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49화
단독 파견(2)
여정을 떠난 지 일주일째.
알렉스는 폴로이스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한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 한낮이라 휴식을 취할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말의 상태가 어째 좋지 않아 보여 어쩔 수 없이 마을에 들려야 했다.
혼자서 가본 적 없는 먼 길을 가느라 조급한 마음에 이동을 서둘렀더니, 늙은 말의 컨디션에 악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이래서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는 사는 게 아닌데.’
사실 산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거지만.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어느 기사의 유산인 노마의 목을 두드리며, 알렉스는 옆에 있던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을 잘 봐주시는 분 없습니까?”
“어이쿠, 기사님. 말씀 낮추시지요.”
“아, 뭐. 이 정도가 저는 편해서.”
“허흠, 그러십니까? 말은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성이 굽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 마을의 촌장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그의 집에서 묵고 가라는 제안을 받아 함께 있던 차였다.
기사들 중에는 성격이 더럽고 순 깡패나 다름없는 놈들도 많았기에, 촌장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워낙 작은 마을이라 전문적인 여관도 없었기에, 알렉스는 그나마 가장 괜찮은 집에서 살고 있는 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흐음. 여행을 하신 지 오래되신 겁니까? 말이 상당히 지친 것 같군요. 그래도 조금 쉬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말의 입을 열어 잇몸을 살피고 다리의 근육을 만지작거리던 촌장은, 이내 휴식만 취하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병에 걸리거나 한 건 아닙니까?”
“딱히 그런 증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가 꽤 많은 녀석 같은데, 노쇠한 탓에 자연적으로 체력이 떨어졌을 겁니다.”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나이의 문제였나.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퍼져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알렉스는 노마의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나이가 많은 만큼 경험도 많아서인지 눈치가 빠르고 태도가 뚜렷해 관리하기는 편한 녀석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교구에서 다른 말이라도 빌려서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질 좋은 먹이를 주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청소된 방에 짐을 풀어두고, 알렉스는 잠시 마을을 둘러볼 겸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니, 뭐라도 해서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고 싶다.
‘이쪽 세계는 어딜 좀 가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된단 말이지.’
도처에 위험이 깔려 있고 이동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평생을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벗어나 보지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각 지역의 대도시들에는 마탑에서 운영하는 공간이동 마법시설이 있다는 모양이긴 한데, 비용도 비용이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알렉스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교단에서 협조 요청을 한다면 거부하지 않고 시설을 개방해 주겠지만, 알렉스의 임무에 그 정도까지의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중앙 팔라딘들이 폴로이스에 도착해 준비를 마치고 있을 거라 했으니, 그쪽은 다들 마법으로 편하게 이동했겠네.’
중앙 관구 지역에서 이곳까지 육로로 이동하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거리이니, 남서 관구의 소란을 빨리 진압하려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래도 왠지 대우에서 밀리는 듯한 기분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같은 관구 단위라 해도 권위의 차이가 꽤 난다고 했었지. 설마 기를 잡겠다고 나를 막 무시하거나 시비를 걸진 않겠지?’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려나.
잠깐 생각에 잠겨 있자니, 촌장이 후다닥 뛰어와 곁에 섰다.
“기사님.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마을이나 구경할까 하고.”
“아! 그러시군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실 일도 많으실 텐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아, 아닙니다. 기사님을 모시는 일보다 중요한 건 없습죠.”
기사는 준귀족이라 할 수 있는 신분이고 강한 무력을 갖춘 존재이기에 평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혹시 마을에서 무슨 사고가 생기진 않을지 걱정하는 눈치라, 알렉스는 더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오, 양을 꽤 많이 키우네요.”
“지세가 험해 농사지을 땅을 개간하기 쉽지 않다 보니, 목축업이 저희 마을의 기반사업이 되었습니다. 도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양털과 양젖을 팔아 근근이 벌어먹고 있습죠.”
“그렇군요. 음…….”
촌장의 말에 잠시 임무에 대해 떠올려본 알렉스는 질문 하나를 건넸다.
목적지인 폴로이스와 이삼 일가량 거리에 접어들었으니, 촌장에게 뭔가 얻을 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폴로이스 쪽의 소식에 대해 좀 아십니까?”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요즘 그쪽 지역에 마수들이 떼로 몰려나온다고 해서, 상인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습니다요. 그 때문에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폴로이스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설마 지금 도시 진입이 불가능한 상황이란 말입니까?”
