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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38화 (38/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8화

글라즈번 교구

대륙 서부 끝자락의 도시 케이트리아는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번 사건의 종결로 인해, 몇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평범한 주민들에게 있어서 오늘과 내일은, 그저 어제와 같은 평화로운 일상의 반복일 뿐이었다.

“간신히 정리가 끝났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알렉스 경.”

암흑교가 꾸미던 일이 정확히 무엇이었고, 네크로맨서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스 한 명뿐이다.

그렇기에 도시로 돌아온 알렉스는 이번 출정과 관련된 수뇌부들 앞에서, 자세한 상황들을 설명하느라 한참 입이 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알렉스 경. 아실지 모르겠는데, 오늘로 성 폴리티누스의 달에 접어들었습니다. 예상했던 일정과 달리 여기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군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 폴리티누스의 달은 교단에서 지정한 어떤 성인의 이름을 딴 달력의 첫 번째 기간으로, 간단하게 말해 1월이 돌아왔다는 소리였다.

‘그럼 이 몸은 이제 19살인 건가.’

귀족들이야 생일을 정확히 따져가며 나이를 계산하지만, 평민들은 보통 그냥 연도가 바뀌면 한 살을 더 먹는 걸로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의 국제 표준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태어난 해를 0세로 치니, 원래의 세상이라면 이제야 겨우 성인으로의 권리가 생기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아직 19살이란 말이지. 여긴 평균 수명이 대체 얼마나 낮을지 궁금하네.’

“원래대로라면 슬슬 교구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연루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다 보니 이리 늦어졌군요.”

잠시 잡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이사벨이 슬쩍 가까이 다가와 팔을 붙잡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도 이제 이곳에서의 역할은 다 끝났으니, 이제야말로 저희 글라즈번으로 돌아가 알렉스 경의 추천을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예. 그러네요.”

‘그래. 나 아직도 정식 팔라딘 서임을 받은 게 아니지. 근데 이렇게 암흑교를 상대로 죽어라 구르고 있으니…… 경력 있는 신입이 여기 있었네. 아주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이야.’

“……설마 델트리온 주교의 제안을 고민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고생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자, 이사벨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사태에 대한 설명을 교단에 알리며, 케이트리아 교구장에게 굉장히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았다.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질 뻔한 이교도의 흉계를 알렉스의 주도로 막아냈고, 관구 단위로 개입했어야 할 정도의 강력한 사령술사를 제거하는 공적까지 세웠다.

그 네크로맨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 대면하지 못한 교구장이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살아 돌아온 사제들의 증언만으로도 상당한 고위의 암흑교도라는 사실은 파악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알렉스가 주목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음.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케이트리아 교구에서 팔라딘 서임을 받으면 기본소양에 대한 교육기간을 최소화해 주고, 이후에도 상당한 특혜를 주겠다는 제안이 왔었다.

이사벨이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도 눈치가 있으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모르진 않았을 터.

혹시나 알렉스가 이곳에 남겠다고 할까 봐, 꽤 조바심을 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사벨 경? 팔이 아픕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말은 죄송하다고 하면서 여전히 꽉 움켜진 팔은 놓지 않는다.

팔 보호대의 철판이 조금 휘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농담으로라도 안 가겠다고 했다간 팔을 잡아 뜯기는 게 아닐까 두렵다.

“힘이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앗!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발전에 도움이 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신체강화의 성법을 최대로 운용 중인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악력이라니.

확실히 지하에서의 탈진 이후로, 이사벨도 자신처럼 레벨 업을 몇 번 거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성장한 느낌이 든다.

작은 키는 그대로지만.

‘NPC…… 라고 부르는 것도 이젠 조금 그렇지만, 아무튼 평범한 주민들은 게이머처럼 급격히 성장하진 못할 텐데. 으음, 그냥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 건가?’

몇 번 지켜보기도 했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며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사벨의 성법은 거의 패시브 스킬에 가까운 지속형 능력으로 추정이 된다.

평상시에는 딱 기사 정도의 신체능력을 유지하면서, 신성력을 극한으로 발휘할 때는 빛을 뿜으며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성법.

