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46화
돌로메스의 참극(3)
“어떻게 된 건가!”
두 성기사들이 쓰러진 이사벨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하며 물어왔다.
“악마와 싸우면서 놈이 내뿜은 독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독? 내가 놈들을 처리할 땐 그런 낌새가 없었는데?”
“그거야 그때는 마녀를 죽여서 악마를 약화시킨 상태였으니 그랬겠지요!”
“엇…… 그, 그런 거였나?”
떠드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알렉스는 이사벨을 바로 눕히며 치유의 손길을 발동시켰다.
따스한 빛이 뿜어지며 신성력이 이사벨의 몸을 파고들었다.
반대편에 앉은 길레인 역시 손을 뻗어 힘을 더했다.
기사로서의 실력은 다른 일행보다 떨어지지만 성법 쪽으로는 제법 숙련도를 쌓았는지, 알렉스보다 더 밝은 빛을 발산하는 모습.
“제길…… 나는 이런 쪽으론 도움이 되질 않아서…….”
치유계통 성법에는 재능이 거의 없었는지, 손을 보태지 못한 테론이 주위를 맴돌며 부산을 떨었다.
“큰일이군.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
“이런…….”
알렉스와 길레인이 치유의 힘을 불어넣고 있지만, 이사벨의 상태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치유의 손길은 외상을 고치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몸 안의 장기에 스며든 독성이나 질병 같은 것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은 조금 더 전문적인 치료의 성법을 구사하는 프리스트의 능력이 필요했다.
“사제를 데려와야…… 염병할!”
하필이면 이곳 신전의 사제들이 전부 악마의 제물이 된 탓에, 지금은 도움의 손길을 구할 곳이 없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신전까지 이동하려면 하루는 꼬박 말을 달려야 한다.
‘상태를 봐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어. 이대로는 위험하다.’
알렉스는 레벨이 오르며 얻은 포인트 2개를 치유의 손길에 투자했다.
[치유의 손길 Lv 5]
포인트는 신중히 사용하고 싶지만, 어차피 나중에라도 5레벨 정도까진 찍어둘 스킬이었으니, 조금 미리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네……?”
한층 더 밝아진 빛에 길레인이 놀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말없이 신성력을 계속 쏟아부었다.
그렇지만 강해진 치유의 손길로도 이사벨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면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계속 치료를 걸면서, 신전이 있는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수밖에.’
환자를 무사히 옮기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사제가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사벨이 버텨주기를 기도하며 움직이는 것이,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 터.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1단계 성과 보상이 지급됩니다.]
[잔여 스킬 포인트 1]
처음 보는 알림이 떠오르며 알렉스의 관심을 끌었다.
‘무슨…… 아! 그러고 보니 퀘스트가 있었지. 단계별 보상이 어쩌고 했던.’
퀘스트는 여전히 완료되지 않은 상태지만, 마녀와 악마를 해치운 것으로 일종의 진행도 같은 게 오른 모양이다.
보상이 스킬 포인트를 주는 것이었는지, 0이었던 포인트가 1로 늘어났다.
‘고마운 보상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 잠깐?’
알림에서 신경을 끄고 이사벨을 들어 올리려던 알렉스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동작을 멈추었다.
실험해 볼 만한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재빨리 스킬창을 띄워 해금되어져 있는 스킬 트리를 확인했다.
이윽고 하나의 스킬을 찾아낸 알렉스가, 방금 얻은 따끈따끈한 포인트를 그대로 사용했다.
[정화의 불꽃 Lv 1]
블레싱 3레벨과 치유의 손길 5레벨을 선행 조건으로 가지고 있기에, 이제 막 조건을 모두 충족한 스킬.
치료계통 스킬 트리에 별로 투자하지 않는 성기사 유저라도, 치유의 손길을 5레벨은 찍어두는 이유가 이 스킬에 있다.
‘이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정화의 불꽃은 신성력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불인 백염을 몸에 두르는 스킬이다.
자신에게 걸린 모든 디버프들을 신성한 불로 태워서 없애버린다는 컨셉의 스킬.
말하자면 각종 상태이상의 지속시간을 빠르게 감소시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이었다.
온갖 군중제어기에 시달리는 전위직이라면 안 찍고 넘어가기엔 아쉬운 스킬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게 개인용 스킬이라는 점인데.’
정화의 불꽃은 치유의 손길과 달리 타인에게 걸어줄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의 상태이상까지 풀어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에서의 효과. 현실이 된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몰랐다.
“이사벨을 데리고 이동하세.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라면…….”
“아뇨, 잠시만. 시도해 볼 게 있으니 제 갑옷을 벗겨주십시오.”
“뭐?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사벨 경의 치료를 위한 겁니다. 자세히 설명할 상황이 아니니 빨리!”
알렉스의 발언에 두 성기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의 탈의를 도와주었다.
재빠르게 갑옷을 벗어 전신의 부피를 줄인 알렉스는, 곧바로 몸을 날려 이사벨을 덮쳤다.
“아, 아니. 자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경악한 성기사들의 외침이 시끄럽게 울렸지만, 하나하나 설명하느니 직접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
이사벨의 위로 올라탄 알렉스는 최대한 몸이 맞닿도록 밀착시키며, 방금 배운 스킬을 발동시켰다.
[정화의 불꽃]
알렉스의 전신에서 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건…….”
백염에 담긴 신성력을 알아본 두 성기사가, 막 들어 올리려던 무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갑자기 정신 나간 행동을 하는 알렉스를 보고, 순간 그가 악마에 쓰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던 차였다.
