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48화
단독 파견
시간이 지나자 주민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제단 말입니까? 신전의 사제님들께 이렇게 하라고 배웠는데…….”
“그게 언제냐면…… 어어? 이상하다. 기,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마을이 위험해지는 순간이 올 때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줄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 으윽, 누구였지?”
단체로 말을 맞춰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 정말로 제대로 된 기억은 가진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제들을 타락시키고 성기사들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이런 수작들을 부려놓은 건가.”
“조사를 위해 파견 나온 성기사들을 해한 후에, 주민들까지 처리하고 떠날 생각이었겠군.”
“이렇게 평상시 임무 이상의 과전력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요.”
“그야말로 신의 보살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구의 영역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일단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떤 사악한 영향의 흔적이 나타나진 않아 보이니, 이대로 복귀하기로 하세나.”
논의를 나누던 성기사들은 일단 주민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알렉스의 입장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글라즈번으로 돌아오는 길.
알렉스는 팔라딘이라는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성기사의 스킬을 배울 수 있으니 마냥 교단에 몸담고 살아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자신은 다른 성기사들처럼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교단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니다.
만약 주민들을 전부 처형해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다면, 과연 그 결정에 따를 수 있었을까?
이제 슬슬 이곳 세상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적대적인 상대와 싸워 피를 보는 것은 두렵지 않다.
이곳에 오며 도적 떼를 죽이게 될 때도, 불쌍하니까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과 도적 떼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교단의 정의에 따르기 위해, 그저 이용당했을 뿐인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부 죽이라고 한다면?
과연 쉽게 그리 할 수 있을까?
‘내가 교단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걸까.’
완전하고 무결한 하나뿐인 종교라는 정체성에 흠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을 앞에 둔다면, 교단은 누구보다 잔혹한 학살 행위를 저지르는 살인마 집단이 될 수 있다.
교단은 결코 자애와 봉사를 최우선으로 삼는 단체가 아니다.
스스로를 유일한 정의라 여기는 집단인 만큼, 그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기 위해 인간성조차 버릴 수 있는 이들.
광신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확실하게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적이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애매한 상황에 부딪힌다면…… 끄응.’
그렇다고 이제는 불편하다고 교단을 떠날 수도 없다.
영예로운 팔라딘의 자리에 어울리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정식 서임만 뒤로 미루고 있을 뿐.
이미 글라즈번 교구에서는 알렉스를 팔라딘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면 교단에서 과연 곱게 보내주겠는가?
‘괜히 신앙을 의심받으면 곤란하다. 교단은 배교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니까.’
깊어지는 고민 끝에, 알렉스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무슨 열혈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회의감을 느낀다고 교단과 척을 질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죽여 가며 교단의 부품으로 살고 싶지도 않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어느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면 해결이 된다.
‘교단에서 누구의 지시에도 강제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으려면... 아마 관구장급 정도의 인물이라도 쉽게 대할 수 없는 힘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다.
관구장이라면 교황과 두 명의 추기경들이 각자 맡고 있는, 교단 내 최고위직의 자리.
그만한 인사들조차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몸 바쳐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목표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세상에서는 단순히 개인의 무력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레벨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이쪽 세계에선 전설적인 영웅이나 신화 속 주인공과 다름없는 힘을 갖출 수가 있지 않은가.
‘레벨을 더 올려야 해.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 감당하기 어려운 몬스터가 나타나거나 하면, 교단에 도움을 청하곤 한다던데. 그런 쪽 임무가 있으면 좀 끼워달라고 말해봐야 하나? 하아-’
강해지려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것도 쉽지는 않은 선택이다.
미래에 대한 여러 고민들을 하며, 알렉스는 일행들과 함께 글라즈번 교구로 복귀했다.
* * *
소속지로 돌아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전하고 난 하루 뒤.
대기 중인 전 팔라딘들을 대상으로 소집령이 내려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이교의 세력이 이렇게 많이 퍼져 있었다니…….”
돌아온 글라즈번의 분위기는 흡사 장례식장처럼 무거웠고, 돌로메스의 일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알렉스 일행처럼 가벼운 임무라 생각하고 떠났다가, 소식이 끊긴 팔라딘이 여럿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것은 글라즈번 교구만의 일이 아니었다.
남서관구의 전역에 걸쳐, 이교와 관련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편하게 일을 해온 모양이군.”
단장 프리츠가 회의장에 모인 팔라딘들을 둘러보며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숨어 있던 이교도들을 제때 색출하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놈들의 세력이 이렇게까지 커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남서부의 다른 교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프리츠는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기에 진압이 되었던 케이트리아의 사건은 여러 불씨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와 비슷한 거대한 음모들이 교단의 눈을 피해 남서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겨울이 지나며 굳어 있던 사람들의 왕래가 풀리자 하나둘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우리 쪽은 준수한 편이더군. 알아보니 이미 폐쇄된 도시만 몇 군데에, 아예 교구 하나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지역도 있는 모양이야.”
“그럴 수가…….”
“사악한 종자들이 그렇게나 활개를 치고 다닌다니!?”
