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7화
폴로이스 결전
“아까 본 그 조그만 마수들이 그새 커졌군.”
“그래도 수는 몇 마리 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조금 놓치긴 했어도 대부분은 기사들이 처리했으니.”
팔라딘들의 곁에서 작전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알렉스는, 괴물의 옆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3미터 크기의 마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몇 시간 사이에 벌써 성체가 되어 있다니, 경악할 만한 성장 속도다.
“계획대로 놈을 끌어들이려면 다른 마수들의 방해가 없어야 합니다만…….”
“걱정 말게. 고작해야 열 몇 마리 남짓한 것들이니 우리가 해결하지.”
느리게 기어오는 어미를 호위하듯 주변에서 폴짝거리는 마수들을 향해, 자르빈을 비롯한 중앙 팔라딘 몇 사람이 검을 뽑고 앞으로 나섰다.
“심판의 화살이여!”
“악을 단죄하노라!”
“오……?”
팔라딘들이 마수들을 향해 검을 겨누자,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검 끝에서 발사되어 날아가 놈들의 몸에 틀어박혔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성법이라고? 성기사 클래스의 스킬에는 저런 게 없는데…….’
알렉스가 놀란 눈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가까이 있던 치자르가 피식 웃으며 자랑 섞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처음 보십니까? 중앙 관구의 팔라딘이라면 임무를 나설 때 지급받을 수 있는 성유물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굉장히 유용한 장비로 보입니다.”
“하하핫! 사실 두세 번 사용하면 다시 충전을 위해 반납해야 해서 선호도가 높진 않습니다. 그래도 대단위 원정 임무라 몇 자루 챙겨온 걸 톡톡히 써먹는군요.”
횟수의 제한이 그렇게 걸려 있다면 아주 대단한 성유물은 아니긴 하다.
그래도 검을 든 이가 몇 번이나마 화살을 쏘듯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다니, 상황에 따라 굉장히 유용할만한 물품이기도 했다.
‘중앙 관구가 장비 지원 쪽에선 확실히 다른 지역보다 뛰어난 모양이야. 저 갑옷들도 전부 성유물이라 했고…….’
전날 치자르와 중앙 쪽 사정에 대해 물어보다가 들은 정보였다.
화려한 장식이 붙은 중앙 팔라딘의 판금갑옷은 단체복처럼 동일한 디자인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이사벨의 것처럼 형상복원과 탈착 기능이 있는 성유물이라고 들었다.
중앙 지역의 교구에 소속된 팔라딘은 저게 기본으로 지급되는 장비라고 한다.
‘우리 교구는 그런 거 없나 보던데…… 임무 지원도 건량이랑 은화 몇 개 담긴 주머니 받고 끝이었지.’
서임 이후의 장비 지원에 대해 아직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교구의 다른 팔라딘들이 어떤 무장을 가졌는지는 봤기 때문에 대강 사정은 알고 있다.
역시 아무래도 끗발에서 차이가 나니, 저런 보급의 수준에서도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중앙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기분은 조금 아쉽긴 하네.’
정상적인 게임 유저라면 당연히 템빨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좋은 장비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노가다를 반복하는 게 게이머란 종족의 특성이 아닌가.
이사벨의 갑옷을 보며 부러워했던 감정은 지금도 그대로기에, 솔직히 기본 지급이라는 말에 조금 흔들리고 있는 중이긴 하다.
중앙 팔라딘들이 마수들을 처리하고, 알렉스가 물욕과 의리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사이.
100기가 넘는 기마들이 괴물을 향해 질주했다.
“이랴앗!”
“느려 터진 괴물일 뿐이니 쫄지 마라!”
“혼자 따로 빠지는 놈은 진짜 뒈질 줄 알아!”
성에서 싹싹 끌어모은 말들로 구성한 연합군의 기마대다.
물론 아무리 지휘부의 대부분이 기병돌격을 사랑하는 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저 괴물을 기마대로 들이받겠다는 헛짓거리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기마의 동원은 괴물을 원하는 지점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일 뿐.
최대속도에 훨씬 못 미치는 속력으로 괴물에게 접근하던 기병대는, 놈과 30여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선회를 시작했다.
괴물의 몸체에서 쏘아지는 촉수의 사거리가 대략 10여 미터 정도임을 이미 파악했기에, 안전을 챙길 수 있는 딱 적당한 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30미터는 투창의 유효사거리이기도 하다.
“투척 준비!”
“괜히 무리하지 말고 자신 있는 놈들만 던져라!”
선두에서 기병들을 이끌며 거리를 조절하던 기사들이, 선회와 동시에 괴물을 향해 투창용 단창을 집어던졌다.
일부 병사들도 기사를 따라 투창을 시도하고 빠졌다.
