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6화
마수 토벌(5)
알렉스의 공격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는데, 다른 일반 기사들의 공격이 괴물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칼이 박히질 않아!”
“이, 이런!”
모두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물은 붙잡힌 기사를 얼굴로 가져가며 입을 크게 벌렸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속으로 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해, 가느다란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아, 안 돼! 도와주시오!”
발버둥 치는 기사의 몸을 촉수가 파고든다.
전장에서 늘 탁월한 성능을 보여줬던 전신갑옷도 촉수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에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꼼꼼하게 몸을 덮은 판금갑옷이라 해도 빈틈이 전혀 없지는 않다.
괴물의 입에서 나온 촉수들은, 그런 틈 사이를 파고들기에 충분한 가느다란 굵기를 가지고 있었다.
“흐어어억…….”
붙잡힌 기사의 얼굴이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다.
소름 돋는 감각이 지켜보던 모두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단단한 열매의 꼭지를 따고 과즙을 빨아먹는 것처럼, 괴물은 기사의 하반신을 입에 물고 체액을 뽑아내었다.
포식이라는 단어로 상황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놈의 행동은 단지 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사가 잡아먹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것은 섭식이라는 행위 외에 또 다른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조금 외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뜻으로.
“시, 씨싯, 싱싱…….”
괴물의 몸에 폭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체가 아니라 고깃덩어리 같은 하체가 말이다.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몸통 여기저기에서, 종기가 발생하는 것처럼 피부가 올록볼록하게 올라온다.
“뭐, 뭘 하려는 거지?”
“조심해! 또 촉수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징그러운 광경에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무슨 현상이 벌어지는 건지 알아야 했기에 눈을 돌릴 순 없었다.
투둑. 푸악!
괴물의 피부에서 종양처럼 부풀어 오르던 그것들은, 이내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주변에 뿌려졌다.
“이런 시발…….”
알렉스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여드름을 짜내듯 피부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저 덩어리들은, 어떻게 보면 점액질로 뒤덮인 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씨앗, 싱싱하안, 씨…….”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지.’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다른 마수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난번 대량으로 몰려왔던 침팬지 마수들은, 이 토악질 나오는 생김새를 가진 괴물의 자식들일지도 모르겠다.
‘저 고름 덩어리 같은 게 정말로 알이고, 그 안에서 마수가 태어나는 거라면 말이지.’
그리고 정말,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괴물이 알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어쩌면 인간 남성의 씨…… 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촉수를 이용한 굉장한 테크닉으로 기사의 체액을 뽑아먹은 뒤에, 곧바로 저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가.
생리적으로 굉장히 거부감이 드는 상상이라 스스로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지만, 괴물이 내뱉은 단어들도 그렇고. 마냥 정신 나간 추론은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알렉스의 상상은, 제법 빠르게 사실 여부를 확인받을 수 있었다.
생각이 맞았다고 기뻐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키엣!
까흐으!
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덩어리들이 쭉쭉 찢어지며, 안에서 마수들이 탄생했다.
“이런 빌어먹을!”
“마수다! 저 괴물이 새끼를 깠어!”
크기는 아직 마수라기엔 작지만, 생김새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침팬지 마수였다.
알의 크기는 분명 30센티미터 정도나 될까 싶었는데, 태어나자마자 벌써 1미터쯤 되는 크기로 불어났다.
저런 폭발적인 성장을 보아하니, 금방 성체 마수로 자라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진짜 미친 속도네. 그 짓... 부터 산란, 부화까지 1분이나 걸렸으려나?’
생긴 건 포유류인데 왜 알을 낳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하반신이 알주머니처럼 생겨서 그런가?
‘아니, 시발,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던 알렉스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괴물을 항해 달려들었다.
너무 속이 메스꺼워서 가까이하고 싶진 않지만, 이 녀석을 해치우려면 자신을 비롯한 성기사들이 힘을 발휘해야 했다.
칼이 잘 박히진 않아도 그나마 신성력을 담으면 상처가 나긴 나니까.
“어차피 이놈에게 평범한 창칼은 안 통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 마수들을 처리하십시오!”
“아, 알겠소!”