한데 지금도 이렇게 강한 악력을 낼 수 있다면, 전력을 다할 때는 맨손으로 갑옷을 찢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 살펴보면 이사벨의 성법도 내가 아는 성기사 스킬들하고 조금 다르긴 해.’

저런 식으로 근력을 강화하는 스킬은, 솔로잉을 좋아하는 공격 타입 성기사의 스킬 트리를 타다 보면 비슷한 것들이 존재하긴 한다.

다만 세세히 따져보면 또 완전히 같다고 할 만한 스킬은 떠오르지 않는다.

‘게임 배경이 현실이 되면서 달라진 점들이 있으니 확신하진 못했는데…… 어쩌면 이사벨의 성법은 성기사들 중에서도 꽤 특별한 축에 속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직 다른 성기사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비교하기가 애매하긴 하다.

끼긱.

그렇게 잠시 이사벨의 성법에 대해 잠깐 생각하고 있자니, 붙잡힌 팔에 가해지는 압력이 점점 강해지며 뱀브레이스에서 불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사벨 경? 진짜로 아픈데요?”

“자꾸 말을 돌리지 마시고 확실히 대답해 주세요.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불안감을 담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벨.

알렉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 얼굴을 마주하다가, 하늘을 향해 슬쩍 시선을 올렸다.

콧잔등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내려앉으며, 시큰거리는 감촉이 잠깐 느껴졌다가 사라진다.

“눈이 오는군요.”

어째 공기가 서늘하다 싶더니,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씩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한창 추운 겨울로 접어드는 1월이 되었으니, 슬슬 눈이 올 시기이기는 했다.

“엇? 정말이…… 가 아니라, 또 그렇게 딴청을-”

“쌓이기 전에 빨리 출발하도록 합시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면 저희나 말들이나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는 인상을 쓰며 입을 여는 이사벨의 말을 끊고, 알렉스는 넌지시 동행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델트리온 주교의 제안은 솔직히 무엇 하나 구체적인 게 없다 보니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교구장이라는 높은 신분이니 영주인 로델론 백작처럼 일선에 나서지 않고 영지에 틀어박혀 있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위험했던 시기에 함께 싸웠던 이사벨을 두고 그쪽의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배부른 돼지 같은 느낌이라, 별로 호감이 가지도 않고 말이지.’

“아앗! 알겠습니다. 제가 말을 데리고 올 테니 가만히 계십시오!”

알렉스의 말뜻을 알아들은 이사벨이 환한 미소를 짓고는, 등을 돌려 후다닥 달려갔다.

신년을 맞이하며 그해의 첫눈이 내리던 날.

두 사람의 성기사는 눈길을 밟으며 케이트리아를 떠나갔다.

* * *

글라즈번은 서부에서 가장 크게 발달한 도시는 아니지만, 그곳에 자리한 신전이 서부의 가장 큰 교구의 본당이라는 평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남서 관구와 북동 관구 전체를 통틀어도, 저희 교구만큼의 규모를 갖춘 곳은 몇 군데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부심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교구가 교단 전체에서도 영향력이 상당한 위치라는 건, 분명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이다.

‘나한테도 좋은 이야기네. 관구 단위로 따져도 최상위권의 규모라면, 지원도 빵빵하게 해줄 테고.’

뒷배가 튼튼하다는데 싫을 이유가 없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알렉스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남서와 북동 관구만 말씀하셨는데, 중앙 관구는 일부러 빼신 겁니까?”

“아…….”

알렉스의 지적에, 이사벨은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자신감이 줄어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중앙 관구는 교황청이 위치한 곳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관구보다 규모의 밀도가 다르다 해야 할까,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무, 물론! 저희 관구가 중앙 관구에 비해 크게 부족한 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아하, 알겠습니다.”

요컨대 지방에서는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지만, 교내 권력의 중심지인 중앙 관구 쪽과 비교하면 끗발이 딸리긴 하단 소리다.

‘뭐 적당히 큰 곳이면 충분하겠지. 너무 엘리트 집단이면 생활하기 빡빡할 거 같기도 하고.’

