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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53화 (53/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3화

마수 토벌(2)

적지 않은 양의 경험치지만 아쉽게도 레벨 업까지 도달하기에는 아주 조금 부족했다.

‘잔챙이 두어 마리만 더 잡으면 될 것 같은데.’

아직 살아 있는 마수를 좀 더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알렉스는, 검을 회수하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깊게 박아 넣었는지, 근육에 물려 칼이 좀처럼 빠져나오질 않는다.

‘망할. 이게 왜 이리 안 뽑혀?’

“숨통을 끊기 직전이었는데 그걸 가로채다니…….”

칼을 뽑는다고 낑낑거리고 있자니, 마무리를 뺏긴 팔라딘이 못마땅한 눈으로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성안에서 자신을 보자마자 빈정거렸던 그 인간이다.

‘짜식, 뭐 어쩔 건데? 빨리 주워 먹는 놈이 주인이지.’

“아, 미안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마구 뛰어들었군요.”

속마음은 다르지만, 일단 웃는 얼굴로 사과를 전했다.

말뿐인 사과야 못 해줄 것도 없으니.

기사란 족속들은 사소한 일에도 명예를 들먹이며 목숨을 거는 습성이 있다.

공적을 세우고 싶은 욕망이 누구보다 강렬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성기사라 해도 그런 성향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적에게 가하는 최후의 일격이란 기회를 뺏긴 것에, 팔라딘은 꽤나 불만을 품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알렉스가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아 싸우는 것을 보았고 바로 사과까지 해오자, 그도 차마 더 뭐라 하지는 못하고 물러난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슬금슬금 주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함께 마수와 싸웠던 중앙 소속의 팔라딘들이, 호의가 담긴 눈빛을 보내며 알렉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 대단하군.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저런 거대한 괴물의 힘을 버텨내다니. 도대체 몸이 얼마나 튼튼한 건가?”

“어디 소속이라고 했는가? 이만한 실력자라면 지방 교구에선 못해도 부단장 정도는 되는 인물일 텐데…….”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젊은 친구 아닌가? 저 나이에 간부급이라니, 아무리 지방의 규례가 느슨하다 해도 그럴 리는 없겠지.”

“실력이 그렇다는 걸세, 실력이.”

땀내를 풀풀 풍기는 남정네들이 알렉스를 둘러싸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기사들의 호감을 사는 데는 가진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 직방이다.

교분을 나눌 만한 실력자라고 여겨졌는지, 별로였던 첫인상과 달리 다들 태도가 제법 사근사근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레벨 업을 하기는 글렀나 보네.’

주변을 둘러보니 남은 마수들도 이제 거의 다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알렉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칼이 잘 안 빠져서 그런데, 누가 여기 틈 좀 벌려주시겠습니까?”

“오, 내가 도와주겠네.”

큼지막한 도끼를 든 팔라딘이 다가와, 상처 부위를 수차례 내리쳐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주었다.

피와 살점이 튀어 갑옷에 덕지덕지 달라붙으니, 성기사가 아니라 도살자라고 불러도 될 법한 비주얼이 되어간다.

저러다 안에 든 칼까지 같이 깨뜨려 먹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성기사도 그런 생각은 했는지 적당한 순간에 도끼질을 멈추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진 고깃덩어리가 된 근육 사이로 손을 쑤셔 넣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이전보다 수월하게 검이 딸려 나왔다.

“감사합니다.”

“이쯤이야 뭘. 그보다 자네 이야기를 좀 해보시게.”

“나도 궁금하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사실 굉장한 동안이라,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서른은 넘지 않을 것 같은데.”

모여든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보며 떠들어대고 있으니, 정신이 사나워 뭐라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성기사들의 지대한 관심에 알렉스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 지금 이러고 있을 때인가? 어서 다른 기사들을 모아서 회의를 해야 하네!”

중앙 팔라딘들 중 가장 연륜이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사람들을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역시도 알렉스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로, 모자란 형제니 뭐니 운운하며 은근히 알렉스를 돌려 까던 인물이다.

“자르빈 경? 무슨 일이 있습니까?”

“숲에 틀어박혀 조사를 방해하던 놈들이 이렇게 잔뜩 몰려나왔는데, 이게 특별한 일이 아니면 뭐겠는가? 작전을 앞당겨서 당장 오늘이라도 저 안쪽을 확인하도록 해야 할 걸세.”

