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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39화 (39/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9화

글라즈번 교구(2)

“이곳은 씻을 때 웃돈을 내면 물을 데워 줍니다.”

“예? 아, 그렇군요.”

“날도 추워지고 순례 여행도 끝이 났으니 조금 호사를 누려도 되겠다 싶어서 이리로 왔습니다. 바깥을 돌아다니던 중에는 따듯한 물로 씻은 적이 드물었지요.”

“예? 아, 그렇군요.”

“알렉스 경? 아까부터 대답이 왜…… 호, 혹시 저 때문에 실망하신 겁니까?”

“예? 아, 그렇군요.”

살짝 넋이 나간 듯한 알렉스의 반응에, 이사벨은 울상을 지으며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저희가 성직자로서 절제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반년 만에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돌아왔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말끔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가고 싶다.

알렉스 경도 한 식구가 될 사람들에게 깔끔한 첫인상을 남길 수 있지 않겠느냐.

깨끗하게 씻고 옷도 새로 갈아입는 것이 좋을 것이다 등등.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냥 몸을 청결하게 만들고 가자는 소리였구나. 말을 그렇게 해서 당황했잖아.’

대도시이니만큼 성안에 공중목욕 시설도 갖춰져 있지만, 사람이 많아 번잡한 느낌을 받기 싫다면 이렇게 고급 여관에서 따로 씻는 것도 괜찮긴 하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지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어떤 유혹인가 싶어 얼이 빠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그…… 렇지요. 이참에 묵은 때를 시원하게 벗기고 갑시다.”

“앗! 역시 괜찮은 제안이지요?”

“예, 뭐. 그럼 이따가 봅시다.”

해맑게 웃는 이사벨을 마주 보기가 괜히 민망해져, 알렉스는 대충 주억거리고는 종업원을 불러 얼른 자리를 옮겼다.

몸에 쌓인 때와 함께 미묘한 정념도 같이 흘려보낸 후에, 알렉스는 뽀송뽀송해진 모습으로 욕실을 나섰다.

‘시원하네. 역시 도시에 들어오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노숙도 이제 제법 익숙해지긴 했지만, 난 원래 자택경비 생활에 전문가였던 사람이었다고.’

여행길을 돌아다니는 도중엔 아무래도 현대의 생활처럼 매일 몸을 씻을 여유가 없어, 간단하게 세면 정도만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흔했었다.

그렇다 보니 간만에 이렇게 본격적인 목욕을 하고 나오자,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라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바나나우유가 없다는 게 통탄스럽군.’

오랜 버릇이 떠올라 뭔가를 마시고 싶어져, 알렉스는 1층의 홀에 테이블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이곳의 규모가 조금 있는 여관들은 숙박업뿐 아니라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내 여급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오, 고급스러운 곳이다 싶더니 메뉴판까지 준비가 되어 있네.’

아직 이 세계에 떨어진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가게들은 죄다 그날그날 적당한 재료로 요리를 하고 주는 대로 처먹으란 식의 배짱장사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음식점이 태반이다 보니,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메뉴판의 존재조차 괜히 감격스럽게 다가온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니, 이곳이나 현대나 돈이 있어야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는 건 마찬가지군.’

조금 우스운 소리긴 하지만, 게임을 할 때 성기사를 선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직군이 가지는 사회적 위치가 아니었다면 귀족과 엮이거나 이사벨을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주머니 사정에 대한 부담이 덜한 생활을 보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전사까진 몰라도 도둑계열 직업이라도 가지고 이런 곳에 왔다면…… 어휴! 천민 도적놈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냐. 만약 그랬다면 그냥 죽는 게 날 뻔했겠지?’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떤 알렉스는, 메뉴판을 쭉 훑어보다가 적당한 안줏거리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어차피 곧 식사시간도 다가오니 이사벨이 내려오면 음식을 더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잠시 자신의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55레벨. 이제는 어지간한 상급 기사 정도는 대등하게 겨룰 만한 능력치가 되었네.’