딱히 소속될 교구가 최고의 수준이길 바란 것은 아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는데, 이사벨은 알렉스가 실망을 느낄까 봐 걱정되었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중앙 관구는 귀족들이 많이 기거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팔라딘 서임에도 따지는 조건이 많고……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깐깐한 사람들이라 임무 협력을 해야 할 때도 숨이 막힌다던데…….”

혹시라도 딴 곳을 알아보겠다는 소리를 할까 봐 염려하는지 중앙 관구의 단점을 열거하며 재잘거리는 이사벨을 두고, 알렉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딱히 다른 교구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굳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앗! 네, 그러시군요. 하핫…….”

“음. 이제 저희 차례군요.”

민망한 기색으로 웃음을 흘리는 이사벨을 보며 마주 웃던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여러 대의 짐마차가 성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늙은 전투마의 목을 툭툭 두드려 천천히 걸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려면 성문 앞 검문소를 거쳐야 하는데, 앞에서 꽤 규모가 커 보이는 상단이 대기 중이라 잠시 차례를 기다리던 차였다.

“근 반년 만에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에 돌아오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렇습니까? 저야 처음이지만 과연 어떤 곳일지 궁금하네요.”

두 사람이 글라즈번의 성문 아래로 다가가자, 검문을 담당하던 병사들 중 하나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니!? 이사벨 님 아니십니까!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셨군요!”

딱 봐도 ‘나 기사요’ 하는 차림을 하고 있으니 바로 통과하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꽤 관록 있어 보이는 생김새의 병사가 이사벨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온다.

“아, 그렇습니다. 그간 별일은 없었습니까?”

“항상 똑같지요. 하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사벨 님이 돌아오셨으니 도시가 꽤나 활기차지겠군요.”

“하핫…… 그럼 지나가 보겠습니다.”

성안으로 들어선 알렉스는 살갑게 인사를 걸어왔던 병사를 힐끔 돌아보고, 이사벨에게 조용히 질문을 건넸다.

“잘 아는 분이신가 봅니다?”

“앗, 그게…… 글라즈번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대부분의 주민들과 안면 정도는 터두고 있습니다. 저분의 이름까진 미안하게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하긴, 오래 생활했으면 주민들이 모를 리가 없겠군요. 이사벨 경은 어디서도 꽤나 눈에 띄는 분이시니.”

“제가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험한 세상이기에 전투를 위한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주 드문 건 아니지만, 아담하기 짝이 없는 소녀가 풀 플레이트 아머 차림으로 다니면 당연히 주목을 받을 텐데.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이사벨의 모습에, 알렉스는 뺨을 긁적거리고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뭐, 워낙 미인이시니까?”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를 희롱하시는 겁니까?”

아. 좀 별로였나.

이맛살을 찌푸리며 얼굴이 굳히는 이사벨의 반응에, 알렉스는 헛기침을 하고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크흠! 그…… 어서 신전으로 안내해 주시지요. 이래 봬도 꽤나 기대하고 있는 터라.”

“아! 그래야지요. 저도 빨리 저희 교구 사람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를 인도한 이사벨이 멈춰선 장소는, 시내의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관 건물 앞이었다.

“알렉스 경. 이쪽으로.”

“어? 여길 들어갑니까?”

신전으로 바로 가는 줄 알았더니 뜬금없이 여관 앞에 선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의아한 기색을 한껏 담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는 길에 다른 용무를 보고 갈 수도 있긴 하겠지만, 여관에는 대체 무슨 일로?

규모가 큰 교구라 해놓고 설마 신전에 빈방도 없어서 미리 숙소를 잡는 건가?

알렉스가 눈빛으로 의문을 표하고 있는 동안.

말에서 내린 이사벨은 마중을 나온 종업원에게 고삐를 넘겨주고서, 알렉스와 눈을 맞추고 조금 부끄러워하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알렉스 경.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저하고 잠시 쉬었다 가십시다.”

“예?”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어째 술 한 잔 걸치고 밤거리를 거닐던 연인들 사이에서 나올 법한 말인데.

에이 설마?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수백 수천 마리의 마귀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말의 내용이 한 가지 의미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아, 알렉스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며 언어 사용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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