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44화
돌로메스의 참극
주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 가운데.
도적들 중 하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으으…… 나, 나는 예루스 님의 신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세상만물과 연결되는 사방의 길을 의미하는 십자의 형태와, 그 중심에 태양을 도식화한 형상이 합쳐진 물건.
교단의 문양을 본 따 만들어진 징표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테론이, 징표를 내보인 도적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곧바로 등에 걸치고 있던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았다.
두 쪽으로 갈라진 도적의 시체가 쓰러지며 사방으로 핏물이 튄다.
“히이익!”
“사, 사람이 반으로…….”
피에 젖은 징표를 주워서 회수한 테론이 무감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지로 인한 행위는 용서를 구할 수 있으나, 신의 품에 귀의한 자가 저지른 짓이라면 더욱더 크나큰 죄악이다.”
‘와, 얄짤없구만.’
성기사들의 단호한 태도에, 알렉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웃집 아저씨 같던 평범한 인상을 한 길레인이나, 성기사라기엔 너무 경박한 게 아닌가 싶던 테론이,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교구 본당에 머무르고 있을 때랑은 또 꽤 다르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긴 한다.
같은 군인이라도 실제상황에 작전을 수행하러 나섰을 때와, 생활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을 때의 이미지가 같을 수는 없을 테니.
본인들끼리만 생활하는 영내에선 이런 사람들이 이사벨과 같은 팔라딘이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바깥에 나오니까 어떤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춘 것처럼 태도들이 싹 바뀌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기도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군. 더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겠다.”
“흐윽! 제,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도적들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처형이 내려졌다.
“선배님들이 계시니 저희가 나설 일도 거의 없군요.”
곁으로 다가온 이사벨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꼭 손맛을 별로 못 봐서 아쉽다는 투라, 알렉스는 대답하기도 뭐해 그냥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길레인과 테론은 비록 죄지은 자들이지만 이들이 받게 될 벌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란다며, 잠시 묵념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직접 저세상으로 보내놓고 명복을 비는 게 과연 옳은 건가 싶기는 했지만, 알렉스는 굳이 따져 묻진 않았다.
“이제 그만 출발하지.”
“오늘만 넘기면 내일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군.”
도적들의 시체는 자연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기고, 성기사들은 다시 말에 올라 이동을 시작했다.
원하던 바와는 조금 방향이 다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기분전환이 되는 해프닝이긴 했다.
* * *
“저기 마을이 보입니다!”
“이제 도착인가. 예정보다 하루 늦어졌군.”
“알렉스 경, 자네는 서임을 받게 되면 말부터 쌩쌩한 놈으로 바꿀 필요가 있겠네.”
“하하…… 교단에서 지원을 해준다면야 얼마든지요.”
늙은 전투마가 동료들의 말보다 쉽게 지치는 탓에 예상한 일정보다 조금 지체하게 만든 알렉스는,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푸르르륵!
자신의 흉을 보는 것을 알아들은 노마가, 신경질적으로 투레질하며 기분 나쁘다는 티를 드러냈다.
“워어. 짜식이 성질은.”
목덜미의 갈기를 긁어주며 녀석을 달랜 알렉스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진짜 뭣도 없어 보이는 촌구석이네.’
뭔가 대단한 볼거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멀리까지 와서 지루함만 느끼다 갈 것 같아 괜히 심통을 부려본다.
사목구로 지정된 마을이면 그래도 가구 수가 100가구는 가뿐히 넘어갈 테지만, 케이트리아나 글라즈번 같은 도시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기는 하다.
‘그래 뭐, 심심해도 아무 사고 없이 쉬다 올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알렉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일행들과 함께 마을 안쪽으로 들어설 때였다.
“일단 신전에 들러 이곳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돌아다니며 수상한 것이 있는지 탐문수사를 하도록 하세.”
“그러지요. 큰 마을도 아니니 금방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선임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알렉스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 뭐지?’
묘한 위화감에 의아해하던 알렉스는, 이내 이 느낌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민들의 시선.
