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50화
단독 파견(3)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헤쳐오며 감각이 단련된 덕분일까?
요즘은 싸울 일이 생기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위험을 인지하고, 전투를 위해 최적화된 적당한 긴장상태로 들어서게 된다.
한데 바로 눈앞에서 칼을 뽑고 다가오는 기사가 있음에도, 근육에 딱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쯤은 위기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알렉스의 실력이 높아진 것이다.
상대의 시선, 검을 뽑는 자세, 다가오는 걸음걸이.
짧은 순간 야생의 짐승처럼 예민해진 감각으로 기사의 움직임을 캐치한 알렉스는, 그의 수준이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했다.
‘평기사…… 중에서도 최하위 정도인가.’
시동을 거쳐 종자, 종자에서 견습 기사.
그렇게 순서를 거치며 견습에서 평기사의 지위로 올라가게 되지만, 사실 평기사 중에서 바닥구간은 견습만도 못한 실력을 가진 이가 꽤 있다.
기사 작위를 받은 뒤로 거들먹거리기만 하며 단련을 게을리한 채 나이를 먹은 이들.
근육이 물렁해지고 배에 기름이 끼면, 당연히 쌓아둔 실력도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특히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애매한 규모의 귀족가 자제들 중에 그런 이들이 수두룩하다.
앞에 있는 상대가 바로 딱 그런 느낌이었다.
미천한 평민이 어쩌고 지껄인 것을 봐서는, 어디 귀족가의 차남이나 삼남쯤 되는 인물이지 않을까.
‘이크!’
어깨를 내려치는 검을 한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피해내며, 알렉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지우고 전투에 집중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자라는 걸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방심하는 자세로 전투에 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놈이 내 검을 피해!? 감히 기사를 능멸한 죄로 네놈의 양팔과 혓바닥을 잘라내겠다!”
“허어?”
진지하게 하는 소리인가 싶어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두 번의 칼질이 더 이어졌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터진 공격이었다.
가볍게 몸을 돌려가며 검을 피한 알렉스는, 이내 땅을 박차며 상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사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쉽게 거리를 내어줬다.
‘이건 뭐, 검을 뽑을 가치도 없군.’
검을 쥔 상대의 손목을 붙잡은 알렉스는, 곧바로 전신에 힘을 주며 몸을 빠르게 비틀었다.
팔을 잡아당기고 다리를 걸며, 허리와 어깨를 튕긴다.
기사의 몸이 잠시 허공에 떠올랐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꺽!?”
근력과 중력의 합작으로 인해 내동댕이쳐진 기사가 외마디 비명을 내뱉었다.
재빨리 기사의 상체를 내리누르며 마운트 자세를 취한 알렉스는, 곧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한 기사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린 것이다.
“뭐야? 고작 이 정도로 정신을 잃었다고?”
괜히 목이 부러져 죽을까 봐 일부러 머리가 아닌 등부터 떨어지게 조절했는데, 일어나지 못하게 제압하려고 했더니 설마 바로 기절해 버리다니.
‘아니 무슨, 이딴 놈도 기사랍시고…… 하, 어이가 없네.’
허탈해진 알렉스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꼭 어린애와 싸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났던 감정조차 팍 사그라진다.
이 작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알렉스는, 문득 그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귀하신 분이 어쩌고 떠들었지. 모시는 귀족이 함께 온 건가?’
기사의 수준을 봐서는 그리 대단한 귀족일 리는 없겠지만, 이대로는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
기분이 상해 힘을 쓰긴 했지만, 너무 일이 커져서는 곤란하다.
방으로 돌아가 기절한 기사를 침대 위에 던져둔 알렉스는, 갑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촌장의 집을 나섰다.
무장을 제대로 갖춰야 누굴 만나든지 외형을 보고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바깥으로 나오자 저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에 탄 인원이 둘에, 대략 30명쯤 되어 보이는 병사들.
‘음? 여행 나온 귀족이라도 들른 건가 싶었더니,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병사들을 왜 끌고 다니는 거지?’
