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60화
복귀(2)
“어엇! 본인이 여기 있었군!”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교구장이 뒤늦게 알렉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알렉스 경. 분명 교단에는 어떠한 연고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중앙에서 왜 그리 난리를 치는 게야? 허헛 참! 매번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하던 자들인데…….”
아리송해하는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보는 교구장의 모습에, 프리츠가 질문을 건넸다.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관구 본당에서 연락이 왔네. 그…… 중앙과 연계하는 파견 임무가 있지 않았었나. 알렉스 경이 다녀왔다지?”
임무 이야기가 나오자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자르빈이 공적을 빠짐없이 보고해 포상이 나올 수 있도록 해주겠다던 기억은 나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싶다.
“그렇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제가 거기서 크게 실수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아니, 반대일세. 추기경 예하께서 직접 알렉스 경의 공적을 치하하시겠다고 연락이 왔네.”
“아?”
예상했던 그 포상 건이 맞는 모양이다.
조금 일이 커진 것 같긴 하지만.
추기경이라니? 교단에서 교황 다음가는 권위와 명예를 가진 최고위 성직자가 아니던가.
‘추기경이 딱 두 사람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말이 나오는 쪽이면 남서부의 관구장이겠네.’
“지난번 외부인사의 서품 안수에 관련해서, 관구 평의회와 연락을 주고받은 기록도 전해 들으셨다더군. 아직 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경의 서임을 직접 주관해 주시겠다고 하셨네.”
“추기경 예하 본인께서? 허! 이런 경사가 다 있나.”
교구장의 말에 매번 딱딱한 표정만 짓고 있던 프리츠조차, 꽤나 놀란 얼굴이 되어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축하하네, 알렉스 경. 참으로 영광된 일이로군.”
사실 엄밀히 논하자면 팔라딘 서임은 각 관구 최고 책임자의 승인하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에, 다른 팔라딘들도 따지고 보면 관구장에 의해 임명을 받는 것이기는 하다.
다만 각 교구의 팔라딘 서임을 관구장이 일일이 다 주관할 수는 없으니, 실제로는 승인을 받은 교구장이 임명 권한을 대리하여 서임식을 치르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 부분을 관구장이 다이렉트로 주관해 준다 하여 딱히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소한 명예 하나에도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자랑스러운 일이 되긴 할 터.
물론 알렉스에겐 그리 흥미가 동하지 않는 이야기이긴 했다.
‘누가 서임을 해줬느냐 따위로 자랑하고 다닐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설마 그걸로 포상이 끝이야?’
스스로를 누구보다 세속적인 성기사일 거라 자신하는 알렉스는, 그런 물질적이지 않은 보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교단에서 정치질로 출세할 생각이 있다면 그런 이력 하나하나가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누가 서임식을 해주던지 알게 뭔가.
아니, 오히려 교구장이 해주는 것보다 더 내키지 않는다.
설마 추기경씩이나 되는 분이 여기까지 왕림해 주진 않을 테니, 서임을 받으러 관구 본당까지 가게 생겼잖은가.
“그…… 관구장께서 혹시 이곳으로 행차해 주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나?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 바로 연락을 전할 테니, 어서 떠날 채비를 갖추시게.”
그러면 그렇지.
귀찮은 일이 늘어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는 알렉스.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프리츠가 교구장을 붙잡아 말렸다.
“교구장님. 알렉스 경은 이제 막 복귀했습니다. 전해 받은 내용과 시기를 생각하면, 임무완료 후 거의 쉬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온 것 같군요.”
“아, 음…… 그런가? 그래도 서두르는 편이 좋을 텐데.”
“일단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입니다. 관구에서 그런 연락이 내려올 만큼 굉장한 활약을 했는데, 피로가 쌓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교구에서 공적을 쌓기 위해 인재를 혹사시킨다는 소리를 들으시렵니까?”
“끄응…… 알았네. 그럼 출발 시기에 대해선 확답을 미룰 테니, 준비가 되면 알려주시게.”
그나마 단원을 챙기려는 프리츠 덕분에, 오자마자 떠나야 하는 상황은 모면했다.
교구장을 돌려보낸 뒤.
알렉스는 프리츠와 기존의 주제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기를 제거하거나 통제하는 성유물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는가? 한번 어둠에 발을 들인 자를 되돌릴 방법은 없네.”
“그래도 그…… 외람된 말씀이지만, 신성력을 다루는 저희 성직자들 중에서도 배교 행위를 저지른 자가 아예 없지는 않잖습니까? 그렇다면…….”