이곳으로 오는 길에 계속 경험했던 은근슬쩍 쳐다보는 경계심이 담긴 시선이 아니라, 적의가 느껴지는 듯한 노골적인 눈빛들이다.
불합리할 정도의 신분제가 횡행하는 세상이니, 일개 평민들이 보여주는 모습치고는 많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주민들이 저런 태도를 갖진 않을 텐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적대적인 분위기.
이상한 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거기 멈추십쇼.”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일행들의 움직임에 맞춰 주민들이 하나둘씩 따라붙더니, 스무 명쯤의 무리가 되자 길을 막아서며 모두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교단의 팔라딘들이다. 신전으로 향하는 중인데, 뭔가 문제라도 있는가?”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길레인이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팔라딘…….”
“역시 사제님의 말씀대로…….”
이내 아무 말 없이 뿔뿔이 흩어지며 길을 열어주는 주민들.
황당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쳐다보던 길레인은, 헛기침을 하며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크흠. 마을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긴 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사제들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기묘한 느낌을 받은 일행들은 이후로 침묵을 유지한 채 말을 몰았다.
나이만큼 경력도 많아 돌로메스에 몇 번 들려본 적이 있는 길레인이, 가장 앞장서서 일행들을 신전으로 인도했다.
이윽고 목적지인 신전 앞에 도착한 성기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규모가 작을 뿐 익숙한 형태의 신전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왔으나,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인 장소에 들어선 듯한 불쾌감이 전신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자네들도 느끼고 있나?”
“예. 뭔가 잘못되었군요.”
“이 음산한 공기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특히나 알렉스는 다른 이들보다 더 긴장한 채 검 자루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아, 느낌이 영 싸한데. 제발 조용히 있다가 가게 해달라니깐?’
성기사들이 불편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건물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세힌즈 대사제님?”
나타난 인물의 얼굴을 확인한 길레인이,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인지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소규모 사목구에는 주교품의 사제가 발령되지 않으니, 호칭대로 대사제급의 인물이라면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직급에 위치한 신분일 것이다.
길레인을 뒤따라 걷던 알렉스는, 문득 무언가 불길한 감각을 느끼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길레인 경. 잠깐 멈추십시오.”
“음? 왜 이러는 건가?”
알렉스는 대답 없이 세힌즈라 불린 사제를 주시했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듯한 눈으로 일행들을 둘러보던 사제가, 이내 입 꼬리를 크게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정상적인 인간의 얼굴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기괴한 미소였다.
“으흐흐흣!”
“……대사제님?”
“진정으로 섬겨야 할 분을 모르고 방황하는 우매한 자들이여.”
“무슨? 설마…… 당신?”
묘한 의미를 품고 있는 세힌즈의 말에, 길레인이 충격받은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어머나, 팔라딘이 넷? 예상보다 많네. 이런 촌구석에 네 명이나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나야 기쁜 일이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일행들의 시선이 대사제의 뒤로 향했다.
일단의 무리가 신전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사제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이곳 신전의 사제들이라 짐작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반쯤 헐벗은 차림을 한 채, 도발적인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오오! 사도시여. 저기 거짓된 신의 종들이 찾아왔습니다.”
“으응. 미끼를 뿌려놨으니 슬슬 입질이 올 거라곤 생각했는데, 제법 월척이 낚였네.”
신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던 여성이, 넋 나간 표정의 사제들을 시종처럼 거느리며 다가와 세힌즈의 옆에 섰다.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 않는 사제들의 모습과 마치 윗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통해, 성기사들은 쉽게 여성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이년! 마녀로구나!”
길레인이 핏발 선 눈으로 여성을 노려보며 노성을 터뜨렸다.
‘에라이, 혹시나 했는데 또 암흑교와 엮이는 건가.’
알렉스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타인의 정신을 오염시켜 무너뜨리고, 강력한 세뇌를 걸어 꼭두각시로 만드는 능력.
