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62화
뒤따르는 그림자(2)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가면이었다.
까만 잉크로 두 눈을 동그랗게 그려 넣은 것이 전부인 투박한 형태.
잉크를 과하게 찍어 흘러내린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어린아이가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것처럼 조악한 느낌의 가면이었다.
그다음으로 평생을 굶주리고 지내온 사람처럼 비쩍 마른 체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쉐도우 케인…….’
조잡스러운 가면과 기형적으로 마른 몸매.
두 가지 특징을 확인한 알렉스는 습격자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암흑교의 가장 은밀한 추종자들.
눈앞의 상대는 그림자의 송곳니라고 불리는 암살자 집단의 일원이 분명했다.
‘염병할…… 어떻게 알고 나를 노린 거지?’
암흑교와 여러 차례 엮이며 속으로 가장 우려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는 재주를 갖고 있으며, 온갖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약물로 목표를 무력화시키고 암습을 가하는 암살자들.
여러 종류의 직군으로 나뉘는 암흑교의 교도들 중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다.
차라리 다른 강적과 준비된 상태로 싸우는 것이 낫지, 경계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을 가해오는 암살자의 존재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도 숙소 안에서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앉아 있던 터라, 방어본능 스킬이 아니었다면 급소를 찔려 즉사 당했을지도 모른다.
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암살자는 책에 가로막힌 단도를 뽑고 뒤로 크게 점프하며 알렉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어서 상대의 몸이 물에 닿은 눈이 녹아내리듯,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물러난 건 아니야. 아직 어딘가에서 나를 노리고 있다.’
60대의 레벨로 올라서며 한층 높아진 능력치는 알렉스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눈에 보이진 않아도, 따끔거리는 살기가 여전히 이 공간 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갑옷과 검, 방패를 전부 침대 옆에 놓아둔 탓에, 현재 알렉스는 완전히 비무장이었다.
단단한 껍질과 날카로운 가시를 다 떼어내 두어, 암살자에게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상태.
그러니 암살 실패 이후에도 달아나지 않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의자를 거꾸로 붙잡고 언제라도 내리칠 수 있도록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장비를 벗어둬서 꽤 위험한데…… 그래도 컨디션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아마도 공기 중에 수면제 같은 걸 살포했던 것 같지만, 정화의 불꽃을 늦지 않게 발동시켰기에 흐릿했던 정신이 금방 되돌아왔다.
포인트를 투자해 스킬 레벨을 올려두길 천만다행이었다.
폴로이스에서 괴물을 해치우고 세 번의 레벨 업을 거친 알렉스는 현재 62레벨로, 얻은 3개의 포인트 중 2개를 정화의 불꽃에 투자해 뒀었다.
방어 능력과 공격 능력은 제법 수준급으로 갖춰두었지만, 앞으로도 또 독 같은 것에 당하면 쉽게 무력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렇게 금방 예견한 상황과 맞닥뜨릴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새삼 잘한 선택이었음을 느낀다.
슈욱-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공격에 몸을 긴장시키고 방 안을 응시하고 있자니, 알렉스의 그림자 끝에서 암살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역시 거기냐!’
품을 파고들며 목을 향해 칼날을 찔러 넣는 암살자의 공격에, 알렉스는 몸을 뒤로 날리며 들고 있던 의자를 상대에게 집어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과 제일 가까운 그림자에서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발아래 쪽의 움직임에 신경을 가장 집중하고 있었기에, 기습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었다.
으지직.
집어 던진 의자가 암살자의 몸에 맞아 부서지며, 놈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에 바닥에서 일어난 알렉스가 곧바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녀석은 옆으로 몸을 굴리며 선반 아래로 늘어진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에이 썅!’
그래도 마냥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10평이나 될까 싶은 아담한 크기의 방이었기에, 그대로 몇 걸음 만에 침대 옆에 도달한 알렉스는 근처에 기대놓은 검을 잡아들 수 있었다.
스르릉.