아무리 귀족이라도 평상시에 몇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다니진 않는다.
저만한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어디선가 전투를 벌일 목적이거나 그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일 터.
서둘러 걸음을 옮겨 거리를 점점 좁히자,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네까짓 놈들이 귀족의 행사를 방해하겠다는 것이냐!”
“아이고, 나리!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촌장과, 그 뒤에 불안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너희 버러지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 영지의 군대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이거늘, 추잡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내 말을 거스르려 들어?”
“제발……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조만간 배곯는 이들이 나오게 됩니다요.”
잠깐 지켜보던 알렉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근처에 영지를 둔 귀족이 병사들을 이끌고, 알렉스처럼 마수출몰 사태에 힘을 보태기 위해 폴로이스로 향하던 중인 모양이다.
‘하긴 교구뿐 아니라 주변 귀족들에게도 협력을 요청했겠지. 따지고 보면 자신들 영지의 일인데 당연히 병력을 보내야 할 테고.’
그냥 그렇게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끝날 일이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들어보니 군수품을 징발한다며 짐마차를 통째로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징발이지 그냥 강도질과 다를 바가 없다.
‘허허, 양아치 새끼들이 따로 없네. 분명 행상과 촌장이 거래하던 중이었는데…… 상인은 어디로 갔지?’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알렉스의 얼굴이 굳었다.
칼에 맞았는지 팔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고개를 박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인의 모습을 발견한 탓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알렉스는 촌장 쪽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기사님…….”
“서 해밀튼? 무…… 어엇!?”
“헛! 해밀튼 경이 아니구나! 네놈은 누구냐!”
귀족 측의 무리에서 소란이 일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것을 대충 보고, 알렉스를 아까 그 기사로 착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가까이 붙고 나서야 복장이 조금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뒤늦게 부랴부랴 경계심을 드러낸다.
“해밀튼 경은 어디로 가고…….”
“정체를 밝히시오!”
“글라즈번 교구 소속의 팔라딘 알렉스요. 그대들은 누구인데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알렉스가 대답하자, 무기를 겨누고 있던 병사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팔라딘!”
“신전의 기사…….”
기사의 가치는 개인의 무력에 달려있지만, 어떤 주군의 휘하에 있는가 하는 외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한다.
실력이 비슷해도 남작의 기사보다는 백작의 기사가 더 입김이 강하기 마련.
그런 면에서 국가조차 눈치를 봐야할 정도의 세력을 갖춘 교단을 뒷배로 두고 있는 성기사들은, 기사들 중에선 가장 끗발이 높은 신분이라 할 수 있다.
“크흠! 행패라니, 말이 조금 그렇군. 알렉스 경이라 했소?”
말을 탄 두 사람 중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둘 다 기사로 보이는 무장을 하고 있지만 나선 쪽의 차림새가 더 화려한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그가 이들을 이끄는 귀족인 듯했다.
“본인은 이 땅의 통치자이신 아나트리사 백작님의-”
아, 백작가문인가? 그러면 좀 어려운 상대인데.
“-충실한 가신이자 영지 전반의 관리를 맡은 대리자, 말로이 자작가의 혈손인 스캇 말로이라 하오.”
말이 길어서 잠시 헷갈려 했던 알렉스는, 이내 맥락을 파악하고 살짝 긴장하던 마음을 풀었다.
그러니까 그냥 자작 아들이란 소리잖아.
“말로이 자작님의 장남되시는지?”
“……커흠! 차남이오.”
심지어 장남도 아니고 차남이다.
귀족가의 승계권한은 오로지 장남에게만 해당된다.
후계자가 사고를 당해 귀족의 의무를 다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나, 차남 이하의 아들들에게 권한이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귀족의 자식이니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긴 하지만, 공후백자남으로 분류되는 오등작의 작위를 이어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작위 귀족도 아닌 인간이 이런 행패를 부리는 거냐.’
현대보다 더 갑질이 판을 치는 엿 같은 세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마주하니 참 기가 찼다.
“거기 상인분은 왜 다친 겁니까?”
