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5화
마수 토벌(4)
연이은 전투의 피로로 전 병력이 지쳐 있는 상황이었기에, 지휘권자인 자르빈은 처음처럼 당일에 바로 숲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더 내세우진 않았다.
어차피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알렉스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기에, 그를 빼놓고 조사를 강행하겠다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물론 대부분의 기사들조차, 대단한 기적을 보여준 알렉스를 수비군의 중심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
이미 연속해서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발생했으니, 숲 안에서 또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모두가 기적의 주인공과 함께하지 않은 채 위험한 지역으로 떠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폴로이스 지휘부를 포함한 부대 전체의 초점은, 알렉스의 부상 회복 시기에 맞춰져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럭저럭 움직일 만하네요.”
“최적의 상태는 아니란 소리군요. 남은 사제분들을 더 독촉해 보겠습니다.”
“아,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진…….”
폴로이스 교구에 남아 있는 사제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 수였고,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비대해진 연합군 병력의 치료를 감당하느라 이미 녹초가 된 상황이다.
다친 사람을 고치려다 정작 치료하는 사람이 쓰러질 지경이라, 알렉스는 힘든 사람을 더 쥐어짜겠다는 소리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알렉스 경이 어서 회복되셔야, 내일 숲 안쪽의 탐색에 힘이 되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상태로도 내일쯤엔 충분히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폴로이스 교구의 사제가 원래 이리 수가 적었습니까?”
사건의 해결을 위해 병력의 수가 일시적으로 늘어난 탓도 있지만, 치료를 한다고 돌아다니는 사제의 수 자체가 어째 현저히 적어 보인다.
알렉스가 내뱉은 의문에, 곁을 지키고 있던 팔라딘 치자르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교구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인원이 있으니, 이전에는 더 많은 사제들이 있었겠지요. 한데 이곳의 영주가 이상한 징조들을 발견했을 당시, 교단에 알리기도 전에 병력을 움직여 숲 안으로 들어갔었다고 합니다.”
“……아하. 알만 하군요.”
“평소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인물이라던데, 본인이 스스로 이상현상을 파악하겠다고 나선 게지요. 영주가 직접 행차하니 당연히 이곳 교구의 지원과 도시 내 마법사들까지 대거 끌고 나갔고…….”
그렇게 데려간 전력이 숲 안에서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다.
오늘 본 대규모의 마수들을 평지도 아니고 숲속에서 맞닥뜨렸다면, 훨씬 어려운 전투가 되었을 테니 병력을 죄다 잃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어쩐지 마수와 싸우는데 사제들도 부족하고 마법 전력도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먼저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거였나.
“그런데 저한테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으십니까?”
“예? 무슨…….”
고개를 끄덕이던 알렉스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지자, 치자르는 흠칫하고 몸을 빼더니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강력한 성법으로 마수들을 대량처치한 뒤로, 연합군 내에서 알렉스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딴 사람들은 알겠는데, 팔라딘들의 태도는 뭔가 미묘하단 말이지.’
병사들을 비롯해 일반 기사들이 알렉스를 외경의 대상으로 여기며 이해하기 쉬운 감정을 보였지만, 중앙 팔라딘들은 감탄과 존중 외에 무언가 묘하게 눈치를 살피면서 주변을 맴도는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무언가 알아내려는 듯 교대로 곁에서 머물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도 중요 요인에 대한 보안이라는 명목하에 굳이 치자르 경이 옆에 붙어 있지 않은가.
‘당연히 내 스킬 때문에 알고 싶은 게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자신의 스킬과 교단의 성법이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기에, 뭔가 물어도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한데 성에 들어온 내내 특별한 질문은커녕 그 일에 대해 가벼운 언급조차 하지 않기에, 기다리다 못해 일부러 직접 말을 꺼냈는데 저런 태도를 보인다.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데, 다들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네. 뭐 물어봐도 말을 안 하니 지금은 신경 끄고 있는 수밖에.’
뭐가 되었든 아쉬운 쪽에서 먼저 말을 하겠거니 여기며, 알렉스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마침 이번 일이 아니면 다시 볼일이 또 있을까 싶은 중앙의 팔라딘이 옆에 있으니, 중앙 관구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대화를 오래 나누다 보니 조금 어색하던 분위기가 제법 친근한 느낌으로 변해갈 무렵.