스테이터스만 따졌을 때 그 정도이니, 스킬의 힘이 더해지면 충분히 강자 소리를 들을 수준이 되었다.

다만 대인전에 능한 기사들과 달리, 자신의 스킬은 대부분 몬스터와의 전투에 특화된 편이라 마냥 압도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진 않았다.

지하제단에서 밥값을 톡톡히 했던 심판의 일격도, 평범한 인간에게 사용하면 그냥 조금 더 강한 타격이 들어가는 정도.

가장 강력한 스킬인 디바인 크로스는 아직 실험해보진 못했으나, 일반인에겐 방패로 후려치는 것보다 오히려 위력이 낮게 적용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게임에서는 PvP상황에 따로 적용되는 데미지 계산식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분명 그렇지 않을 테니 말이다.

디바인 크로스는 5레벨 마스터 스킬로 성장시킬 때마다 레벨 제한이 10씩 늘어나는데, 55레벨이 되며 스킬을 올릴 수 있는 조건은 채웠지만 일단은 당장 더 투자하진 않기로 했다.

게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에선 제한이 적고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하위스킬들이 요긴하기도 하고, 게임처럼 몰이사냥을 다닐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그래도 뭐, 성기사 스킬들 중 방패를 활용하는 것들은 대인전에서 충분히 강점으로 작용될 수 있으니까. 이번에 마스터리 스킬들도 제법 올려두었으니, 충분히 상급 기사 수준으로 싸울 수 있을 거야.’

네크로맨서를 해치우고 올린 레벨로 알렉스는 실드 마스터리에 두 개, 소드 마스터리에 하나의 포인트를 각기 투자해 7레벨로 만들어 두었다.

레벨이 크게 올라서인지 아니면 격한 전투를 경험한 덕분일지, 마스터리 스킬을 찍을 때 몇 번 떠올랐던 숙련도 제한 알림은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두 개의 포인트로는 굳건한 태세와 격노의 응징을 2레벨로 올렸다.

암흑교도와 언데드들을 상대하느라 다른 스킬들에 먼저 투자를 하긴 했었어도, 범용성을 따지면 이 두 개의 스킬들도 충분히 효율이 뛰어나기에 내린 선택.

‘이 정도면 기사로서의 수준은 충분히 끌어올린 것 같고. 다음에 레벨 업을 하게 되면 기본적인 성법 스킬들도 조금 더 찍어둬야지.’

“알렉스 경. 먼저 내려오셨군요.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스킬창을 확인하며 다음에 올릴 스킬 트리를 구상하고 있자니, 얼굴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오른 이사벨이 알렉스를 발견하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원래도 이사벨은 예쁘장한 외모였는데, 막 씻고 나와 피부에 윤기가 가득하니 한층 미모가 돋보인다.

귀티가 잘잘 흐르는 것이 갑옷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지체 높은 고위 귀족가문의 여식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저도 막 앉았습니다. 간단하게 식사나 해결하고 갈까 하는데, 어떠신지?”

“신전의 식단은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조금 담백한 감이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십니다.”

“어…… 혹시 음식의 차림에 있어서 많이 검소한 편입니까?”

“아!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저희처럼 힘쓸 일이 많은 팔라딘들은 사정이 다르지요. 외부의 사람을 고용해 저희끼리는 따로 먹을거리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매일 빵 쪼가리에 스프 한 접시 정도만 나오는 부실한 식단을 유지하는 건가 싶어서 걱정했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씻고 나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알렉스 경도 이리 말쑥하게 하고 계시니 헌앙한 풍채가 아주 보기 좋으십니다.”

“음. 그렇습니까.”

그럼 원래는 거지같이 하고 다녔다는 소리일까 싶어 머쓱하게 대답했다.

간만에 깨끗하게 씻고 면도까지 하고 나온 것을 생각하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확실히 좀 지저분해 보이긴 했을 것 같긴 하다.

이사벨이 합석하며 추가로 더 주문한 음식이 곧 나왔기에, 두 사람은 가벼운 잡담을 간간이 나누며 식사시간을 보냈다.

