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61화
뒤따르는 그림자
“알렉스 경!”
“이사벨 경. 다녀왔습니다.”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임무 성과에 대한 사담은 보통 다른 이들에게 공개되지 않습니다만, 일반적인 임무가 아니다 보니 저도 조금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이번에도 굉장한 활약을 하셨다지요?”
“그냥 그분의 보살핌이 많이 따라줬을 뿐이지요.”
“하핫! 알렉스 경은 참으로 겸허하신 분이십니다. 정말이지 본받지 않을 수가 없군요.”
실제로 속에 품은 생각을 다 까발리면 저런 말이 안 나오겠지만, 겉으로는 제법 이미지 관리를 해놨기에 매번 칭찬의 말을 듣는다.
이사벨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던 알렉스는, 조만간 서임식을 위해 관구 본당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당연하게도 크게 놀란 이사벨은 이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의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네요. 아니, 솔직히 이렇게까지 금방 두각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알렉스 경이 제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분이라는 뜻이니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이사벨 경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같이 헤쳐 나온 지난 역경들이 저를 성장시킨 것이지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사벨은 꽤 듣기 좋은 말이었는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쑥스러워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하는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엄숙한 태도 위주를 보였었는데, 최근에는 제법 사이가 가까워지니 풀어진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 같다.
“사실 아무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나셔서 약간 섭섭하긴 했었습니다.”
“아, 그게, 임무가 워낙 갑자기…….”
“후후, 농담입니다. 출발 당일에 저를 찾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필 제가 외출 중이라 타이밍이 좋지 않았지요.”
“맞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가려고 했지만 언제 돌아오실지 알지를 못해서 말입니다.”
“실은, 그날 알렉스 경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러 나갔었습니다.”
“엇? 선물이라 하시면?”
이사벨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경께서 정식 서임을 받게 되면 드릴 축하의 선물을 미리 마련해 둘 생각이었습니다. 한데 예상보다 이렇게 기간이 급격히 단축되어 버렸으니, 당일에 선물을 하려던 계획이 어긋나버렸군요.”
“이런. 그럼 그냥 서임식을 나중으로 미뤄 버릴까요?”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무려 관구장님께서 직접 안수를 해주시는 영광스러운 자리이지 않습니까? 큰일 날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하하,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당황해하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깜찍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니, 무슨 준비를 하는지는 몰라도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이사벨의 신분에 대해 알고 나니, 왠지 선물도 꽤 가치 높은 물건일 것 같다는 기대감도 들었고.
물론 궁금하긴 해도 꼬치꼬치 캐묻는 건 너무 없어 보일 것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선물을 받을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후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바꿔가며, 두 사람의 대화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알렉스 경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저 역시도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고 왔었습니다.”
“아, 별일은 없었습니까?”
“네. 다른 분들도 함께였고, 전투가 필요하지도 않은 뒷정리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남서부 전체에서 다량의 사건들이 터지며, 남서 관구에 속한 모든 교구가 중앙 관구의 지원을 받아가며 바쁘게 움직였다고 알고 있긴 했다.
글라즈번 교구 역시 전 팔라딘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했을 터.
알렉스처럼 큰 사건에 연루된 이는 거의 없었겠지만, 어쨌든 다들 자잘한 일거리 하나씩은 처리하고 온 모양이다.
“분위기를 봐서는 이 소란도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더군요. 일단 저희 교구의 할당 구역 내에는 더 이상 조사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교단의 역량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을 리야 없겠지요. 그저 잠시간의 소동이었을 뿐일 겁니다.
“그렇지요. 해서 저희 교구의 사람들도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알렉스 경의 서임식에 저도 꼭 참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단장님께서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군요.”
“엇, 제가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교구에서 행사를 치렀다면 같은 식구들이 다 같이 축하를 해줬겠지만, 관구 본당으로 떠나야 하니 아는 얼굴이라곤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친분이 있는 이사벨이 함께 가준다면 어색함이 덜하고 여행길도 적적하지 않을 테니, 그의 입장에선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알렉스는 그길로 다시 단장을 찾아갔고, 허가는 맥 빠질 정도로 쉽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같은 교구의 식구 한 사람 정도는 참석해서 축하해 주는 것이 좋겠지. 어차피 이제는 당장 급한 일도 없으니, 알렉스 경과 가장 인연이 깊은 이사벨 경이 따라가면 딱 알맞겠군.”
그렇게 단장의 허락도 떨어졌기에, 두 사람은 남서 관구의 본당으로 향하는 여정에 또 한 번 짝을 이루게 되었다.
* * *
푸르르릉!
“아, 가만히 좀 있어 봐. 거의 다 됐어.”
안장 앞 목덜미 쪽에 가죽끈을 조이며, 알렉스는 신경질을 부리는 늙은 말을 달랬다.
프리츠에게 요청해 받아낸 성 베로드의 눈물은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 보석이었는데, 이걸 말에게 달아주기 위해 안장에 약간의 개조를 가해야 했다.
원래는 팔라딘 서임식을 마친 후에 성유물의 지급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지만, 교구장과 약간의 협상을 통해 곧바로 이것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저쪽을 다녀오는 사이에 말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당연히 가능하면 빨리 받아내야지.’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고 말하며 3일쯤 시간을 끌었더니, 대체 언제 출발할 거냐고 교구장 쪽에서 안달을 하기에 넌지시 성유물을 언급한 것이 먹혀들어갔다.