“흥! 감히 차후에 보상을 해주겠다는 본인의 말을 의심하고, 증서를 남겨달라고 지껄이더군. 그나마 내가 자비를 보여 당장 목을 날리진 않았소.”
그럼 재산을 다 털어 가는데 그런 요청도 못하나?
하지만 놀랍게도 저 스캇이라는 인간은, 정말 자신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혀를 내두른 알렉스는 다친 팔을 붙들고 있는 상인에게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대었다.
[치유의 손길]
5레벨의 스킬이라 이제는 제법 내뿜는 빛도 밝아져,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대단한 기적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허엇!”
“오오…… 진짜 성기사야.”
“신의 기적이다…….”
기적이라 하기는 민망하지만, 사실 일반인에게는 찰과상 정도만 치료해도 굉장한 능력처럼 보이긴 할 것이다.
성스러운 힘이 피를 멎고 상처를 아물게 만들어주었다.
흉터가 조금 남긴 했지만 새살로 뒤덮인 팔을 만지작거리던 상인은, 경외감에 몸을 떨며 알렉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신성한 분이시여!”
찬양을 읊는 상인을 뒤로하고, 알렉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캇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건 올바르지 못한 행위입니다. 설마 귀족씩이나 되시는 분이 당장 병사들에게 먹일 군량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요?”
“이런…… 우리 가문은 이 마을에 대한 적법한 조세권을 가지고 있소!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필요한 물자를 징발할 수 있단 소리요!”
“아니. 그건 말포이…… 아니, 말로이였나? 아무튼, 자작이 직접 나서거나 그의 대리인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요. 당신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는 것 같진 않군.”
“뭐, 뭐라?”
“게다가 부당한 이유로 사람을 상하게 만든 것 역시 묵과할 수 없소. 더 긴말은 안할 테니 당장 병사들을 데리고 떠나시오.”
“이, 이잇! 교단의 성기사가 어찌 이런 식으로 귀족을 핍박한단 말인가!”
법률을 따지자면 알렉스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타인에게 자격까지 거론하며 방해받아본 일이 없었던 스캇은, 그의 말을 곱게 수긍하고 싶지가 않았다.
“작은 공자님. 저희는 지금 교단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움직이고 있는 중입니다. 아쉬우시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양보를 하심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스캇을 보며, 옆에 있던 기사가 난처한 표정이 되어 그를 말리려 들었다.
교단의 위세는 일개 자작가 따위가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괜히 이런 일로 문제를 일으키느니,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분쟁을 피하는 편이 옳다.
“아무리 교단의 성기사라지만 내가 이리 모욕을 받고 참아야 하는가!”
“예. 참으셔야 합니다. 설령 자작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 해도, 팔라딘을 적대하는 건 피하셨을 겁니다.”
“으윽…….”
잠시 씩씩거리던 스캇은 결국 기사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저깟 평민들이 뭐라고…….”
잠시 짜증을 부리던 스캇은 이내 말머리를 돌리고자 신경질적으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한데, 거기서 약간의 사고가 생겼다.
갑작스럽게 가해진 힘에 깜짝 놀란 스캇의 전마가, 다리를 들어 올리며 펄쩍 뛰어오른 것이다.
“으억! 이 말 새끼가 미쳤나!?”
말은 기수의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물이다.
그렇지 않아도 스캇이 위에서 잔뜩 열을 올린 탓에, 전마 역시도 살짝 흥분해 있던 상태.
거기에 과도한 힘으로 거칠게 고삐를 잡아채어 통증을 느끼게 했으니, 평상시처럼 순순히 통제가 될 리가 없었다.
당황한 스캇이 고삐에 힘을 주고 매달렸지만, 그런 행동은 말의 고통을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몸부림치며 난리를 피우던 전마가 결국 제어를 벗어나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으아악!”
“피, 피해!”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바로 정면에서 소란을 지켜보던 알렉스는, 인상을 쓰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겠으나, 그럼 뒤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게 될 것이다.
괜한 부상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달려드는 말을 이 자리에서 막아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