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43화 (43/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43화

임무 보조

알렉스가 글라즈번 교구에 몸담은 뒤로 3개월째.

어느덧 겨울이 끝나가고 대지에 푸른빛이 피어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알렉스 경. 토머슨 주임 사제님의 교리해석 강의 시간입니다.”

“하아-”

도망치고 싶다.

군생활도 이렇게 재미가 없진 않았는데.

그것이 요즘 알렉스가 매일같이 강렬하게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정식 팔라딘 서임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무력 테스트야 최고실무자라 할 수 있는 성기사단장 프리츠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성직자로서 갖춰야 할 신학지식이 제로나 마찬가지라는 점이 문제다.

팔라딘은 교단의 프리스트와는 하는 일이 전혀 다르지만, 동일하게 사제품의 품계를 받는 성직자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신학지식의 양이 상당했다.

물론 프리스트가 되기 위한 자격에 비하면 요구되는 이수 과정이 현저히 쉬운 편이지만, 그 쉽다는 수준도 알렉스에겐 충분히 머리를 아프게 만들 수 있었다.

‘공부를 예전부터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도 갔겠네.’

꼭 공부 못하던 사람들이 으레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문단을 읽기도 전에 잠이 쏟아지는 교단의 성서를 두고 행해지는 강의는, 더럽게 재미가 없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다.

게다가 같이 수학하는 학생들은 교단에 종사하겠다는 꿈을 품은 성직자 후보생들인데, 하나같이 열 살배기쯤 되는 아이들이라 자괴감마저 들었다.

기초반의 교육을 받아야 할 정도로 기본지식 자체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어떻게 생략 안 되나? 사실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스킵 버튼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망상을 하며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만큼 정신이 피폐해진 알렉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성기사단장의 호출이 들어왔다.

“알렉스 경. 공부는 잘되고 있는가?”

“……노력 중입니다.”

“우리처럼 몸을 쓰는 사람들에게 머리까지 쓰라고 하는 건 꽤 괴로운 요구지. 힘든 건 알겠지만 필요한 일이니 조금 더 정진해 주게.”

“예…….”

“음. 이런 말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니네만, 하도 얼굴이 수척해 보여 괜한 소리가 나왔군. 자네 잠시 기분 전환하러 밖에 나갔다 오는 건 어떤가?”

“아? 무슨 말씀이신지.”

어떤 용무로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해하던 알렉스는, 프리츠의 말에 의문을 드러냈다.

“임무가 있네. 이미 두 명을 편성해 두긴 했지만, 아직 경력이 부족한 이사벨도 경험을 쌓을 겸 추가로 딸려 보낼 생각일세. 거기에 자네도 같이 가보는 건 어떨까 싶었고 말이네.”

“가겠습니다!”

얼굴에 화색이 돈 알렉스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석 달이나 신전에 처박혀 고문과 다름없는 공부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던 참이다.

프리츠의 말대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바깥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이미 한참 전부터 굴뚝같았다.

어차피 곁다리로 껴서 가는 마당에 어려운 임무도 아닐 터.

프리츠의 고마운 제안을 수락하고, 알렉스는 희희낙락하며 오래간만에 외출을 준비했다.

* * *

“이거이거, 알렉스 경 아니신가?”

“요즘 코흘리개들과 어울린다던데, 어떻게 공부는 잘되고 있는 건가?”

“윽…….”

신전에 100일 가까이 기거하는 동안 어지간한 동료들하고는 다 안면을 튼 알렉스는, 특히나 더 인연이 깊다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마주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두 분이 임무를 수행하시는 거였군요.”

길레인과 테론.

테스트의 대련 상대였던 인물들이다.

대련 당시 도발을 하며 자존심을 건드렸던 탓에, 다른 성기사들보다 조금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싫어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뒤끝이 남아 있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자네는 보조역으로 동행하는 것이니, 지시에 잘 따라주길 바라네.”

“아, 네. 물론이죠.”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이가 불편한 사람들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신전에 계속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야 낫다.