치자르가 은근한 어조로 알렉스에게 질문을 건넸다.
“경께서는 중앙으로의 진출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음? 아닙니다. 가볼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이참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거지요.”
“하지만 알렉스 경은 심의회의…….”
“예?”
“흡! 아, 아닙니다. 말이 잘못 나왔군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무는 치자르.
이상하게 여긴 알렉스가 몇 마디를 더 건넸지만, 치자르는 당황해하며 대화를 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뭐야? 스트레스받게 왜 말을 하다 마냐? 심의회가 뭔데?’
“……제가 너무 휴식을 방해한 것 같군요. 바깥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호출해주십시오.”
궁금증이 가중되었지만 치자르는 이내 정색을 하며 아예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알렉스는 몸이 회복되는 동안 딱히 뭔가 할 것도 없었기에, 내일 연합군이 조사할 것이라 이야기한 숲에 대해서 떠올렸다.
‘별일 없겠지? 아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꼭 별일이 생기는 것 같긴 하던데.’
대량의 마수들이 숲을 벗어나 도시로 몰려와 죽었으니, 더 이상 숲 안에는 위험요소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마수들이 숲을 나오게 만든 무언가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수들이 대규모로 발생한 것도 이상현상. 그런 놈들이 갑자기 숲을 뛰쳐나온 것도 이상현상. 아무튼 이상한 점투성이군.’
현재의 사건 자체가 암흑교와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니, 숲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분명히 무언가가 있긴 할 것이다.
그것이 암흑교의 인물들과의 만남이 될지, 혹은 그들이 발생시킨 어떤 사특한 현상의 발견이 될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 일지는 가봐야만 알 수 있을 터.
‘진짜 매번 괴상한 일에 시달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별 탈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다만 무엇이 되었든 그게 폴로이스 연합군의 전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기를, 알렉스는 그저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 * *
“여기저기 마수들의 흔적이 남아 있군요.”
“그만한 수가 움직였으니 당연하겠지.”
“미리 논의한 대로 그 원숭이 놈들의 흔적을 분류해 봅시다.”
날이 밝은 후 숲의 초입으로 들어선 연합군은, 미리 정해둔 행동지침에 따라 조사를 진행했다.
어제 해치웠던 여러 마수들 중에서도 이번 현상과 가장 밀접할 것으로 의심되는 것은, 동종으로 대량 출몰했던 침팬지 형태의 마수.
그놈들의 이동 경로를 쫓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사태의 진원이 발생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연합군 수뇌부에서 도출된 판단이었다.
백 마리가 넘는 무리가 움직인 흔적이 하루 사이에 사라질 리도 없으니, 연합군은 주변을 경계하며 막힘없이 숲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예상대로 아무것도 없이 조용하군요.”
“마수는커녕 평범한 동물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만한 마수가 모여들었으니 숲의 생태계가 남아나지 않을 수밖에요.”
어제 있었던 마수들의 대규모 습격은 더 이상 놈들이 숲 안에서 먹을 게 없어졌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일이란 의견이 있었다.
이렇게 계속 진입하고 있음에도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드물 정도로 고요하기만 한 걸 보면, 그 말에 제법 신빙성이 더해진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 마시오.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상은 이교도들의 간악한 수작질이 반드시 연관되어 있는 법이니. 필시 한 번 정도는 무언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하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교단의 쟁쟁하신 팔라딘분들이 함께하고, 병사들 사이에서 성인으로 불리고 있는 알렉스 경께서도 저기 계시는데 말입니다.”
“……크흠! 성인의 추대는 교황 성하의 승인이 내려져야만 가능한 것이오. 아무리 무지한 병사들이라 해도 가벼이 입에 담지 않도록 주의를 부탁드리오.”
“아, 물론 그렇지요. 그래도 어제 보인 알렉스 경의 무용이 워낙 대단했다 보니……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을 처음 봤을 때는, 저 기사가 자살을 하려는 건가 싶었습니다. 하하!”
숲에 들어선 지 두어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어떠한 방해도 없이 행진을 반복하기만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잡담을 나누는 이들이 늘어났다.