당연히 날아간 창은 괴물에 가죽에 박히지도 않고 튕겨져 나왔다.
그나마 기사들의 투창은 살짝 꽂히긴 했는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긴 했으나, 유의미한 피해를 입힌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도 상정했던 사항이다.
투창은 그저 괴물의 신경을 건드려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용도이지, 효과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라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괜히 무리하다가 낙마하는 이가 생기면 곤란하기에, 기마술에 능숙하지 못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아예 창을 들고 오지도 않았다.
“케에엑! 씨시시시앗!”
“히익!”
“부, 붙잡히겠습니다!”
“속도 유지! 겁먹지 말라고 이것들아! 저렇게 느린데 잡힐 리가 있겠냐!”
“저 괴물을 배밀이하는 네놈들 자식새끼라 생각하고 차분히 기다려주란 말이야!”
“나보다 먼저 튀어나가는 놈은 후장을 창으로 꿰서 들고 다녀주마!”
속도 및 거리조절에 숙련된 기사들이 병사들이 독려(?)하며, 알맞은 간격을 유지한 채 괴물을 작전구역으로 인도했다.
“톨먼 경! 표시된 지점일세!”
“압니다! 괴물 자식도 잘 따라오고 있군요! 전원 속도를 높여라!”
“다들 잘 참았다! 이제 좆 빠지게 달려서 빠져나간다!”
기마대가 거칠게 박차를 가하며 미리 표시해 둔 구역을 빠져나가자.
“조준!”
유인 방향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병들이 지휘 장교의 지시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잡아당겼다.
“발사!”
피이잉-
꼬리를 흔들며 날아가는 수십 대의 화살이, 괴물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투창 때와 마찬가지로 몸에 박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으나, 이번에도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쏘아 보낸 화살은 전부 기름 적신 솜을 묶어 불붙인 불화살이었다.
“시싱싯…… 케에엣?”
괴물이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으나, 이미 작전 구역 안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뒤였다.
간격을 맞춰 근처에 쌓아둔 짚단에 불이 붙으며, 이내 순식간에 화염이 주변으로 번졌다.
혹시 냄새를 맡고 멈출까 봐 살짝 흙을 덮어 깔아두었던 기름 주머니들에까지 불길이 닿자, 그야말로 지옥의 업화가 따로 없는 불기둥들이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크에에에엑-!”
화염에 휩싸인 괴물이 높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연합군은 환호성을 뱉으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지! 숯덩어리나 돼버려라!”
“아무리 튼튼한 놈이어도 불에는 피해를 입는 모양입니다.”
“움직임이 느린 괴물이라 다행이군!”
굳이 싸울 필요도 없이 놈을 태워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연합군은 다들 기쁜 얼굴로 불 속에서 뒹구는 괴물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전투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캬아아악!”
불의 공간 속에 갇혀 있던 괴물이 엄청난 속도로 불길을 헤치며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몸 곳곳에 불꽃을 달고 털가죽이 그을려진 괴물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분노의 포효를 터뜨렸다.
놈은 알주머니 같던 비대한 하반신이 사라지고, 대신 수백 가닥의 촉수로 구성된 다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 저런!?”
“빠져나왔잖아!”
“생김새가 변했어!”
깜짝 놀란 사람들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괴물은 수많은 다리가 달린 지네처럼 촉수를 움직이며, 주변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뭉쳐 있던 궁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근처에 퍼져 있던 기사들조차 어떻게 반응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오, 온다! 커억!”
“으아아악!”
괴물의 촉수는 다리와 팔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고,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꼬챙이와도 같았다.
순식간에 온몸이 꿰뚫리고 내던져진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이런 썅! 저게 분리가 되는 거였어!?’
기겁한 알렉스가 땅을 박차며 괴물에게 달려들었지만, 그가 도착할 때쯤엔 이미 놈의 근처에서 생존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루스시여! 내게 임하소서!”
알렉스와 비슷한 속도로 달려온 치자르가 괴물에게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이 촉수 몇 가닥을 잘라냈지만, 이내 나머지 촉수들이 굵직한 두께로 뭉쳐지며 치자르의 몸통을 향해 쏘아졌다.
“커헉!”
두꺼워진 촉수로도 갑옷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치자르는 거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거의 십여 미터를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미친! 그냥 곱게 타죽지 무슨 두 번째 페이즈가 있고 지랄이야!’
알을 뿜어내던 하반신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마수를 생산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였지만, 차라리 느려터졌던 그때가 훨씬 상대하기 수월했다.
상반신만 따로 떨어져나온 괴물의 전투능력은,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홀로 대적할 순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쪽은 제법 머릿수가 많았고, 알렉스 역시 확실한 한 방을 아직 꺼내 들지 않은 상태다.