다행히 가장 친밀하다고 할 수 있는 이사벨이 함께이기도 하고.

“선배님들.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 이사벨.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개인적인 물품 외에 공용으로 사용해야 할 짐들은, 우리 예비 신입인 알렉스 경이 관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손이 가고 번거로운 일들을 떠맡기려는 느낌이지만, 그 정도쯤이야 선배 대접을 한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아니다.

종자 생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여행 간의 잡다한 일 처리는 귀찮긴 해도 딱히 어렵지 않다.

늙은 전마에 오른 알렉스는 앞서가는 일행들을 따라가며, 임무에 대해 말을 꺼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만.”

“아, 그렇군. 간단한 조사일세.”

“돌로메스라고, 우리 교구가 관장하는 지역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 하나 있네. 그곳의 주민들이 조금 이상하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확인을 하기 위해 떠나는 거지.”

나이스. 교구에서 멀다면 금방 돌아오지는 않겠군.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알렉스는,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재차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는 게…… 정확히 어떤 말씀이신지?”

알렉스의 질문에 길레인과 테론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우리 팔라딘들이 멀쩡한 마을에 임무를 나설 일이 무엇이겠나? 이교도에 관한 정황이 의심된다는 소리겠지.”

“엇!? 그럼 굉장히 큰일이 아닙니까? 저희만으로는 위험하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답변에 알렉스는 움찔하며 우려를 표했다.

설마 지난번처럼 암흑교의 거물과 연관되는 건 아니겠지?

걱정 섞인 알렉스의 얼굴을 보며, 두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알렉스 경은 실력에 비해 담이 작은 모양이야.”

“돌로메스가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엄연히 신전이 위치한 사목구일세. 멀쩡히 사제들이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고, 고작 그만한 규모의 마을에 이교도가 크게 암약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제보의 출처도 외부의 여행자를 통해 들어왔다는 모양이더군. 막상 가보면 별일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지.”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예전 루미넌 백작가의 영지보다 더 작은, 일개 자작령에 속한 마을이라는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교도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는 내용 때문에 이렇게 파견을 나가는 것일 뿐, 실제로는 헛소문으로 그치는 제보가 훨씬 많다는 듯하다.

‘말만 들어보면 아무 일도 없을 테지만…… 으음, 괜찮은 거겠지.’

매번 뭔가 일이 생겼다 싶으면 위험한 사건에 엮이게 되다 보니,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다.

출발부터 영 찜찜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며, 알렉스는 이번 임무가 정말로 기분 전환으로의 역할에만 충실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

목적지인 돌로메스를 하루 거리쯤 남겨둔 시점에.

좁은 산길을 지나가던 일행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

그동안의 여정은 싱거울 정도로 아무 일도 없는 단순한 이동의 반복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긴 하다.

기사가 넷이나 몰려다니면 평범한 사람들은 눈도 마주치기를 두려워한다.

경차를 타고 도로에 나가면 온갖 잡놈들이 끼어들거나 클랙슨을 울리며 시비를 걸어댈 수 있지만, 전차 소대가 우르르 지나가는데 옆에 와서 깝죽거리는 인간은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정말 뒤지고 싶어도 이왕이면 곱게 가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 그런 일반성을 뒤집는 무리가 나타난 것이니,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 기사잖아. 괜찮은 거야?”

“고작해야 네 명뿐이잖아! 저 갑옷 하나만 팔아도 십 년은 놀고먹을 수 있을 거라고!”

“그, 그래! 말에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무거워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거야.”

나무를 쓰러뜨려 길을 막은 채로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쪽의 일행들을 발견하자 자기들끼리 토론을 벌이는 열댓 명의 도적들.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멀리까지 오긴 했군요. 기사를 앞에 두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가끔 저런 자들이 있긴 하지. 보통 영주의 눈을 피해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며 지내던 이들이, 농사를 망치면 괜히 어설프게 도적질에 나서곤 한다네.”