상급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관구 본당에서 서임식을 준비하며 대상자가 언제쯤 도착하겠느냐고 계속 연락을 취하니, 교구장으로선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끝났다. 어때? 뭔가 몸이 정화되고 막 신성한 힘이 차오르는 기분이 드냐?”
프히힝?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느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늙은 말의 태도에, 알렉스는 입맛을 다시며 안장 위로 몸을 올렸다.
“……뭐. 분명 좋은 효과가 있겠지. 이렇게까지 투자하는데 괴물로 변하고 그러지 마라.”
크게 대단한 효능은 바라지도 않으니, 이 녀석이 마수화되지 않고 변함없이 있기만 해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놈에게 이름도 붙여주지 않고 있었네. 이전까지야 때가 되면 갈아탈 생각으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슬슬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줘야 하지 않나 싶다.
언제까지고 늙은 말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적당한 이름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출발 준비를 마친 알렉스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움직이자 신전 입구에 먼저 나와 있는 이사벨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알렉스 경. 준비가 끝나셨습니까?”
“네. 바로 출발합시다.”
처음 교구를 찾아왔던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두 성기사는 신전을 떠나 글라즈번의 성문을 나섰다.
* * *
관구의 중심이 되는 본당이 위치한 교구는 통칭 대교구라 부르며, 알렉스를 호출한 남서 관구장이 몸담고 있는 대교구는 서부지역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인 로안티카에 자리하고 있다.
글라즈번에서 로안티카까지는 대략 일주일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
서부 최대도시인 로안티카와 그에는 못 미쳐도 충분히 대도시인 글라즈번 사이에는 번화한 마을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노숙을 해야 하는 일 없이 편히 쉬어가며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기도 번거로운데 그나마 거리가 가까워서 다행이네. 대교구가 남부 쪽에 있었으면 이동하는 데에만 한 달씩 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부지런히 움직여 현재는 로안티카까지의 도착 예정일을 이틀 정도 남겨두고 있는 상황.
알렉스와 이사벨은 적당한 마을에 들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관에서 각자의 방을 빌려 들어가 있었다.
‘오늘도 책이나 좀 읽다 잘까.’
아직 초저녁이라 잠자리에 들기는 약간 이르지만, 마땅한 오락거리도 없는 세계이기에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꽤나 제한되어 있다.
그나마 교구에 비치되어 있던 책 두어 권을 빌려왔기에, 여행 내내 이런 남는 시간에 독서를 하며 심심함을 달랠 수 있었다.
‘지금 내 인생이 판타지 그 자체인데, 여기서 또 판타지 소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긴 하네.’
최대한 지루하지 않을만한 책으로 고르다 보니 결국 선택한 것들이 전부 영웅서사시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반 삼아 쓰인 영웅들의 이야기지만 재미를 위해 각색이 꽤 들어간, 말 그대로 중세판 판타지 소설들.
국가 단위의 전쟁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며, 이 시대의 트렌드이기라도 한 모양인지 꼭 귀부인과의 로맨스가 빠짐없이 담겨져 있다.
연애요소가 나오면 꼭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불륜이 대부분이라 조금 꺼림칙하긴 한데, 관능적인 묘사가 은근히 자극적이라 보는 맛이 있긴 하다.
종교적 사상의 측면에서 교리에 위배되는 내용은 없긴 한데, 솔직히 이런 책이 교단의 서고에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장면이 꽤 나온다.
따로 출판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있는 세상도 아니니, 종교와 정치권에 민감한 내용만 아니면 선정적인 부분은 문제로 치지 않는 모양이다.
‘……으음. 어째 잠이 솔솔 쏟아지네. 오늘 좀 피곤했었나?’
며칠 동안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던 소설이었는데, 오늘따라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탁자에 앉아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렉스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침대에 가서, 자야…….’
정신이 몽롱해져 가는 알렉스의 시선에, 책을 본다고 밝혀둔 촛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들어온다.
창을 열어둔 기억은 없는데.
왜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것처럼 촛불이 저리 일렁이는 거지.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알렉스는, 바닥에서 자신 쪽을 향해 길쭉하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어…….’
조금씩 길어져 가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알렉스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분명 방을 밝히는 광원이 자신의 앞에 있는데, 어떻게 뒤에서 이쪽으로 그림자가 향하고 있단 말인가.
‘그림자가 아닌…… 으윽, 머리가 왜 이리 어지러운…….’
자신이 정체 모를 무언가에 취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알렉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으며 정화의 불꽃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렉스의 뒤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칼날이 목덜미를 노리고 내리꽂혔다.
다행이 생존을 위해 열심히 투자해두었던 방어본능 스킬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의식이 흐리고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상태였으나, 스킬의 발동에 따라 허리를 급격히 비튼 알렉스는 손에 붙들고 있던 책을 방패삼아 등 뒤의 암습을 막아냈다.
두꺼운 책을 뚫고 나온 날카로운 칼끝이 알렉스의 눈앞에서 멈춰졌다.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약간 차린 알렉스는, 자신을 공격한 암습자의 모습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