“바로 말씀이십니까? 이제 위험요소도 사라졌을 텐데, 굳이 그렇게 서둘러야 할지…….”

“지금 최선임의 판단에 토를 달겠다는 건가? 지방으로 내려왔다고 다들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군!”

“아, 아닙니다. 자르빈 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중년 팔라딘이 사나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성을 내자, 다른 이들은 눈을 피하며 다들 고개를 숙였다.

살갑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경직되었다.

‘저 자르빈이란 성기사가 가장 고참인 건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아, 기사단이니 군대가 맞긴 하구나.’

글라즈번에서는 경력을 떠나서 모두 동등한 팔라딘으로 서로의 의견을 묻고 협력하는 동업자란 느낌이었는데, 중앙 쪽은 그보다 일반적인 군대에 더 가까운 분위기인 모양이다.

“그리고 자네. 분명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라고 했을 텐데? 어째서 물러나란 말을 듣지 않았지?”

인상을 굳히며 혀를 차던 자르빈이, 알렉스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어, 저 말입니까?”

“자네가 끼어들지 않아도 저 마수는 우리끼리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네.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이번만은 넘어가겠지만, 또 그렇게 지휘체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자네의 소속구에 엄중히 항의하도록 할 걸세.”

‘오, 시발?’

자르빈의 말에 곁에 있던 팔라딘들 중 몇몇 젊어 보이는 이들이 떫은 얼굴이 되었다.

힘을 합쳐 싸운 동료에게 저런 소리를 해야 하나 싶은 기색이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미안함을 담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본다.

알렉스는 이전에 이사벨이 중앙 관구에 대해, 깐깐하고 불편하다며 흉을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꼰대들이 윗대가리를 차지하고, 아래 친구들을 자기 입맛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소리였군? 하…… 짜증이 확 올라오네.’

어색해진 공기 속에서, 알렉스는 오만한 태도로 자신을 응시하는 자르빈의 시선을 마주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머리를 숙일 것이라 생각했던 알렉스가 오히려 불손한 눈빛을 보내오자, 자르빈의 시선이 살짝 떨린다.

“크흠! 뭔가? 지금 지시에 불복하겠다는 겐가?”

“…….”

알렉스가 대답 없이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허억! 마수들이 또 몰려옵니다!”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시선이 다급히 흩어졌다.

“마수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대체 저 숲에 얼마나 많은 놈들이 몰려 있었기에…… 헛!”

눈을 움직여 누군가 외친 소리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던 기사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숲 밖으로 튀어나오는 마수들의 수는, 한눈에 봐도 지금까지 쓰러뜨린 놈들보다 더 많아 보였다.

백여 마리를 가뿐히 넘어가는 수가 시간을 두고 띄엄띄엄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마치 부대를 이룬 것처럼 뭉텅이로 달려오는 광경이 모두의 시선에 들어온다.

대규모 기사단의 차징을 보는 것처럼 흉흉한 기세에, 사람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오십, 백…… 대체 몇 마리나 튀어나오는 거야?’

“후퇴! 성까지 물러난다!”

이대로 연달아 계속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퇴각 지시가 내려졌다.

기사들이 자신의 말을 찾아 타고 다급히 고삐를 흔들었다.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퍼져 있던 병사들 역시, 사색이 되어 성벽을 향해 뛰었다.

‘이런 썅! 난 말도 없는데!’

부상자와 함께 돌려보낸 늙은 말의 부재가 굉장히 크게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으로 마수들이 달리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것들…….’

도망치던 알렉스는 뒤를 힐끔거리며, 마수들의 부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지금 나타난 놈들은 아까의 마수들과 큰 차이점이 있다.

3미터에 달하는 체고에 검은 털로 몸을 뒤덮은, 영장류의 형태를 한 마수.

백 마리가 훨씬 넘어가는 숫자의 마수 떼가, 전부 동일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침팬지? 생김새는 그런 느낌이긴 한데.’

폴로이스 인근의 숲 지대가 꽤 넓게 우거져 있긴 하지만, 여기가 서부 끝의 대삼림도 아닌데 마수들이 이렇게나 많이 발생한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특히 저렇게 동일한 종의 마수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은 더욱 이상하다.

