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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54화 (54/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4화

마수 토벌(3)

알렉스는 머릿속으로 최적의 구도를 그려보았다.

‘내가 놈들의 중심에 파고들어 스킬을 사용한다면 가장 효과가 극대화되겠지만…… 단번에 전체를 무력화시키지 못한다면 고립되어 목숨이 위험해질 테고.’

마수를 상대로 신성력의 폭발이 효과가 있을 거란 점은 확신하지만, 정확한 위력을 계산할 수 없으니 너무 무모한 짓은 삼가야 한다.

지금으로선 마수들과 아군 병력이 맞부딪치는 순간에, 선두에서 스킬을 발동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거기까지 떠올렸던 알렉스는, 이내 자신의 생각에 크나큰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망할! 내게 지휘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앞에서 싸우자 한다고 기사들이 따라줄 리가 없잖아?’

국가 단위의 명성을 쌓은 유명한 기사라면 모를까, 실력이 어쨌든 간에 이곳에서 알렉스는 그냥 숱한 기사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지휘우선권은 중앙소속 팔라딘의 최선임인 자르빈에게 있고, 아까 전의 태도를 봐서는 그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애초에 시간도 별로 없었기에,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알렉스를 태운 말이 성 앞까지 도달했다.

치자르와 알렉스가 가장 마지막에 남겨진 기마였기에, 두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말에서 뛰어내린 알렉스는 곧바로 병력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자르빈을 찾아 달려갔다.

“자르빈 경! 병사들을 저렇게 버릴 겁니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네. 성문이 뚫리면 도시의 주민들까지 위험해지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걸세.”

“지금 빨리 정비를 갖추고 기사들이 맞서준다면-”

“위선 떨지 말고 자리를 지키게, 팔라딘 알렉스. 지금은 바깥의 병사들이 마수를 하나라도 더 줄여주길 기대하면서, 남은 인원들로 놈들을 격퇴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최선이다.”

자르빈의 눈빛을 본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무슨 소리를 해봐야 먹히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끝내주는 비장의 수가 있다고 설명해 봐야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그렇다고 마냥 그를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휘관의 입장에선 이런 선택이 최선이라 여길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기에.

닫힌 성문을 잠시 바라보던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계단을 뛰어 성벽 위쪽의 망루로 올라갔다.

“안 돼! 열어 줘어엇!”

“아악! 제발 살려주세요!”

각도가 있어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닫힌 문에 가로막혀 절규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죽어라 뛰어오는 나머지 병사들의 뒤로, 검은 물결처럼 밀려오는 마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개새끼들아! 당장 열지 못해!”

“우릴 버렸어!”

“아직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단 말이야!”

낙오한 병사들이 점점 몰리며, 성문 앞의 소란이 더욱 커져갔다.

성벽 위에 올라 상황을 주시하던 기사와 병사들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들이 떠오른다.

눈물을 흘리면서 손톱을 물어뜯는 병사.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쩔 수 없었노라 중얼거리는 기사.

기도문을 외우며 눈을 감는 팔라딘.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슬퍼하며, 또 누군가는 바깥에 남겨진 것이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목이 갈라져라 외치는 병사들의 절규를 듣던 알렉스는,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앞으로 몇십 초 뒤면, 몰려온 마수들이 오갈 곳 없어 뭉쳐진 병사들을 덮칠 것이다.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고 기름을 쏟는 등 대처를 하겠지만, 놈들을 해치우는 속도보다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속도가 훨씬 빠를 것임은, 굳이 보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나?’

멍하니 마수 떼의 돌진을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가, 자신의 생각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병사들을 구할 방법이야 당연히 있다.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앞에서 싸우면 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꽤 어려운 조건이 걸려 있을 뿐.

문제의 해결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본인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

세상은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 부른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거창한 존재가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런 요상한 세계에 떨어졌고, 게임 화면 너머로 보던 캐릭터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기묘한 능력자일 뿐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차가운 콜라를 마시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가끔 바보처럼 낄낄거리던, 그런 삶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

어째 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져, 어쩔 수 없이 사악한 무리와 목숨 걸고 싸우긴 했다.

덕분에 구르고 구르며 제법 무력을 갖춘 수준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진정으로 신에게 헌신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인물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목숨은 내가 챙겨야지. 다른 팔라딘들도 가만히 있는 마당에, 남을 돕는다고 무리해 봐야 좋은 게 없어. 그래, 없긴 한데…….’