“오! 이거 이사벨 님이 아니십니까?”

“엇? 이사벨 경. 언제 복귀하신 겁니까?”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식사를 하는 동안 몇 차례 이사벨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급 여관에 출입하는 고객들답게, 하나같이 부유한 상인처럼 보이는 옷차림이거나 귀족적인 차림새의 인물들이었다.

“인기가 꽤 많으시군요.”

“하핫……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이곳에서 쭉 자랐다 보니, 인사 정도는 나눌 만한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이것 참,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확실히 드네요.”

멋쩍게 웃어 보이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자신을 보고 묘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호기심이라기엔 어째 강렬한, 딱 뭐라 표현하기 애매한 의미를 알아보기 어려운 눈빛들.

‘경계심 같기도 하고 뭔가 탐색하는 듯한…… 대체 뭐지? 흐음.’

“슬슬 다 드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신전으로 가볼까요? 알렉스 경 같은 뛰어난 인재를 소개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는군요.”

“응? 아, 별말씀을…… 그럼 일어나도록 합시다.”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뒤로 하고, 알렉스는 이사벨과 원래의 목적지인 신전으로 향했다.

* * *

“오! 이사벨 경. 이게 얼마만입니까?”

“미구엘 주교님!”

“이런,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명의 사제인데, 아직도 그리 부르십니까?”

“한번 받은 성품이 어디 사라진답니까? 아무튼, 잠시 못 본 사이에 더 젊어지셨습니다.”

“흐헐헐! 다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를 노인네에게 짓궂은 농담을 다 하십니다그려.”

글라즈번 교구의 본당.

신전이 위치한 구획에 들어서자, 이사벨을 알아보고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거의 무슨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느라 계속 멈춰서야 할 지경.

“휴. 오랜만에 돌아오니 말을 거는 분들이 조금 많군요. 자꾸 지체해서 미안합니다.”

“하핫,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이제 더 붙잡을 사람은 없어 보이네요. 저 안으로 들어가면 저희 팔라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나옵니다.”

“아하.”

이사벨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알렉스는 과연 다른 성기사들은 어떤 인물들일지에 대해 속으로 떠올려보았다.

이사벨이 굉장한 재능으로 이른 나이에 서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을 생각하면 분명 더 강하고 뛰어난 이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팔라딘 분들에 대해서는 그리 아는 것이 없군요.”

“아? 선배님들은 다들 좋은 분들이십니다. 절 가르쳐 주신 스승님 같은 경우는 수련에는 굉장히 엄격하시지만, 평상시에는 아주 푸근하고 인자한 분이셨죠.”

“그렇습니까?”

앞으로 오랫동안 알고지내야 할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해서, 궁금증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응? 이사벨!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구나!”

갑옷을 걸친 채 나른한 얼굴로 길가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이사벨을 보고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네. 복귀했습니다. 테론 경.”

“우앗! 호칭이 딱딱하네. 이제 동등한 팔라딘이라 이거구만.”

‘동료 성기사인가?’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마도 이사벨과 같은 팔라딘일 그를 살펴보고 있자니, 테론이라 불린 남성의 시선이 알렉스를 향해 옮겨졌다.

“그런데 옆에는 누구?”

“알렉스라고 합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하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자, 이사벨이 나서서 알렉스에 대한 소개를 해주었다.

“알렉스 경은 제가 순례 중에 만난 귀한 인연으로-”

그런데, 설명을 듣는 테론의 표정이 점차 기묘하게 변해간다.

“이럴 수가…….”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가진…… 테론 경?”

이야기를 듣던 테론이 몸을 돌려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가며 외쳤다.

“이사벨이 남자를 데려왔다! 젊은 놈팡이가 같이 있다고!”

“……어라?”

짧은 외침이 울려 퍼지길 잠시.

“어디냐!?”

“이사벨이 뭘 데려왔다고?”

알렉스는 달리는 들소 떼를 보는 것처럼 덩치 크고 시꺼먼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무언가 조금 잘못된 것 같다는 강렬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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