굳은 얼굴로 탄식하는 단원들을 바라보며, 프리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건 전부 우리의 안일함이 불러온 사고다. 이교도들이 음지에 숨어 세력을 키우는 동안, 우리는 평화에 익숙해져 나태한 시간을 보내왔다. 지독하고 끈질긴 이교 놈들의 성정을 잊고 있었던 거지.”
성기사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프리츠는 남서부 곳곳에서 발생한 소란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 관구의 팔라딘들이 파견을 나와 투입될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
교단에서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전력을 다해 문제를 수습하려 나서는 것이다.
“물론, 우리 손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해결해야겠지. 이 사태가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앞으로 우리에게 휴식이란 없다. 곧 모두에게 임무가 편성될 터이니,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준비하도록.”
프리츠의 지시전달 이후.
회의실을 나선 알렉스에게 따로 호출이 들어왔다.
“그래, 이번에도 꽤 활약한 모양이더군. 길레인의 보고서에 칭찬이 가득하던데.”
“운이 따른 거지요. 어느 한 사람이라도 부족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겸손하군.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본래는 아직 정규 단원이 아닌 자네를 위험도 높은 임무에 투입해서는 안 되겠지만, 들었다시피 관구 내의 상황이 썩 좋지가 않다네.”
본론을 얘기한다는 것치고는 서두가 길었기에, 알렉스는 마음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 힘이 필요한 임무가 있으면 두말 않고 참여하겠습니다.”
“으음. 미안하군. 말했다시피 교구의 일들을 처리하려면 지금도 손이 부족할 지경일세. 그런 와중에 중앙 관구에서는 다른 교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우리 쪽에, 협력 인원을 투입하라는 공문을 보내왔지.”
중앙 관구의 주도하에 임무를 수행할 인원이 보내야 하는데, 단장의 입장에선 알렉스보다 더 적당한 인선을 찾기가 어려웠다.
주변 교구와의 협력하에 이곳 지역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근처 지리에 밝고 경험 많은 팔라딘들을 최대한 남겨두어야 한다.
게다가 애초에 관록 있는 팔라딘들은 아무리 한 끗발 높은 중앙 관구라고 해도, 다른 소속의 지시를 받아가며 임무 수행하는 것을 꺼렸다.
결국 경력이 짧은 팔라딘 중에서 사람을 고르려 하는데, 개중에는 알렉스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대규모 임무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알겠습니다. 제가 가도록 하죠.”
“선뜻 수락해 줘서 고맙네. 물론 말로만 하는 소리는 아닐세. 자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정식으로 서임식을 치를 수 있도록 교구장께 이야기해 두도록 하겠네.”
“엇! 정말입니까?”
“지도사제들의 말로는 아직 자네의 공부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들 했네만, 교구를 대표해서 파견을 가는데 언제까지 후보생으로 남겨둬서야 말이 되겠는가?”
알렉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더 이상 그 머리 아픈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니.
어차피 레벨 업에 목마르던 차였으니, 외부로 임무를 나가는 것은 본인도 원하던 바였다.
그놈의 교리 공부를 생략하고 서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혹시 어떤 임무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동쪽으로 열흘가량 거리에 위치한 폴로이스 교구내의 일일세. 정확한 규모까진 듣지 못했지만, 마수들이 대량으로 출몰하여 접근조차 차단된 도시들이 있다고 하더군.”
내용을 들은 알렉스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아닌 괴물과 싸워야 한다면, 마음이 불편할 일도 없을 테니 더할 나위 없는 임무다.
“반드시 저희 교구의 명예를 빛내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괜히 그쪽에게 책을 잡히지 않으려면 빠를수록 좋겠지.”
“그럼 바로 떠나도록 하죠.”
“좋네. 지원처에 말해 필요한 물자들을 받아가도록.”
단독 파견 임무.
이사벨을 만난 뒤로 근 반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붙어 다녔는데, 오랜만에 혼자 여행길을 오르게 되었다.
열흘 거리라 했으니 왕복 이십 일에, 임무수행 시간까지 생각하면 아마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단짝 친구와 떨어지는 기분이라 조금 섭섭하기도 하네. 그쪽에 가면 다른 사람들과 한동안 같이 임무를 수행하겠군. 중앙 관구의 팔라딘이라…… 이쪽 사람들하고 차이가 있으려나?’
간략하게 떠날 준비를 끝낸 알렉스는, 이사벨과 인사라도 하고 출발하기 위해 그녀를 찾았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신전 내에서 이사벨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사벨? 그러고 보니 도시에 잠깐 볼일이 있다는 것 같았는데.”
“아…… 그렇습니까?”
‘타이밍이 안 맞았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다는 사람이 신전 바깥으로 외출한 것 같다는 정보를 알려줬기에, 알렉스는 어쩔 수 없이 인사를 생략하고 말에 올랐다.
“그럼 가볼까. 너랑은 아마 이게 마지막 여행이 되겠구나. 너도 이제 슬슬 은퇴해야지.”
히히힝? 푸르륵!
정식 팔라딘이 되면 교단의 지원을 제법 받을 수 있게 되니, 그때는 이 늙은 전투마도 젊은 녀석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힘들지 않으면서 적당히 레벨도 올리고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알렉스는 동쪽으로 말머리를 향하고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