알렉스는 성벽의 높이와 성문의 위치, 마수들의 거리를 확인하고는 뒤로 쭉 물러났다.

“시버럴 거. 이러고 뒈지면 진짜 병신인데.”

성문이 있는 자리 위에서 대충 10여 미터 정도 옆으로 떨어진 알렉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전력을 다해 성벽을 따라 달려 나갔다.

자신이 앞으로 취할 행동은, 논리적으로 판단하면 별로 현명한 짓은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이유도 모른 채 이런 야만적인 세상에 떨어져 괴물들과 부대끼고 살아가고 있으면, 가끔 원래의 자신이라면 하지 못할 미친 짓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비이성적인 충동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망 없는 행동은 아닐 거라 믿는다.

“이봐! 뭐 하는 건가!”

“자, 잠깐! 어이!”

자신의 질주에 깜짝 놀라며 외치는 기사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알렉스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성벽 끝을 밟고 뛰어올랐다.

허공을 유영하던 육신은 곧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한다.

‘게임 시스템을 계속 접해서 그런지, 어째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이제는 마냥 두렵지만은 않네. 하여간 게임이 항상 문제야.’

자신의 미친 짓을 게임 탓으로 돌리며 정당화한 알렉스는, 굳건한 태세를 발동시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성문 앞까지 들이닥친 마수 무리의 머리 위로, 전신을 쇳덩이로 감싼 0.1톤의 인간이 내리꽂혔다.

커다란 충돌음이 울림과 동시에, 마수 한 마리가 파리채에 맞은 벌레처럼 찌부러지며 지면에 몸을 처박았다.

그 거대한 소음과 이해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광경에, 달리던 마수들과 성벽을 끼고 위아래로 나뉜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곳으로 향한다.

‘쓰읍. 더럽게 아프군.’

박살 난 시체 위에서 몸을 일으킨 알렉스는, 주변이 온통 검은색임을 확인하고 씩 웃음을 지었다.

마수 떼의 중앙에 떨어지고자 대충 거리조절을 하긴 했는데, 보아하니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정확히 무리의 어느 정도 지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비장의 한 수를 쓰기에 나쁜 위치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자리가 별로여도 이제 와서 어쩔 수 없고.

충돌의 중심 주변에 있던 마수들은 당황한 탓에 잠시 멈춰 섰지만, 뒤쪽의 무리들은 여전히 계속 몰려오고 있다.

멈춰 선 마수들을 밟고 뛰어오른 마수들이, 검은 파도가 되어 알렉스를 덮쳤다.

어깨가 영 말을 듣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가까스로 검을 뽑아 드는 데 성공했다.

방패를 든 팔은 완전히 작살났는지, 덜렁거리며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예루스으으읏-!”

[디바인 크로스]

하늘을 찌를 듯 검을 높이 든 알렉스가, 계획한 대로의 스킬을 발동시키며 목청 높여 외쳤다.

‘거, 얼마나 대단한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 하는데 힘 좀 넉넉하게 빌려줍시다.’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광채에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고자 하는 인간의 호기심으로, 눈의 자극을 견디느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앞을 주시하는 사람도 적잖이 있었다.

대략 3초가량 지속되었던 강렬한 빛의 폭발은, 나타났을 때처럼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털가죽이 싹 타버려 민둥해진 모습으로, 알렉스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마수 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해치웠지?’

마음속 기도가 통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위력은 기대한 것처럼 화끈했다.

정확한 숫자를 세긴 어려웠지만 최소한 오십 마리, 어쩌면 거의 백 마리쯤은 쓰러뜨린 것 같다.

전부 즉사한 것은 아니고 일부는 화상을 입는 정도에 그쳤지만,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로 움직이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살아있더라도 전투에 동원되기 어려운 상태이기에, 디바인 크로스에 휩쓸린 놈들은 거의 다 무력화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저게, 저게 대체…….”

“오오! 신의 기적이야! 저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걸 내가 봤어!”

“성자다…… 저분은 예루스께서 보내주신 사도가 틀림없어!”

간단한 성법만으로도 평범한 이들의 경외를 받는 마당에 이렇게 눈에 띄는 능력을 선보였으니, 일반병사들에겐 그야말로 천사가 지상에 강림한 모습처럼 여겨질 만했다.

특히나 죽음의 위기를 앞둔 상황이었기에, 병사들의 반응은 더욱더 열광적이었다.