“얼마나 더 이동해야 할 것 같소?”
“아직 한참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마수들이 고작 이 정도 거리 내에 서식하고 있진 않았겠지.”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살짝 느슨해져 가던 긴장감이 단번에 팽팽해졌다.
선두에 선 사람들이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자, 확실히 저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직. 쩌저적.
“이게 무슨 소리지?”
답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기묘한 소음은 점차 커져갔고, 금방 모두가 그 소리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편 어딘가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수인가!”
“전투 준비!”
모두가 긴장하며 경계심을 높이는 가운데, 이쪽을 향해 움직이던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걸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하면 좋을까.
“저게 뭐야!”
“……빌어먹을. 끔찍하게도 생겼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전날 숱하게 해치웠던 침팬지 마수의 형상이었다.
3미터 정도의 키를 가졌던 침팬지 마수를 몇 배로 늘려놓은 듯한 크기.
다만 동일한 부분은 딱 상반신에 한정되어 있었다.
거대 침팬지의 하체는 상체보다 훨씬 크고 길었는데, 점액질을 뚝뚝 흘리는 그것은 육신의 일부라기보단 커다란 주머니 같은 느낌을 주는 생김새였다.
‘……그, 흰개미? 그래. 여왕 흰개미의 몸통처럼 생겼네.’
알렉스는 나타난 괴물의 외형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건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전혀 다른 생물을 합쳐놓은... 일종의 키메라 같은 건가? 덩치는 크지만, 전투 능력이 뛰어나 보이는 형상은 아닌데.’
다리가 없으니 걸을 수도 없고, 두 팔만으로 비대한 몸체를 지탱하며 기어 다니는 모습.
10미터가 가뿐히 넘어가는 몸길이가 압박감을 주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요소만으로는 그리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설명한 외형 외에도 무언가 굉장히 불쾌감을 자극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지만, 일단 겉보기는 무시무시한 마수라기보단 기괴한 무언가라는 느낌이 강했다.
“저것도 마수인가? 역겨운 녀석이군.”
“달고 있는 저 덩어리는 뭐지? 변이에 실패하기라도 한 걸까요?”
“알게 뭐요! 당장 죽여 버립시다!”
천천히 기어오던 괴물이 무기를 들이대는 인간들을 보며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이윽고 침팬지 형태의 상반신이, 웃음을 짓는 듯한 표정을 입을 열었다.
“이이인, 가안…….”
“맙소사! 저게 지금 말을 한 거요?”
“설마! 마수가 사람의 말을 할 리가…….”
“시, 씨시싯, 싱시이!”
“저것 봐! 말을 하고 있잖소! 뭐라고 하는 거지?”
“그딴 게 중요합니까! 저것과 친분이라도 나누고 싶소!?”
“구경만 하지 말고 어서 공격합시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려는 듯한 괴물을 보며, 기사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놈이 한발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괴물의 몸 곳곳에서 수십 가닥의 촉수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알렉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악마! 악마의 힘이 혼합된 건가!?’
촉수를 가진 몬스터가 악마종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 악마처럼 강력한 것도 드물다 보니 자연스레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길게 뻗어 나온 촉수가 선두에 서 있던 기사 하나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으아아악!”
괴물의 기묘한 생김새와 말을 하려는 듯한 모습에 조금 혼란이 있었지만, 아군이 공격당하는 상황에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기사를 구하기 위해, 알렉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무기를 쥐고 괴물에게로 달려들었다.
“괴물 놈! 멈추지 못할까!”
“이야압!”
촉수로 끌어당긴 기사를 손으로 붙잡아 들어 올리는 괴물에게 돌진하며, 알렉스는 스킬을 발동시켜 검에 밝은 광채가 서리도록 만들었다.
[홀리 웨폰]
[심판의 일격]
부정한 존재를 상대로 한 번도 실망을 안겨준 적이 없었던 조합.
신성한 힘이 담긴 검격이, 거대한 침팬지 형태의 상체를 베었다.
스걱.
‘……얕다고?’
알렉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는데, 칼날이 생각보다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예상한 것 이상으로 괴물의 몸은 단단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혐오스럽기만 하고 볼품없는 생김새와 다르게, 어쩌면 굉장히 레벨이 높은 강력한 상대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