‘이게 먹혀야 하는데…… 그렇지! 되는구나!’
이사벨을 꽉 끌어안고 초조한 눈으로 상태를 살피던 알렉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중독의 증상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일인용 스킬이긴 하지만 백염이 맞닿는 범위 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다행히 들어맞았다.
“누, 누구, 알렉스 경?”
정신을 차린 이사벨이 흐린 눈을 깜박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아, 정신이 드셨군요.”
“제가…… 기절했었습니까?”
“악마의 독 때문에 쓰러지셨습니다.”
흐릿한 초점을 간신히 맞춘 이사벨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감각이 무뎌져서 느낌이 없습니다만, 혹시 지금 제 몸에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계신 겁니까?”
“예? 아, 아닙니다! 자세가 이래서 그렇지 치료 중인 겁니다! 갑옷도 입고 계시잖습니까!”
알렉스는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설명을 늘어놓았다.
몸 위에 올라탄 채 숨결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으니, 오해를 하고도 남을 만한 자세이긴 했다.
“……그렇습니까. 또 신세를 지는군요.”
사실 눈을 뜨자마자 기겁하며 주먹을 날려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사벨은 알렉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침착한 어조를 유지하며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하군요. 조금만 더 쉬겠습니다.”
“아, 예, 그…… 네. 쉬시죠.”
괜히 더 무슨 대화를 해봐야 엄한 말실수를 할 것 같아, 알렉스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거, 대범한 성격이라고 해야 할지, 신뢰받아서 기쁘다고 해야 할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인간화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자니, 위에서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치료가 되는군. 대단해. 대단하긴 한데…… 자네, 언제까지 그리 비비적거리고 있을 건가?”
“이사벨의 상태도 호전된 것 같으니 그만 내려오지 그러나?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군.”
“아니, 무슨 말들을 그렇게…… 후우, 어디까지나 치료를 위한 행동입니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독성을 완전히 몰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태를 봐서는 이제 자연적인 회복력에 맡겨도 될 것 같긴 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이사벨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아닐세. 꼴사납기로는 우리가 더했지. 두 사람이 애써준 덕분에 우리도 간신히 악마에게서 풀려난 게 아닌가.”
“그건…… 으음, 아닙니다. 어쨌든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이지요.”
이사벨은 알렉스를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여준 능력에 대해서 바로 캐묻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아무튼, 일이 다 끝났으니 정리를 해야겠군. 이렇게 참혹한 임무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난감하군요. 정말이지…… 끔찍한 일입니다.”
성기사들은 사제들의 시신을 한곳에 모아 간략하게 화장을 치렀다.
혹시나 뭔가 다른 흔적이 발견될까 싶어 신전을 조사하기도 했지만,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수습을 마치고 신전을 나선 성기사들이 움찔하며 거의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신전의 영역에서 마주했던 음울하고 기이한 분위기가 마을 안까지 퍼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일행들은 아직 사건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마을이…… 너무 조용하군. 주민들이 다 어디로 갔지?”
“그러고 보니…….”
왠지 모르게 적대적인 기색을 풍기던 주민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돌아가는 상황을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마녀가 이 마을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모르지만, 세뇌당한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주민들 역시 마녀의 계획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 뻔했다.
평범한 주민들은 딱히 어떠한 저항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마녀의 힘에 쉽게 현혹당했을 터.
사제들에게 한 것처럼 적극적인 세뇌까지도 필요 없이, 약간의 암시 몇 개만 흘려놔도 미혹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군.”
“마녀를 해치웠으니 더 큰일이야 없겠지만…… 일단 마을을 둘러봅시다.”
빈집들을 지나치며 주변을 둘러보던 성기사들은, 이내 사라진 주민들이 어느 한 장소에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좁은 공터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얽힌 채 쓰러져 있다.
‘다 죽은 건…… 아니구나. 호흡은 하고 있어. 이런 야외에서 단체로 수면을 취할 리는 없고, 뭔가의 영향을 받아 기절한 건가?’
뭉쳐 있는 군중들의 중심부에, 신전의 예배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단이 보였다.
가축들을 죽여 제사를 지낸 건지, 온갖 동물들의 사체가 뒤섞여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
아직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알렉스가 보기에도, 정상적인 제사의 형태는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주민들이 전부 모여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교단의 성기사가 나타나면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마녀가 암시를 걸어둔 건가?’
알렉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벌어진 상황을 짐작해보는 동안, 다른 성기사들은 정신을 잃은 주민들을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희생 공물…… 교단에선 이런 식의 경배의식을 금지하고 있거늘!”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기는 하나 모르겠군. 감히 이런 사악한 행위를 저지르다니!”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사벨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허공으로 하나둘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피에 젖은 제단을 중심으로 무언가가 모여들며, 음습하게 느껴지던 분위기가 점점 강해졌다.
이내,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형체를 가진 무언가가 공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끄아아악!
반투명한 형체의 무언가가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수백 명의 영혼에서 뽑혀 나온 불온한 정신과, 제단에서 벌인 부정한 의식의 혼합으로 불러내진 음차원의 괴물.
‘스펙터다. 악마보단 못하지만 꽤나 고위험군의 몬스터인데…….’
루미넌 백작가에서도 영체형 몬스터인 고스트와 마주친 적 있지만, 지금 보는 녀석은 그보다 훨씬 상위의 존재였다.
피부 위로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는 강력한 음기에, 성기사들은 얼굴을 굳히며 놈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