일대 소란을 등 뒤에 두고, 알렉스는 떠오르는 알림을 확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렉스 Lv 59]

이미 경험치 바가 거의 가득 찬 상황이었으니, 레벨 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경험치는 엿같이 짜구만.’

레벨이 애매하게 낮은 상대라 그런지. 해치운 숫자에 비해 경험치 바가 많이 채워지진 않았다.

그래도 수량이 많아 그럭저럭 오르긴 올랐지만, 다음 레벨 업을 바라보려면 아직 꽤 멀었다.

알렉스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새로 얻은 포인트를 사용하고자 스킬 창을 열었다.

[굳건한 태세 Lv3]

길게 고민할 것 없이 굳건한 태세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신나게 두들겨 맞을 일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캬아악-!

끄와앗!

아직 멀쩡히 살아남은 침팬지 마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알렉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당한 수를 처리하긴 했지만 여전히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남아, 홀로 정면을 막고 있는 알렉스에게 강한 살의를 드러낸다.

‘이 정도 했으면 좀 쫄아서 도망쳐주면 안 되냐.’

솔직히 그런 상황도 기대하긴 했는데, 전부 다 생각처럼 풀려주진 않을 모양이다.

그나마 병사들에게 향하던 공격성을 자신에게 묶어뒀으니, 하려던 역할은 확실히 다한 것 같다.

한 차례 투덜거린 알렉스는 안 아픈 곳이 없는 몸뚱이를 대상으로 치유 스킬을 최대한 발동해가며, 맹렬하게 덤벼드는 마수들을 맞이했다.

몸도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물밀듯이 덮쳐오는 마수를 상대하기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마리, 한 마리야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는 적이라 해도, 다수와의 전투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으윽,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말을 내 몸으로 체감해야 하다니.’

싸운다고 하기보단 집단구타 속에서 최대한 덜 맞는 느낌으로 몸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굳건한 태세 스킬이 아니라면 진작 곤죽이 되어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간간이 수치가 쌓일 때마다 격노의 응징으로 반격을 하기는 했지만, 알렉스 혼자 남은 마수들까지 전부 처리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다행히 곤경에 빠진 그를 돕기 위해, 성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돌격하라!”

“짐승 놈들! 전부 토막 쳐주마!”

‘……빨리 좀 튀어나와라 이 인간들아.’

고작 한 사람이 나서서 마수들의 수를 절반 가까이 줄여놓았는데, 아무리 기사들이 지쳤다고 해도 계속 성벽 안에 틀어박혀 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이 수세에서 공세로 상황을 반전시켜야 할 때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기에, 기사들은 잠시 눌러두었던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남은 힘을 쥐어짜 마수들을 몰아붙였다.

애초에 숫자의 차이가 너무 나서 후퇴했던 것이지, 무력적인 측면에선 기사들이 마수에게 꿀릴 이유가 없다.

“죽여! 이 원숭이 놈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한 비율이 맞춰졌기에, 폴로이스 수비군은 어렵지 않게 남은 마수들을 처리하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성문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에서 병사들의 환호성이 내질러졌다.

“자르빈 경. 방금 그 성법…… 말로만 듣던 징벌의 광휘가 아닌지…….”

“그만, 입 밖에 내지 말게.”

부축을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알렉스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중앙 소속의 팔라딘들은 본인이 목도한 현상을 머릿속으로 다시금 떠올렸다.

‘수호자의 권능…….’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지방의 팔라딘일 뿐인데…….’

‘아까 그 힘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걸까?’

성기사 자르빈은 중앙 관구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위를 가진, 루미나 교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예루스 교단 전체를 통솔하는 중앙통제기구인 교황청이 위치해 있는 곳.

그리고 교황청 직할기관인 심의회 소속 팔라딘들에게만 은밀히 전수된다는, 더없이 특별하고 강력한 비전 성법들에 관한 소문들을.

“다들 저 친구에 대해…… 자세히 좀 알아보게.”

비교를 위해 중앙 팔라딘이라 통틀어 불린다지만, 당연히 중앙 관구에도 다른 지방 관구들처럼 여러 교구가 지역별로 분포되어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무수한 파벌 다툼과 정치적 분쟁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벌어진다.

남서 관구를 지원하기 위한 이번 대규모 파견의 명단에는, 사실상 중앙에서도 힘이 약한 파벌과 분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르빈은 묘한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알렉스를 주시했다.

어쩌면 중앙에서 벗어나 있는 이번 파견 기간 동안.

자신의 이후 교내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뒤바꿀, 뜻밖의 소득을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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