이왕이면 방패도 주워들고 싶은데,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다시 공격을 당할 것 같아 일단 검을 뽑아 드는 것에서 그쳤다.
‘어디로 숨었지?’
정면으로 검을 내민 알렉스는 신중한 눈으로 방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저 그림자 이동술에 대해선 정확히 아는 바가 없으니, 섣불리 움직이기도 어렵다.
‘등 뒤가 영 싸하긴 한데…….’
촛불이 반대편에 있으니 조금 전과 달리 스스로의 그림자를 등지게 되었다.
다만 자신과 가장 가까운 그림자가 본인의 그림자라고 해서 그쪽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방 안의 다른 사물들의 그림자에서 놈이 튀어나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벽에 등을 붙이고 있으면…… 아냐, 원리를 정확히 모르는데 함부로 행동하다가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어.’
피부로 감지되는 저릿한 감각에 집중하며, 알렉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긴장되는 대치 상황이 이어갔다.
몇십 초 정도 그렇게 서 있자, 살기라고 생각하던 기운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렉스는 직감적으로 상대가 더 이상 공격하기를 그만두고 물러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기습이 계속 실패하고 자신이 무기를 들기까지 했으니, 일단 오늘은 포기하고 떠나려는 것일 터.
‘망할…… 그냥 보내선 안 되는데.’
이대로 끝내면 앞으로의 생활이 굉장히 고달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을 다 떠올리던 알렉스는, 곧이어 왼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냅다 반대편으로 집어 던졌다.
퍽!
노린 위치로 제대로 날아간 검집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양초를 후려쳤다.
방 안의 그림자들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이내 촛불이 꺼지며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야가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예민하게 날이 선 알렉스의 감각이 작은 기척을 감지해냈다.
“거기구나!”
구석 한편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강제로 끌려나온 암살자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사라질 테니, 암살자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맞았다.
‘저 이동술은 오로지 그림자라는 조건에만 한정되어 있다. 빛이 아예 없는 어둠은 오히려 숨을 곳이 사라지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잠자리에 들길 기다리지 않고, 수면제를 사용해 기습을 해온 것이리라.
방 안에 불빛이 없으면 그 누구보다 은밀하게 숨어들 수 있는 수단도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어둠속이라 해도 어차피 한정된 범위의 공간이기에, 두 사람은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에 의지하여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몸을 움직였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달려드는 암살자를 마주하며, 알렉스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시야가 차단된 상황임에도 신속하고 정확한 검격이, 찔러오는 단도를 밀쳐내고 상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전까지보다 한층 발전한 검술.
정화의 불꽃을 3레벨로 올리고 남은 마지막 1개의 포인트를, 고민 끝에 소드 마스터리에 투자해 두었던 덕분이다.
게임과 달리 이곳에선 마스터리 계열 스킬의 효율이 상당히 뛰어나기에, 뭘 찍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범용성이 좋은 검술을 8레벨로 올리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8레벨의 소드 마스터리란 평생 검을 수련하는 기사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말할 수 있는 수준.
그쯤 되면 단순히 잘 베고 잘 찌르는 정도를 넘어서, 걸음걸이와 호흡, 시선 등 신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극한의 효율을 따져가며 행동하게 된다.
레벨이 높아지며 신체능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런 정교한 통제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기에, 소드 마스터리에 투자한 것은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르으…….”
“개자식. 심장 쫄깃하게 만들기는.”
알렉스는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상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상처를 부여잡고 헐떡이던 암살자가, 웃음을 흘리며 몇 마디 말을 내뱉었다.
“크흐흣! 그림자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느으, 버어…….”
“뭐라고? 무슨 말…… 쯧! 이미 죽었네.”
혹시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말을 붙이려 했으나, 암살자는 곧바로 축 늘어지며 숨을 거두었다.
놈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알렉스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돌로메스의 그 마녀…….’
죽음의 그림자가 너를 쫓을 것이다.
