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1화
단독 파견(4)
거대한 체구를 가진 전마의 앞발이 알렉스를 덮쳤다.
“이, 이런!”
말로이 가문의 기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작가문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진다.
모시는 주군의 덜 떨어진 아들놈이 저지른 일 중에서, 단연코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사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걱정 어린 그의 시선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이 부딪치면 당연히 나가떨어지는 것은 사람 쪽이어야 한다.
어떤 마법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서야, 아무리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있다고 해도 제자리에 서서 버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상황을 지켜보던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상식이었으나, 지금 이곳에서 그 상식이 산산이 박살나버렸다.
히히힝-
사람이 아니라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없는 알렉스의 옆으로, 앞다리가 부러진 전마가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알렉스가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으니, 충돌의 반동이 고스란히 말에게로 향한 것이다.
“어억!?”
덩달아 간신히 낙마하지 않고 매달려 있던 스캇이 옆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지면과 부딪혔다.
“저, 저게 대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믿기 어려운 광경에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고 굳어 있는 동안.
스킬의 발동을 해제한 알렉스가, 바닥에 쓰러진 스캇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넘어지면서 머리에 충격이 가기라도 했는지, 눈이 풀린 채 의식이 혼미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어이, 정신 좀 차려 보지?”
“끄읏…….”
알렉스가 철판을 덧댄 부츠의 앞면으로 정강이를 걷어차자, 통증을 느낀 스캇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머, 멈추시오!”
알렉스의 행동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던 말로이 가문의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말에서 뛰어내려 달려왔다.
“작은 공자께서 떨어지시오! 부상당한 이를 공격하려 들다니, 어찌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게요!”
“무슨 소리를 하시나? 먼저 공격당한 건 내 쪽이지. 여기 있는 모두가 눈으로 본 사실인데.”
알렉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침을 꿀꺽 삼킨 기사는 눈길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이건 그저 실수였지 않소. 결코 알렉스 경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게 아니란 말이오.”
“실수라? 그런 핑계로 넘어가기엔 굉장히 위협적인 기마 돌격이 아니었나?”
위협을 느꼈다고 하기엔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멀쩡한 모습이라 어이가 없었지만, 잘못을 한 건 사실이라 기사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됐고, 몸값을 내시오.”
“뭐, 뭐요?”
“실수든 뭐든 내가 공격을 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리고 거기에 맞서 내가 그쪽 공자를 사로잡았으니, 당연히 그의 신변에 대한 모든 권리는 내게 귀속되오.”
솔직히 고의로 한 일이 아닌 것쯤은, 알렉스도 봐서 알고 있다.
다만 저 머저리 같은 귀족 자제가 계속 상황을 짜증 나게 만드니, 이참에 트집을 잡아 뭐라도 이득을 챙겨볼까 싶은 마음이었다.
“아, 아니…… 영지전이나 결투를 벌인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고일 뿐인-”
“상황이 이리도 명백한데 계속 내 말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나 역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소만.”
알렉스가 검에 손을 올리자, 기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뒤로 물러났다.
교단의 성기사란 신분을 떠나서, 전마와 충돌하면서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는 괴물 같은 인간과 검을 맞대고 싶진 않았다.
“……사정을 좀 봐주시오. 몸값이라니, 마수와 싸우러 가는 군대가 무슨 돈이 있겠소이까?”
기사의 말에 알렉스는 잠시 망설였다.
딴에는 저 말도 맞긴 하다.
그나마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어치 있는 건 갑옷과 무기 정도일 텐데, 차마 그걸 내놓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신분을 다 밝힌 마당에 그렇게 하기는 좀…….’
중앙 관구의 요청을 받아 움직이는 귀족의 병력을 대상으로, 글라즈번 교구의 성기사가 무구를 강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그것도 조금 곤란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하는 마당에, 물품으로 뭘 받아봐야 처분하기도 난감하고 말이다.
‘쯧. 나선 김에 뭐라도 좀 뜯어낼까 싶었더니.’
호의에는 호의로 양아치를 상대로는 양아치 짓으로 똑같이 대우하려 했는데, 이건 뭐 뜯어먹을 것도 마땅치가 않다.