“엇, 그런 소리는 아닙니다. 적어도 저희 마을과 폴로이스 사이에서 마수가 출몰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죠. 그저 들려오는 소문이 삭막하니 대부분의 상인들이 겁을 먹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지요.”
촌장의 말에 알렉스는 경직됐던 얼굴을 풀었다.
설마 여기까지 오는 일주일 사이에 길이 막혀 버린 건가 싶어서 큰일 난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주변 마을까지 여파를 끼치는 걸 보면 서두르긴 해야겠군. 상황이 심각하다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토벌을 실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최대한 쉬지 않고 움직인 건데도 괜히 늦었다고 한 소리를 듣게 될까 걱정스럽다.
촌장을 따라 둘러본 마을은 역시나 규모가 작아 그리 구경할 것은 더 없었다.
간간이 마주친 주민들은 괜히 말을 걸까 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알렉스를 피해 다녔고, 어린아이들만이 멀찍이 서서 빛나는 눈으로 허리춤의 검을 바라보았다.
마을 내에서 무장을 하고 다닐 이유는 없어 갑옷과 방패는 방에 두고 검만 차고 있는데, 칼은 가진 것만으로도 이런 마을의 꼬마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다들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니, 계속 돌아다니는 것도 미안해지네. 어차피 더 볼 것도 없을 테고.’
병사나 용병 같은 전사계급의 인간들은 대부분 성정이 거칠기 마련이고, 기사는 그런 인간들 중에 정점에 있는 존재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기사가 날뛰면 그야말로 재난이라 할 수 있으니, 다들 두려움을 품고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 당연했다.
구경을 마친 알렉스가 막 촌장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마을 입구 어귀로 커다란 짐마차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알렉스의 눈에 들어왔다.
“오오! 행상인이 왔군요! 그렇지 않아도 비축해 둔 식량이 부족해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알렉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촌장이 뒤늦게 짐마차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막 달려 나가려던 촌장이 멈칫하더니 알렉스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기사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상인과의 거래를 주관해야 하기 때문에…….”
“아, 가보셔도 됩니다. 저도 돌아가서 쉬고 있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상인들의 왕래가 줄어들어, 수확해둔 양털도 아직 다 처분하지 못해 곤란하던 참이었습죠.”
“하긴 그렇겠네요.”
“쉬고 계시면 거래를 끝내고 얼른 돌아가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니 천천히 하세요.”
겨울이 지나 날이 따스해진 지금 시기가, 행상인들이 활발히 돌아다닐 때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일이 터져 상인들의 발길이 끊겼으니, 생계가 위협받은 마을 주민들에겐 꽤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로렝스 씨 아닌가! 마침 잘 와주었네.”
“이거 다들 위험하다고 떠들어대서 상행루트를 바꿔야 하나 계속 고민했었는데, 촌장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어쩔 수 없이 왔소이다.”
“허허! 사람 참. 아무튼, 잘 와주었네.”
후덕한 인상의 상인과 안면이 제법 있는 모양인지, 촌장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맞이했다.
“폴로이스까지는 갈 수도 없으니 여기서 거래를 마치고 다른 도시로 옮겨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오고 가며 남는 것도 거의 없다는 거 촌장님도 잘 아실 거외다.”
“에헤이! 내가 어련히 잘 신경 써줄 텐데 그러나? 어서 상품이나 보여주시게. 뭘 가져왔나?”
“매번 곡물이지 뭐 다를 게 있겠소이까? 밀과 보리하고…… 이번에는 귀리가 조금 많수다.”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알렉스는, 이내 촌장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다지 신기한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아니니, 거래하는 것까지 구경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딱히 할 일도 없어, 벗어둔 무구들을 손질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사벨의 갑옷처럼 복원기능이 있는 성유물이라면 굳이 관리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성유물의 지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다른 팔라딘들은 그리 대단한 장비들을 가지고 있지 않던데.’
정식 팔라딘이 되면 기본적으로 성유물을 최소 한 개씩은 교단에서 지원해 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사벨의 전신갑주와 다르게, 글라즈번 교구에서 만난 다른 팔라딘들의 무장은 대체로 평범해 보였다.