사제들을 타락시켜 악마를 소환해낸 그 마녀는, 죽기 직전에 알렉스를 향해 그런 소리를 지껄였었다.
‘뭔가와 눈을 마주친 것처럼 불쾌한 시선 같은 게 느껴졌었지. 시발…… 그때 말한 그림자가 이런 거였나?’
방금까지는 우연히 이 마을에 머무르던 암살자가 성기사인 자신을 발견했기에, 충동적으로 암살시도를 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한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어쩌면 마녀가 죽기 직전에 자신을 향해 어떤 표식 같은 것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상상이었다.
쉐도우 케인의 암살자들이 자신을 노리고 줄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안 좋은 생각은 언제나 들어맞지. 하! 환장하겠네…… 신전 안에서야 그래도 별문제가 없겠지만, 이제 밖으로 돌아다닐 때마다 암살의 위험을 경계해야 하는 거야?’
앞으로는 쉴 때도 갑옷을 벗지 않고, 검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매우 울적해진다.
‘아차! 이사벨은!?’
한숨을 내쉬던 알렉스는 문득 다른 방의 동료를 떠올리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자신을 노리고 움직인 암살자로 추측이 되긴 하지만, 같은 팔라딘인 이사벨에게 암수를 뻗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온 알렉스는, 이사벨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이사벨 경!”
소리쳐 부르고 나서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알렉스는 지체없이 잠겨 있는 방문을 몸으로 들이받아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잘 살펴보니 침대 위를 덮은 이불에 작은 둔덕이 불룩하게 솟아 있긴 하다.
‘이사벨…… 설마…….’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왔다.
침대로 다가간 알렉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불을 잡아당겼다.
제발 자신이 상상하는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이불이 붉게 물들어 있다거나 비릿한 혈향이 풍기진 않았다.
이사벨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던 순간.
그녀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커다란 눈동자가 알렉스에게로 향했다.
“아! 다행이, 하아-! 무사하구나. 하하…….”
혹시나 이사벨이 암습에 당해 버린 건 아닌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던 알렉스는,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그녀의 모습에 크게 안도하며 웃음을 흘렸다.
“알렉스 경? 이게 무슨…….”
눈을 깜박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던 이사벨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의 하얀 피부가 시선을 붙잡았다.
알렉스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불 안쪽에서 드러난 이사벨의 모습이, 태초의 자유분방함 그대로였기에.
가느다란 목과 좁디좁은 어깨를 지나, 매끄러운 살결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알렉스 경…….”
알렉스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자각한 이사벨이, 흘러내린 이불을 붙잡아 올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알렉스는 크게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어…… 다친 곳이 없는 걸 보니 아무 일도 없었나 보군요! 다행입니다!”
“이 시간에 갑자기 제 몸에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단 말씀이십니까?”
“아뇨. 제가 지금 좀 흥분해서 말을 잘, 아! 흥분이라는 게 절대로 이상한 의미가 아니고, 그…… 침착하게 설명을 들으시면 상황을 이해할 겁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차분히 앉아서 마주하고 있지만, 감정은 한 올도 느껴지지 않은 냉담한 눈빛과 목소리다.
‘진정하자. 방금 그건 사고로 인해 불가항력으로 보게 된…… 크흠! 어쨌든 잊어버려야 해.’
꼭 유언은 들어주겠노라 말하는 듯한 태도였기에, 알렉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제가 습격을 당해서-”
“습격을 당한 사람은 저인 것 같습니다.”
“아……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고-”
“제가 잠을 깊게 자는 편입니다. 저녁 이후에 찾아와 불렀을 때 대답이 없으면, 보통 문을 부수던가요? 저는 다음을 기약하는 쪽입니다만.”
“아, 물론 그렇죠. 그렇긴 한데…….”
논리정연하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당당하게 있으면 될 텐데, 자꾸 머릿속에 그 희고 고운…… 아무튼 무언가가 아른거려서 말을 더듬거리고 횡설수설하게 된다.
그 탓에 알렉스는 한참 동안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