한숨을 내쉰 알렉스가 못마땅한 심정을 담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냥 구색이나 맞추자는 거잖소. 대충 성의만 보여주고 가시오.”
“으음……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공자님의 개인 자금이 조금 있긴 할 거요.”
퉁명스럽게 내뱉어진 알렉스의 말에, 잠깐 뒤로 빠진 기사가 작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 돌아왔다.
진짜 개털인 건가 생각하며 주머니를 받아든 알렉스는, 크기에 비해 의외로 묵직한 무게감에 살짝 놀라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거 다 금화잖아? 나 참, 돈이 없다고 하더니…… 이 정도면 평민 가족 1년 치 생활비는 되겠군.’
저 머저리는 알렉스에게 동화 한 푼의 가치도 느끼기 어려운 인간이었지만, 그런 그도 귀족의 핏줄이니만큼 이 정도 자금은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평민들에겐 이 정도도 거금일 텐데, 이조차도 돈이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며 내민 금액이란 점이 꽤나 우습다.
귀족들의 부가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평민들의 생활 수준이 바닥을 긴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묵직한 주머니를 챙기며 그래도 용돈벌이는 했다고 위안 삼은 알렉스는, 기사를 향해 손을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떠나시오.”
“알렉스 경! 우리 공자님의 치료를 부탁드리오. 낙마의 충격에 정신을 잃으셨지 않소.”
“단순한 기절일 뿐인데 치료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미쳤냐?
뭐가 예쁘다고 저딴 놈에게 신성력을 낭비해?
“이런…… 그러면 적어도 예정대로 마을에서 쉴 수 있게라도 해주시오. 이대로 쫓아내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요!”
“노숙을 하든 야간행군을 하든 그건 그쪽 사정이고, 괜히 더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당장 떠나란 말입니다.”
“크윽…….”
“아, 그쪽 일행인 기사도 같이 데리고 가시오. 조금 시비가 붙어서 저 안쪽에 잠시 재워두었소.”
“허, 허허…….”
뭐라고 떠들든 이미 한번 분란을 터뜨린 이들을 마을에 둘 생각은 없었다.
성질 더러운 귀족 놈을 안에 들여놓으면,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할까 봐 불안해서 편히 잠들기나 하겠는가?
힘으로 남을 핍박하는 이들은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꼬리를 말 수밖에 없는 법.
한숨을 푹푹 내쉬던 기사는 결국 쓰러진 이들을 챙긴 후, 병사들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되돌아나갔다.
한낮의 소란은 결과적으로 알렉스에게 금화 한 움큼이 담긴 주머니를 남기고 끝을 맞이했다.
흐히힝…….
‘아, 다리가 작살난 말도 하나 생겼네.’
알렉스는 앞다리가 부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구슬프게 우는 전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쓰러진 말까지 챙겨갈 정신이 없었는지 그냥 버려진 녀석이라, 이제는 줍는 사람이 임자가 아닐까 싶다.
“고놈 잘생겼네. 너 내꺼 할래?”
히힝?
“형이 고쳐줄 테니까, 같이 다…… 이런?”
전마의 상처를 살핀 알렉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부러진 뼈가 근육을 찢고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이건 자신의 치유 능력으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외과적인 수술로 뼈를 맞추고, 그다음에 신성력을 죄다 쏟아부어야 치료가 될까 말까 싶은데.’
사제 클래스의 상위 스킬이면 모를까, 성기사의 치유의 손길 정도로 바로 회복시키는 건 무리라 판단이 되었다.
젊고 튼튼해 보이는 녀석이라 잘 고쳐서 갈아타면 어떨까 싶었는데.
‘운이 별로 안 따라주네.’
아무래도 한동안은 계속 늙은 말과 함께 다녀야 할 팔자인 듯싶다.
물기 어린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며, 알렉스는 안타까운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조금 살살 박지 그랬냐. 잘하면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었는데.”
프르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녀석은 눈을 끔벅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다친 말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이날 저녁.
촌장의 집에는 고기가 가득한 호화로운 만찬이 차려졌다.
