일단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하지. 내 제안에 대해선 천천히 고민해 보게나.”
“으음. 알겠습니다.”
“보유중인 성유물들을 언제든 구경할 수 있도록 내 따로 말을 해두겠네. 서임식 전까지 어떤 것을 선택할지 정해두도록 하게.”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방금 들은 제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며, 알렉스는 추기경에게 예를 표하고 그와의 면담을 마무리했다.
* * *
“이건 어떤 효능을 가진 물건입니까?”
“아! 그 펜던트는 성 마로니안의 헌신이란 명칭의 성유물로, 정신을 언제나 맑게 유지시키며 치유와 관련된 성법의 위력을 증대시키는-”
‘치유증폭? 나쁘진 않지. 일단 이것도 체크해 두고.’
성유물 보관소의 관리를 담당하는 사제의 설명을 들으며, 알렉스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성유물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성유물을 미끼로 한 관구장의 제안은 신중히 고려해 봐야겠지만, 나중에 거절하더라도 일단 받기로 한건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뭐든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데,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대교구는 다르긴 다른가 봅니다. 성유물이 이렇게나 많이 보관되어 있다니…… 알렉스 경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되는군요.”
“말이나 한번 꺼내본 건데, 허락이 나와서 다행이네요.”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허가받을 명분이 없어 아쉬웠다던 말을 기억했기에, 동행인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찔러본 게 통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견학의 자격을 얻은 이사벨 역시, 알렉스를 따라다니며 성유물 보관소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벨 경은 굳이 교단의 성유물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여력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상당히 큰 가문의 출신이라 들었습니다만.”
별 의미는 없이 내뱉은 알렉스의 말에, 즐거운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이사벨의 움직임이 일순 멈춰졌다.
“제가 귀족가문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풀 네임을 들었을 땐 미처 몰랐었는데, 이사벨 경의 가문이 에른가스-”
“알렉스 경.”
이사벨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렉스의 말을 잘라냈다.
“죄송하지만 가문의 이야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까는 이사벨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였기에, 알렉스는 가벼운 잡담이라 여기며 꺼냈던 말을 꿀꺽 삼켜야 했다.
“아…… 음. 알겠습니다. 크흠, 아! 저쪽은 방어구 위주로 진열이 되어 있는 건가?”
분위기가 갑자기 서먹서먹해졌기에, 알렉스는 어색함에 헛기침을 하며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여기 방패도 있군요. 이야, 두께가 상당하네. 사제님? 이건 어떤 물건입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도 전부 암기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
성유물의 목록이 기록된 서적을 들고 따라붙은 관리사제가, 진열대의 번호를 확인하며 책장을 넘긴다.
“여기 있군. 이 방패로 말할 것 같으면 저희 로안티카 대교구의 전전대 성기사단장이셨던 빌헬름 경께서 사용하신-”
알렉스는 관리사제의 설명을 들으면서, 방패를 들어보거나 여기저기 툭툭 두드려가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방패란 게 자신의 무장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종류이다 보니, 보기 드문 성유물 방패에 신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방패에 관심을 주고 있자니, 조금 뒤처져 있던 이사벨이 당혹스러워하는 티를 가득 드러내며 알렉스의 곁으로 쪼르륵 달려왔다.
“아앗! 알렉스 경, 그 방패가 마음에 드십니까?”
“괜찮아 보이는 장비네요. 방패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기사가 드물다 보니 이쪽은 성능이 뛰어난 물건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편이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만 그래도……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마시고 다른 것도 더 둘러보시는 것이…….”
“음? 이사벨 경이 보기엔 영 별로인 것 같습니까?”
“아, 그게…… 으…….”
명확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아하? 선물을 준비한다고 했던 게 설마 방패였나?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모양이네.’
안절부절 못하는 이사벨을 귀엽게 바라보던 알렉스는, 그녀를 더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얌전히 방패를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방패는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은 물건을 찾을 기회가 있을 것 같네요.”
“아! 그, 그렇습니다! 아마 다음 달쯤이면, 앗…….”
“다음 달?”
“아, 아닙니다. 아무튼 지금은 다른 종류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그냥 대놓고 말해도 상관없을 텐데.
그래도 선물이란 건 원래 받기 전까지 내용을 궁금해하는 게 또 즐거움이긴 하다.
눈치를 챘어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하고, 알렉스는 안도하는 이사벨을 보며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보관소의 공간이 상당히 넓었기에, 둘러보는 데에만도 꽤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성유물을 고르던 알렉스는, 보관소의 구석 한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길을 멈췄다.
“음? 이건…….”
검신이 삼분의 일쯤 부러진 너절한 낡은 검이, 알렉스의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부서진 검이라니, 무기로서의 성능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이는군요.”
옆으로 다가온 이사벨이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넋이 나간 눈으로 망가진 검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거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게 맞나?’
만약 저 부러진 검이 자신이 기억하는 게임 속의 그 물건이라면.
그 가치는 여기 있는 나머지 성유물을 다 합쳐도, 저 검 하나에 미치지 못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