알렉스의 외침에 괴물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물러났던 기사들이,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새끼 마수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께에엑…….
마수라 해도 막 태어난 새끼일 뿐이라, 놈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기사들의 손에 하나둘씩 목숨을 잃었다.
“신의 섭리를 벗어난 괴물이여!”
“예루스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노라!”
따로 호명하진 않았지만, 중앙 팔라딘들도 곧바로 알렉스의 곁으로 다가오며 보조를 맞춰주었다.
애초에 이런 부정한 존재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이니, 굳이 함께 싸우자거나 하는 소리를 할 필요도 없긴 하다.
“촉수를 조심해야 한다!”
“옆의 동료와 동시에 달려들지 말고, 서로를 지키며 순차적으로 공격해라!”
“피해를 입히는 것보단 촉수를 대응하는 쪽에 집중하시오!”
이형의 괴물을 상대하는 전문가들답게 팔라딘들은 재빨리 대처방식을 정했다.
괴물의 몸체는 크고 단단하지만 움직임이 둔하다.
주의해야 할 것은 빠르게 쏘아지는 촉수들.
촉수에 붙잡히면 혼자서는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기에, 팔라딘들은 공격을 서두르기보단 날아오는 촉수를 쳐내는 것에 신경을 쏟았다.
‘이런 방어력이면 디바인 크로스를 써도 치명상을 입히진 못할 거야. 나중에 또 뭐가 더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일단은 비장의 수는 아껴두고 다른 팔라딘들과 손발을 맞춰 움직이자.’
팔라딘들의 대응도 충분히 괜찮아 보였기에, 알렉스도 이번에는 그들과 호흡을 맞추며 따로 튀지 않고 싸움을 이어갔다.
“어차피 저 촉수도 무한히 자라나는 건 아닐 것이오!”
“차근차근 피해를 누적시켜 갑시다!”
확실히 팔라딘들의 전술은 효과가 있었다.
끊임없이 솟아 나오던 촉수는 막아내기가 까다롭긴 했지만, 괴물의 가죽처럼 질기진 않았기에 팔라딘들의 공격에 쉽게 잘려 나갔다.
몸체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했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붙잡히더라도, 근처에서 엄호하던 동료가 곧바로 베어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기에 전투는 제법 유리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요소의 개입만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아악!”
머리 위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알렉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마수에게 붙잡혀 발버둥 치는 병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끼 마수는 기사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아도, 평범한 병사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다.
게다가 이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지대.
기사를 피해 병사들에게 달라붙는 데 성공한 새끼 마수 한 마리가, 병사의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거기까지라면 그저 병사 하나의 희생으로 그쳤을 테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결과는 그보다 훨씬 나빴다.
병사를 붙잡은 새끼 마수가 나무 위에서 점프하여, 자신의 어미에게로 뛰어들었다.
“케히이이, 씨싯, 씨앗!”
“아아악! 싫어! 살려줘어억!”
자식의 조공을 받아든 괴물이 입에서 촉수를 뿜어 다시 한번 식사를 시작했다.
‘이런 염병할!?’
체액이 빨려 쪼그라든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무섭게, 괴물의 몸체에서 앞서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쁘지직. 파바바밧!
“알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크윽…….”
“아무도 괴물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해야 하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몸체에서 뿜어져 나온 알들은 수십 미터씩 날아가 떨어졌고, 수풀로 뒤덮인 장소에서 그것들을 전부 찾아 처리하는 것도 무리였다.
기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최대한 알과 부화한 새끼들을 제거했지만, 결국 또다시 희생당하는 병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놈의 입을 막아!”
“으윽! 촉수가 방해를!”
“이런 빌어먹을!”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을 때마다, 마수들이 수십 마리씩 늘어났다.
같은 문제가 자꾸 반복되었기에 지휘부는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있다간 마수가 계속 늘어나 후열이 무너지고 만다.
등 뒤의 병력들이 연달아 당하고 있는데, 팔라딘들이라고 괴물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병사들을 성으로 후퇴시키고 기사들만 남깁시다!”
“그게 되겠소!? 이런 숲속에선 병사들만으론 마수들을 따돌리지도 못하고, 금방 붙잡혀오게 될 거요!”