* * *
사소한 사건이 있긴 했었지만, 이후로 알렉스는 별 탈 없이 여정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하여 글라즈번에서 출발한 지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
알렉스는 목적지인 폴로이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쯤 늦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 녀석이 제법 애써줬네.’
콧김을 푹푹 뿜으며 헐떡거리는 전마를 몇 차례 쓰다듬어 준 알렉스는, 성문을 지키던 병사의 안내에 따라 지휘소로 이동했다.
폴로이스 내부의 분위기는 꽤나 을씨년스러웠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불안함이 깃든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병사들은 피로가 극한까지 쌓였는지 다들 반쯤 죽은 눈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다닌다.
순간 도시 안에 언데드가 나타난 줄 알고 검을 뽑을 뻔했다.
‘상황이 꽤 심각한가 보네.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돈데?’
부정적인 느낌이 가득 들어찬 도시 안을 가로질러, 알렉스는 중무장한 기사들이 어수선하게 모여 있는 지휘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지각색의 문양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의 기존 수비군으로 짐작되는, 동일한 문장의 서코트를 걸친 기사들.
거기에 주변 영지의 귀족들이 출병시킨 것으로 보이는, 제각각의 차림을 한 기사들도 있다.
아마 알렉스처럼 다른 교구에서 파견을 나온 성기사도 군데군데 섞여 있을 것이다.
누구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가 싶어 둘러보고 있자니, 기사들 사이에서도 꽤 도드라져 보이는 하나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교단의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을 입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기사들.
아마도 저들이 중앙 관구에서 나왔다는 성기사들인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중앙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알렉스가 다가가 묻자, 성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쪽은?”
“글라즈번 교구에서 파견을 나온 알렉스입니-”
“쯧! 애송이가 하나 늘었군.”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성기사들 중 하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기껏 도움을 주기 위해 먼 곳에서 달려왔더니, 지원이라고 내놓는 인력들이 하나같이 풋내 나는 이들뿐이라니.”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듯이 흘겨보며 내뱉는 말에, 알렉스는 인사를 끝마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뭐야? 왜 보자마자 시비를 털지?’
“알렉스 경이라고 했나? 여러 소속이 뒤섞여 난잡하긴 하지만 지휘권은 우리에게 있으니, 앞으로의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지시를 잘 따라주길 바라네.”
약간 당황해서 서 있자니, 성기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만 가보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임무에 대한 설명이라던가 그런 건 없습니까?”
알렉스의 말에 조금 전 불만을 터뜨렸던 성기사가, 피식하고 비웃음이 분명한 표정을 짓는다.
“큭, 시키는 일이나 잘하면 다행이지 무슨…….”
“어허, 치자르 경. 교단의 형제들끼리 예의를 좀 차리게.”
“흥. 지방의 잡부들을 형제로 여기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이자들이 제 소임을 다했다면 저희가 이런 수고를 감수할 일도 없었을 텐데요.”
“모자란 동생도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 맏형의 의무일세. 그렇게 일일이 트집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하, 이게 무슨 지랄들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알렉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애송이라 부르며 대놓고 무시하는 인간이나, 말리는 것처럼 하면서 은근히 이쪽을 모자란 놈 취급하는 중년이나,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알렉스 경. 우리가 하나하나 다 짚어줄 수는 없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도록 하게나. 내일부터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행될 예정이니 소집에 늦지 않도록 하고.”
“흠. 알겠습니다.”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에, 알렉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휙 돌렸다.
이쪽도 푸대접을 받아가며 이들을 더 붙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일단은 잠시 물러서서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해봐야 할 듯싶었다.
‘중앙의 팔라딘이 콧대가 높다고 하더니…… 원래부터 태도들이 저 모양인 건가?’
주도권을 쥐겠다고 일부러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기분이 꽤 언짢았다.
‘얼마나 잘난 놈들인지 어디 한번 보자고.’
알렉스가 조금 전의 대우를 마음속에 담아두며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성벽 쪽에서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점점 소란이 번지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남동 구역에 마수 떼의 출현입니다!”
“뭣!? 놈들이 기어코 이곳까지 기어 나왔단 말이냐!”
지휘소로 달려온 병사의 보고에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흐음…….’
어째 실력을 비교해 볼 기회가 빨리 찾아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