암흑교도 중 하나인 마녀의 힘으로, 하급을 벗어나 중급 수준에 발을 들인 마녀쯤 되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중급 마녀의 정신지배는 일반인들에게나 통하는 수준일 텐데.’
저렇게 사제들을 배교자로 만들 정도의 강력한 능력이라면, 추정 레벨이 60은 되는 상급의 마녀.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설마 지난번 네크로맨서 같은 강력한 괴물은 아니겠지?’
알렉스가 마녀의 수준을 가늠하며 경계하고 있자니.
[에픽 퀘스트 ‘빛을 잠식하는 어둠’이 발생합니다.]
이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알림이 떠올랐다.
[빛을 잠식하는 어둠]
[오래도록 감시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던 어둠의 세력들이 마침내 본격적인 활동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들의 야욕을 저지하십시오.]
[보상 : 성과에 따른 단계별 지급]
‘……단계별 지급?’
습관적으로 퀘스트창을 확인한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퀘스트가 뜨는 것 자체도 반갑지 않지만, 제대로 명시되지 않은 보상의 내용이 더더욱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다.
‘후우, 퀘스트는 신경 끄자. 어차피 싸움 자체는 피할 상황도 아니고.’
알렉스는 알림에서 눈을 돌리고 전투를 준비했다.
퀘스트가 뭐라고 표시되든지 결국은 적을 해치우라는 내용이고, 성기사 동료들이 함께 있는 자리이니 당연히 싸우지 않고 물러날 리도 없다.
“심판하노라!”
그리고 알렉스의 예상대로.
교단의 터에서 사제들이 조종당하고 있는 참담한 광경에 눈이 뒤집힌 길레인이, 무기를 움켜잡고 마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구원으로 인도하리라!”
“예루스시여!”
심상치 않은 상황에 긴장하고 있던 테론과 이사벨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니, 잠까… 에잇!”
레벨이 높아 보이는 상대이긴 하지만, 마녀는 대부분의 암흑교도들과 달리 전투에 특화된 직종이 아니다.
물론 전투능력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다른 어떤 보조도 없이 혼자 성기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의심스러운 일.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이 위협적이긴 해도, 그 역시 아무에게나 보자마자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겹씩 천천히 옷을 벗기듯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지속적인 암시로 마음에 틈을 만든 후에야, 진실을 속이는 현혹의 힘이 스며들 수가 있는 법이다.
‘뭔가 함정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 저렇게 당당하게 앞으로 나설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동료들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선두에 선 길레인이 마녀와 고작 몇 걸음을 남겨둔 거리까지 뛰어든 상황.
그리고 그런 길레인의 앞을 막아서기 위해, 마녀의 곁에 서 있던 사제들이 몸을 내던졌다.
“미몽에 붙잡혀 있는 형제여. 멈추시게.”
“예루스는 거짓된 이름일 뿐.”
“진정한 안식에 이르는 길로 그대를 인도하겠네.”
세뇌로 인해 자신의 신을 부정하는 사제들의 모습에, 길레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해머를 휘둘렀다.
가장 앞에서 정면을 막아선 대사제의 머리가 터지며, 피와 뇌수가 흩뿌려졌다.
모든 팔라딘들이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할 지상과제는 이교도를 척결하는 것.
설령 적에게 조종당하게 된 교단의 형제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사명에 방해가 된다면 주저 없이 제거하고 나아가야 한다.
“푸흣, 꺄하하핫!”
성기사가 사제들을 무참히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즐거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마녀.
앞을 막던 십여 명의 사제들을 순식간에 치워 버린 길레인은, 그런 마녀를 향해 뛰어들며 피로 젖은 망치를 높게 치켜들었다.
“천벌을 내리노라!”
분노로 희번덕거리는 길레인의 눈을 마주하며,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마녀의 입이 벌어졌다.
“어머, 아직 끝이 아닌데?”
그와 동시에, 막 망치를 내리꽂으려던 길레인의 움직임이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