“후우! 민감한 소리를 하는군.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 배교 행위가 가능하다면 반대로 이교에 몸을 바친 자가 신의 품에 귀의할 수도 있지 않냐는 거겠지.”
가능성만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일단 0은 아니라고 프리츠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고작 성유물 따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성령께서 직접 임하시는 기적이 펼쳐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으음, 어렵군요. 사악한 힘을 억누를 수 있기만 하면 되는데…….”
“대관절 그런 성유물이 왜 필요한가? 어차피 이교도는 발견 즉시 척살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거늘. 설마 자네…… 뭔가 위험한 사상을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세히 실토하시게.”
눈매가 가늘어지며 의심의 빛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프리츠에게, 알렉스는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고 동물…… 그러니까 마수 같은 것들을 제압하는 수단이 있을까 싶어 물어본 겁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이번 임무에서 마수를 잔뜩 상대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하하.”
“흐음, 그런가? 참 엉뚱한 친구로군. 마수라면, 음? 으음…….”
적당히 변명을 하는 알렉스를 쳐다보던 프리츠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잠시 말문을 닫았다.
이윽고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살짝 웃음기를 보인 프리츠는, 알렉스에게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성 베로드의 눈물이 우리 교구에 보관되어 있었지. 이거 참 공교롭군.”
“예? 그게 뭡니까?”
“200년쯤 전에 추기경을 지내시고 성인으로까지 추대되셨던 분이 남기신 성유물일세. 꽤 독특한 능력이 담겨 있다지.”
이어지는 프리츠의 설명에, 알렉스는 눈을 빛내며 큰 관심을 보였다.
“특이하게도 짐승에게 적용이 되는 성법을 주로 펼치셨던 분이라더군. 그분께서 돌봐준 전마들은 육체가 강철처럼 강건해지고 지치는 일이 없어, 어지간한 명마는 상대도 되지 않게 변했다던가?”
“오…….”
교황 성하보다도 더 존경심을 표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팔라딘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분이었다고 한다.
옛날이라고 기사들이 좋은 장비와 훌륭한 말을 원하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그런 능력이 있다면 팔라딘들의 전력 상승에 큰 기여를 하며 두터운 호감을 쌓았을 만도 했다.
“정확한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의 능력으로 마수까지도 굴종시켜 타고 다녔다는 소문도 돌았다더군. 뭐 그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자네가 말한 것과 부합되는 면이 있군그래.”
“그 성유물! 제가 받을 수 있습니까!?”
“음. 어디까지나 그분이 살아계실 때의 힘이 대단했다는 거지, 그 능력을 따라 만들어진 성유물의 실제 효력은 소문에는 미치지는 못할 걸세.”
“그래도 괜찮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외쳤다.
이야기만 들어도 자신이 찾던 물건일 확률이 높아 보이지 않은가?
그렇게 딱 맞는 물건이 소속된 교구에 보관되어 있다니, ‘운이 좋군’이라고 시크하게 한마디 뱉으면 어울릴 것 같은 상황이다.
“효능과는 별개로 성인이 남긴 물품이다 보니 우리 교구의 보물로 취급되는 성유물이라, 원래는 초임 팔라딘에게 주어지긴 어렵겠지만…… 자네의 공로도 있고 하니 교구장님과 잘 이야기해 보겠네. 그래도 쓰라고 만들어진 성유물인데 먼지만 묻게 하는 것보단, 필요해하는 이에게 넘기는 편이 낫겠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걸 받으면 다른 장비 지원은 더 없는 겁니까? 사실 이사벨 경의 갑옷을 보고 그간 꽤 부러웠었는데요. 파견을 나가서 보니 중앙 관구에선 그런 성유물이 기본 지급품이라지 뭡니까?”
“……자네 은근히 욕심이 많은 친구였군? 미안하지만 우리 쪽의 사정으로는 그 이상 지원을 해주긴 어려울 걸세.”
돈에 휘둘리는 어른의 속사정 같은 이야기들이 잠시 이어졌다.
팔라딘의 장비 중 어지간한 것들은 교단에서 보급을 해주지만, 성유물 같은 희귀한 무구까지 마음대로 가져다 쓰라고 지원해 주긴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서임 이후 첫 지원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하등품의 성유물 하나 정도를 넘겨주는 게 관례이고, 중등품 이상의 쓸 만한 장비를 받으려면 나름대로의 성의를 표시해야 했다.
쉽게 말해 고품질의 장비를 대여하려면 그에 걸맞은 기부금을 내야 한다는 소리다.