길레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농기구로 쓸 법한 날붙이를 어색하게 내밀며, 짐짓 사나운 척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들.

칼밥을 먹어본 이들이라면 완전무장한 기사를 가리키며 고작 네 명이니 하는 소리를 뱉을 리가 없었다.

일행들 중 한 사람만 나서서 날뛰어도, 저들을 몰살시키는데 대충 1분 정도면 차고 넘칠 것이다.

“말을 공격해! 다리를 찔러!”

“이야아아-!”

호기롭게 달려드는 도적들을 보며, 성기사들은 조용히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전투 개시 후 7초가량.

도적들이 자신의 생각에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데에 걸린 시간이었다.

거리를 좁히는데 소요된 시간을 생각하면, 사실상 충돌과 동시에 곧바로 무언가 잘못된다는 것을 자각했다고 볼 수 있다.

“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말에 탄 기사를 떨어뜨리는 것은, 기마에 대응하는 전술을 훈련받은 정예병들이라도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훈련은커녕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들이, 고작 이 정도 수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영에 수렴했다.

십여 초가 조금 지난 시점에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일격에 즉사해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가 절반.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급소를 피해 부상을 입고 기어 다니는 인원이 또 절반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말이 들어맞는구나.’

발견 즉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면 일부는 살 수 있었을 텐데.

욕심과 무지가 불러일으킨 최후이니, 뭐라 해줄 말도 없었다.

싸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막연히 기사를 두려워하며 피하지만, 그래도 똑같은 사람인데 못 이길 건 무어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나오기도 한다.

그런 자들이 직접 전투상황에서 기사를 맞닥뜨려 본 적이 없으니, 흔히들 내뱉는 소리가 있다.

판금갑옷 덕분에 대부분의 공격에 면역이 되지만 대신 무게가 무거울 테니, 어떻게든 넘어뜨리기만 하면 뒤집힌 거북이처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물론 무거운 건 맞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관절의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건 두꺼운 코트를 입었을 때와 별다를 게 없다.

판금의 총 중량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어도, 플레이트 아머는 각 파츠들이 착용자의 몸에 부위별로 무게를 분산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체감상으론 체인메일보다 더 가볍게 느껴질 정도다.

장인의 손에 탄생한 무게분산 구조를 제대로 갖춘 판금갑옷이란, 현 시대 인체공학적 설계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장비.

괜히 가격이 미쳐 날뛰는 게 아니었다.

밥 먹고 훈련만 하는 기사들이 전신갑주까지 갖춘 상태인데, 이따위 어설픈 도적 떼가 덤벼들어서 이겨보겠다?

그야말로 꿈같은 소리라 할 수 있다.

“아흐, 흐흐흑!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쇼!”

“제발 자비를!”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깨 한쪽이 완전히 뭉개진 도적이 용서를 구하자, 살아 있는 다른 도적들도 목청을 높여 잘못을 빌었다.

알렉스는 말없이 일행들의 행동을 기다렸다.

사실상 막내라 할 수 있는 입장이니, 다른 동료들이 이들을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 조용히 지켜볼 셈이었다.

말에서 내린 길레인이 그나마 가장 멀쩡한 상태로 서 있던 도적에게 다가가, 예의 그 묵직한 워해머를 휘둘렀다.

뿌지직.

“끄아아악!”

‘……오우?’

부러졌다고 하기보단 거의 뜯겨나갔다 싶도록 다리가 박살 난 도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쿵.

“엄숙하라.”

해머로 바닥을 찧으며 무뚝뚝하게 한 마디를 내뱉는 길레인의 모습에, 몸부림치던 도적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신을 섬기는 팔라딘을 공격한 것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중죄이다.”

“파, 팔라딘?”

“교단의 성기사…….”

“자비를 베풀어 처형하기 전에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은 주도록 하겠다. 경건히 엎드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용서 따위는 없이 다 죽이겠다는 소리에, 알렉스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도적 떼 따위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릴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성직자들이니 목숨을 구걸하는 자들은 보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과격한 대응이라서 놀라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