‘이건 무조건 암흑교와 연관된 일이 맞겠네. 혹시 강제로 마수를 만들어내는 흑마법을 개발한 건가? 케이트리아에서 대삼림의 몬스터를 움직이려 한 것처럼, 마수를 자신들의 병사로 써먹으려고?’

절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며 추론을 했지만, 정확한 것은 숲을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급한 것은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이리 올라타시오!”

열심히 뛰고 있자니, 앞에서 말을 몰고 있던 누군가가 속도를 늦춰 옆으로 다가왔다.

알렉스에게 막타를 빼앗긴 그 팔라딘이었다.

‘처음엔 싸가지 없게 굴더니…… 그래도 마냥 재수 없는 놈은 또 아닌가?’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이렇게 도움을 주려는 걸 보니, 그래도 성격이 파탄 난 인간은 아닌 모양이다.

내밀어진 손을 붙잡은 알렉스가 폴짝 뛰어 팔라딘의 뒤에 올라탔다.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치지르 경이었던가요?”

“치자르요!”

아, 그랬던가.

다른 팔라딘들이 부르던 이름을 대충 기억해냈는데 살짝 틀려 버렸군.

하긴 사람 이름이 어떻게 치질…… 뭐, 언어가 다르니 의미도 다르겠지만.

조금 여유가 생겼다고 실없는 생각들을 떠올리며, 알렉스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팬지 형태의 마수들은 팔이 다리보다 긴 탓에, 달리기에 적합한 몸 구조는 아니라 할 수 있다.

그 탓에 말을 따라잡지 못하고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보다 느릴 뿐이지, 침팬지는 원래도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짐승이다.

“으아악!”

“두, 두고 가지 마!”

‘이거…… 안 좋은데.’

성문과의 거리와 마수 떼의 속도를 가늠해 본 알렉스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이대로는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따라잡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렇게 가다간 성에 들어간 기사들은 살겠지만, 성 밖에 고립된 병사들 몇백 명은 몰살당하게 된다.’

알렉스는 마수들의 수를 다시 헤아려보았다.

대략 150마리에서 크게 잡아도 200마리가 넘지 않는 정도.

더 이상 숲에서 튀어나오는 놈은 없어 보였다.

‘키 3미터가량의 침팬지 마수. 인간보다 크긴 해도 아까 그 곰 마수처럼 압도적인 크기는 아니야. 덩치가 곧 강함과 비례하는 마수들의 성질을 생각하면, 개체의 수준은 일반 기사들과 비슷하겠지.’

앞선 전투로 기사들이 지친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 더 싸울 여력은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진형을 갖추고 대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기사들의 피해가 발생하겠지만, 병사들의 떼죽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편이 옳다고 느껴졌다.

생명의 평등함이니 고귀함이니 하는 건 제쳐두고라도, 어차피 병사를 대거 잃고 나면 기사들만으로 수성하는 것도 어려울 터다.

1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길이의 성벽이지만, 안에 들어간다고 마냥 안전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필 침팬지 형태의 마수라니, 맨손으로도 성벽을 타고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놈들이지 않은가?

마수들이 전부 성벽을 넘어온다면, 기사들만으로 과연 저지할 수 있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도시 전체로 피해가 확산될 수 있어.’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병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지금 이 장소에서 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아군 기사들의 수가 대충 오십쯤 남아 있나? 수가 많이 딸리긴 해도 병사들과 합치면 충분히 싸워볼 만은 하다.’

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버텨주고 있으면 일반 병사들도 어느 정도 저지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저렇게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로,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 있지 않은가.

디바인 크로스.

듀라한들 때처럼 언데드가 상대인 게 아니기에 단숨에 전부 녹여버리는 위력을 보이진 않겠지만, 마수에게도 충분히 강력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일전에 스펙터를 처치하며 레벨을 올린 뒤로, 디바인 크로스에 포인트를 투자해 2레벨을 찍어두기도 했다.

‘어째 이게 꼭 필요해질 것 같은 예감을 느꼈었단 말이지.’

전보다 한층 위력이 강해졌을 테니, 의외로 쉽게 적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장의 패는 가능한 아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힘을 숨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병사들을 구하려면 내가 나서야 한다.’

조금 낯부끄러운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상황을 주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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