‘……목숨 걸고 충성하는데 사비까지 털어야 한다고? 아니, 이런 블랙기업이 다 있나?’
다른 직장이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할 텐데, 애초에 종교집단이니 이런 식으로도 굴러가는구나 싶었다.
“저는 딱히 가진 재산이랄 것도 없는데…… 그럼 이사벨 경의 갑옷 같은 걸 받으려면 얼마나 필요합니까?”
“크흠. 직접적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려니 꽤 민망하군. 그런 성유물은 성능도 성능이지만 전신갑주 자체가 워낙 고가품이기에-”
혹시나 지난번 귀족 자제에게 뜯어낸 금화 주머니로 해결할 수 있나 해서 물어봤지만, 들려온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교구의 다른 팔라딘들이 대부분 평범해 보이는 무장을 하고 다녔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니, 미친. 그런 돈을 어디서 구해?’
황당해하던 알렉스가 떠오르는 의문을 표했다.
“그럼 이사벨 경도 그만한 기부금을 마련해서 낸 겁니까?”
“자네…… 혹시 그녀의 출신에 대해 듣지 못했나?”
의아해하는 프리츠의 질문에, 알렉스는 이사벨과 관련된 기억을 뒤져보았다.
그녀에게 직접 집안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첫 만남에 성을 알려주지 않아서 평민 출신인가 싶기도 했는데, 같이 다니다 넌지시 물어봤을 때 에른가스트라는 성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에른가스트라는 성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 에른가스트가 이곳 마이로스 왕국의 공작가문이란 건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로군.”
“……아?”
공작이요? 조류 말고 귀족 작위의 그 공작?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신분에 알렉스의 정신이 잠시 가출했다.
왕이 국가의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절대왕정의 형태를 한 국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왕권이 귀족사회 전체의 힘을 마음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형식적으로야 귀족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모든 명령을 떠받들 것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그냥 국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왕을 중심으로 봉건적 위계 질서를 맺고 각자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귀족사회의 정점에 위치한 공작이란, 사실상 왕보다 살짝 모자라거나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진 거대한 권력자라 할 수 있었다.
‘이사벨이 그런 공작가문 출신이라고? 그럼 공작의 딸이나 손녀쯤 된다는 소리인가? 이야…… 설마 그런 다이아수저였을 줄이야.’
그만한 신분이면 한 나라의 공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어쩐지 다른 팔라딘과 다르게 전신갑주뿐 아니라 주무장과 보조무장까지 전부 성유물이라고 하더라.
재능만 보고 교단에서 밀어주는 게 아니라, 있는 집 자식이라 필요한 걸 다 갖추고 다닐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신성력에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런 신분에 팔라딘이 되다니,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네.’
성직자 중에 귀족의 비율 자체가 적지야 않지만, 그만한 고위 가문의 일원이 사제도 아니고 성기사가 되다니.
어린 나이 때부터 교단에 종속되어 교육을 받아야하는 팔라딘 육성과정의 특성상, 하급 귀족은 몰라도 대귀족의 자제가 투신하는 경우는 흔치않았다.
특히나 가문의 이득을 위해 정략혼의 도구로 사용되기 십상인 여성이라면 더더욱.
어쩌면 꽤나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가장 가까운 인맥이라 할 수 있는 동료의 몰랐던 정체에, 알렉스는 새삼 굳은 다짐을 했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야지.’
어쨌거나 이사벨에 관해서는 그렇다 치고.
서임 이후의 지원에 관련해서 단장과 나눠야 할 이야기는 전부 나누었다.
“어찌하겠는가? 자네의 공로쯤이면 그 전신갑주형 성유물을 요청해도 들어줄 수 있긴 할 걸세. 다만 아까 말한 베로드의 눈물과 갑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그냥 둘 다 주지 쩨쩨하게 진짜.’
알렉스는 늙은 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성유물의 지원에 대해서는 그 베로드의 눈물이란 걸 지급받는 쪽으로 논의하기로 정했으니, 서임 이후에도 무장 상태에는 변함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방패나 검이 망가지면 적당히 보급형 품질 내에서 교체해 주고, 갑옷에 손상이 생겨도 대부분의 수리비는 지원해 준다고 하니 다행이다.
‘이사벨은 잘 지내고 있나? 떠날 때도 그렇고, 돌아와서도 보고부터 하느라 아직 인사를 못 했는데.’
프리츠와의 용건은 모두 끝마쳤기에, 알렉스는 단장의 집무실을 떠나 근 이십일 만에 보게 되는 이사벨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