“그 말대로요! 이대로는 안 되겠소! 일단 이 자리에서 빠져나갑시다!”
“크읏, 어쩔 수 없겠군.”
병사들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적을 늘리는 방해요소만 되는 상황.
괴물을 상대하려면 장소를 바꾸고 다시 전술을 세워야 했다.
다행히 저 어미 괴물은 이동이 느리니, 평지까지 후퇴하고 나서도 어느 정도 준비할 시간은 생길 것이었다.
“전원 후퇴! 후퇴한다!”
“마수 놈들에게서 병사들을 지키며 물러나시오!”
결국 팔라딘들도 괴물을 내버려 두고, 마수들의 접근을 차단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팔로 기어오는 괴물의 속도는 인간의 달리기보다 한참 느린 수준이었기에, 연합군은 곧 놈에게서 멀어질 수 있었다.
* * *
“저딴 역겨운 괴물이 존재하다니…….”
“위치가 좋지 않았을 뿐이오. 숲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게요.”
“놈이 과연 우리를 쫓아오겠습니까?”
“마수들이 그랬듯이 그놈도 도시를 덮치기 위해 다가오던 중이었을 거요. 꼴이 그 모양이라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투에서 도망치느라 사기가 떨어졌지만, 지휘부는 마냥 패배감에 젖어 있진 않았다.
괴물의 능력과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유리한 장소에서 준비를 갖추고 싸운다면 놈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알렉스 경. 혹시 뭔가 좋은 의견이 없으십니까?”
기대감을 품고 물어오는 누군가의 질문에, 알렉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일단 병사들은 성안으로 보내고, 기름이나 짚단 같은 것을 모아보는 건 어떨지.”
“으음, 불을 쓰자는 말이오?”
“창칼은 통하지 않아도 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움직임이 느린 놈이고 촉수의 길이에도 한계가 있어 보이니, 함정을 파두고 불을 질러 상대하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팔라딘들의 공격으로도 쉽게 타격을 주기 어려운 상대이니,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다면 찾아서 전부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쁘지 않군. 평지에선 불이 크게 번질 일도 없겠고. 괴물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준비를 해봅시다.”
성으로 돌아온 연합군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괴물을 상대할 작전을 준비했다.
속도가 느리다고는 해도 이 정도 거리라면 아마 한두 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을 테니, 최대한 서둘러서 준비를 끝내야만 했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이쪽으로 쭉 깔아놓도록 하라!”
“여기부터 저쪽까지! 그래! 살짝 땅을 파서 덮어두라고!”
“궁수들을 뒤에 모아 둘까요?”
“화살이 통할 것 같진 않은데…… 가죽이 불에 타면 또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 대기시켜 보시오.”
부랴부랴 움직여 대강의 준비를 마친 연합군은, 급하게 수립한 작전대로 대형을 유지하며 괴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 괴물 놈. 기어오다가 지쳐서 퍼져 버린 건 아닐지 모르겠군.”
“제이먼 경. 자네의 그 아담한 물건 사이즈로는 짝을 찾아 후손을 남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참에 그 원숭이 괴물에게 씨를 뿌려보는 건 어떤가?”
“뭐야!? 내 대물을 몰라보고 그딴 소리를 하다니, 눈알은 어디다 뽑아두고 다니는 거냐!”
“크크큭!”
“난 마상창 시합에 나가면 왜 랜스를 두 자루씩 세우고 나오냔 소리를 듣는 몸이시라고!”
“푸흡! 에라이, 미친 인간아! 과장도 정도껏 해야지!”
“그만, 나타난 것 같다.”
병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던 기사들이 긴장을 풀기 위해 지저분한 농을 주고받다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오자 입을 다물고 전방을 주시했다.
“솔직히 우리 차례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사라는 작자가 약한 소리 하지 말게. 교단의 팔라딘들에게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아까 말한 대로만 잘해봅시다.”
급조된 작전대로 자리에 배치된 연합군이 각자 결의를 다지는 가운데.
“이이인가안! 씨시싯! 캬아아악!”
드디어 괴물이 숲을 벗어나, 성 앞의 평지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