‘저 촉수가 문제야. 저것만 처리한다면…….’
지금이 아껴둔 수를 써야 할 때라고 직감한 알렉스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제 뒤쪽으로 모이십시오! 그걸 할 겁니다!”
“알겠소이다!”
“바로 후속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다들 준비해!”
괴물을 포위하기 위해 넓게 퍼지려던 팔라딘들이, 알렉스의 외침을 듣고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키에에엑!”
괴물의 고성과 함께 치자르를 날려버렸던 굵은 촉수가, 방패를 내밀고 앞장선 알렉스를 향해 쏘아졌다.
[굳건한 태세]
막고 버티기로는 누구보다 자신 있도록 만들어주는 스킬을 발동하며, 알렉스는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강력한 힘을 품고 날아든 촉수를 방패로 막아내었다.
쾅!
“케으읏?”
자신의 공격을 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는 알렉스의 모습에 의문을 떠올리던 괴물은, 이내 촉수를 분할해 알렉스의 몸을 덮쳐왔다.
여러 가닥으로 나뉜 촉수가 알렉스의 전신을 감싸고 뱀처럼 조여왔다.
끼기기긱.
알렉스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전신갑옷에 강한 압력이 가해지자, 갑옷을 구성하던 금속부품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잘 걸렸다, 망할 잡종 괴물아.”
누가 봐도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알렉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둔 채 갑옷의 틈을 파고들어 공격할 생각이었겠지만, 놈은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인간 형상의 폭탄이란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디바인 크로스]
눈을 제대로 뜨고 보기 힘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알렉스의 몸을 구속하던 촉수들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키야아아앗-!”
“네 새끼들이 이런 거 있다고 안 알려주던? 아, 참. 어제 온 놈들은 다 죽였으니 전하질 못했구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에게 조롱을 던지며, 알렉스는 스킬의 발동이 끝나기 무섭게 놈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런 알렉스보다 먼저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던 팔라딘들이, 한발 빠르게 괴물에게 달라붙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빛이 우리와 함께하리라!”
“저주받을 괴물이여, 소멸하라!”
디바인 크로스의 위력에 촉수가 전부 녹아버렸는지, 괴물은 털이 다 타버린 침팬지 형상의 볼품없는 상체만 남은 채였다.
유일하게 남은 두 팔을 휘두르며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은 저항으로 버티는 괴물.
팔라딘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녀석에게로 접근한 알렉스는, 신성력으로 물든 검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쳤다.
“끝이다!”
칼날이 놈의 목을 파고들려던 순간이었다.
푸쉬이익-!
괴물의 몸에서 갑자기 거센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강한 압력으로 주변의 팔라딘들을 밀쳐냈다.
“윽!?”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밀려났던 알렉스는, 곧 시야가 흐려지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이런 멍청한! 너무 성급했구나.’
괴물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어도, 촉수를 보며 악마의 힘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몸에 독성을 품고 있을 가능성 역시 염두에 뒀어야 했다.
지난번 돌로메스 마을에서 해치운 저급 악마가 그랬듯이 말이다.
다 잡았다 여기고 신중하지 못하게 달려들어서, 이렇게 전부 독에 당하고 말다니.
[정화의 불꽃]
알렉스는 마음속으로 자책하며, 정화 스킬을 사용하며 독을 몰아내려 했다.
그리 강하지 않은 독이라면 이걸로 금방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망할. 꽤 맹독인가 본데.’
하지만 증상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알렉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으윽…….”
“쿨럭! 다, 다들 이리로 모이게!”
다른 팔라딘들 역시 중독을 피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나마 자르빈이 어떤 해결책이 있었는지, 동료들을 불러 모으며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은으로 된 낡은 촛대였다.
자르빈이 촛대를 손에 쥐고 들어 올리자, 아무것도 탈 것이 없는 촛대 위에서 백색의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성유물…… 내 스킬과 같은 종류의 힘인가?’
불이 붙은 촛대 주변으로 모여든 팔라딘들의 안색이 점점 편해지고 있는 걸 보니, 제법 강력한 정화의 힘을 가진 성유물인 모양이다.
적어도 독 때문에 당장 누가 죽지는 않을 것 같기에, 알렉스는 마지막 발악을 끝으로 축 늘어져 있는 괴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놈도 이제는 확실히 힘이 다한 것 같으니, 독기를 어느 정도 몰아내고 나면 마무리를…… 어억!?’
괴물을 지켜보던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분명 완전히 녹아내렸던 하체의 촉수들이, 부글거리는 기포를 내뿜으며 점점 다시 자라나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놈의 생명력은 아직 바닥에 다다르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