그나마 테론의 갈라지는 검이 신기하긴 하지만, 그건 별로 가지고 싶지도 않고 자신에겐 효용성도 없는 물건이다.
‘평범한 무구는 튼튼하다고 해도 결국 소모품이니, 나도 자동으로 복구가 되는 장비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사벨의 것처럼 풀 플레이트 세트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안되면 방패나 칼이라도 괜찮다.
그렇지 않아도 매번 큰 전투가 있을 때마다 꼭 하나씩은 무구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자신이 쓸 수 있는 성유물 무구에 대한 욕심이 요즘 들어 마음을 간질이고 있다.
‘이번 임무만 끝내고 돌아가면 서임식을 열어준다고 했으니, 그때 가서 자세히 물어봐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촌장이 거래를 마치고 돌아온 건가 싶어 나가본 알렉스는, 웬 무장한 남자가 집안을 성큼성큼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으응?’
완전한 풀 플레이트 세트는 아니지만, 판금으로 된 방어구를 입고, 허리춤에 검을 매달고 있는 남자.
자신과 같은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런 작은 마을에 기사가 또? 아, 혹시 나처럼 다른 교구에서 폴라이스로 향하는 성기사인가?’
어쩌면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겠구나 싶어 막, 말을 걸려던 순간.
알렉스를 발견한 기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촌장의 아들인가? 방을 비우고 깨끗하게 청소해 두도록 하라. 귀하신 분께서 곧 머무실 예정이니.”
예상치 못한 하대와 명령에 알렉스가 잠시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기사는 인상을 팍 구기며 알렉스를 향해 다가왔다.
“무지렁이 놈이라 말귀를 알아 처먹는 것도 느리군. 매를 맞고 나서야 움직일 셈이더냐?”
초면에 무슨 지랄인가 싶어 멍하니 서 있던 알렉스는, 이내 자신이 갑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마을의 주민으로 여겨지고 있는 건가. 하아, 기사란 족속들의 태도가 이러니 사람들이 죄다 똥을 보듯 피하지.’
하기야 인간이란 어느 세상에서나 조금만 힘을 가지면, 남을 우습게 여기고 권위적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긴 하겠지만, 그런 성질이야말로 인간에 본질에 더욱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렉스가 가라앉은 눈으로 기사를 빤히 응시하자, 상대는 자신이 무시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이를 드러냈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방만한 태도를 보이는 게냐!”
“그야 말을 안 해주면 모르지. 어느 안전이신데? 어디 통성명이나 해봅시다.”
“뭐, 뭣!? 이런 미천한 평민 놈이!”
기사의 손이 허리에 맨 검으로 향했다.
알렉스는 차가워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 잘하시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검을 뽑을 건가?”
태연한 말투에 기사의 손이 멈칫거린다.
이내 그의 시선이 알렉스의 전신을 훑었다.
설마 의외로 신분이 높은 건가 싶어 살펴본 것이지만, 태생이 대장장이의 아들인 알렉스는 당연히 귀티나게 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체격이 탄탄하고 검을 찬 것에 혹시나 기사인가 하는 생각도 떠올렸지만, 이내 그 가능성도 지워 버렸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알렉스의 외형은 누가 봐도 어린 청년의 모습이고, 아이 때부터 정식으로 훈련받은 귀족이 아닌 바에야 저 나이에 기사급의 신분을 갖기는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결론을 내린 기사가 살기로 눈을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 검을 가졌다고 뵈는 게 없어졌나? 어디 용병 놈들에게서 같잖은 검술이라도 배운 모양이지?”
결국, 뽑혀 나오게 된 기사의 검이 날카로운 예기를 흩뿌렸다.
하는 짓이 영 거슬려서 예의를 차리지 않고 대했는데, 꼴을 보아하니 정말 칼질을 해댈 모양이다.
‘맨몸에 칼 한 자루로 기사와 전투라. 지금이라도 신분을 밝히고 좋게 넘어가야 하나?’
괜한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지만 어째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인간이 같은 기사라는 것이 기분이 언짢아져서일까?
알렉스는 짧게 혀를 차고는 검자루를 손에 쥐었다.
무장 상태만 보면 분명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질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