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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36화 (36/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6화

지하제단(5)

“뭔가 더 발버둥이라도 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더니, 영 시시하군.”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알렉스를 내려다보던 네크로맨서는, 실망감을 드러내며 유흥을 끝내고자 했다.

네크로맨서가 턱을 까닥이며 눈짓하자, 듀라한들이 알렉스의 몸을 찍어 누른 채 전신의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장을 전부 해체하고 나면 다른 기사들처럼 포박당한 채, 어딘가로 끌려가 실험재료가 될 미래를 기다려야 할 터.

“음? 이건…… 꽤 수준 높은 성유물이군.”

부러진 검을 꽉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던 알렉스는, 네크로맨서의 목소리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듀라한들이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쓰러져 있는 이사벨에게서 갑옷을 벗겨내려 했지만, 쉬이 손을 대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사벨의 갑옷은 신성력이 깃든 장비이기에 언데드들이 건드리고 싶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끈을 이용한 매듭과 버클로 연결하는 일반 판금갑옷과 달리 소유주의 의지대로 탈착되는 기능을 가졌기에, 타인이 손으로 벗겨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쯧. 그냥 그대로 묶어라.”

네크로맨서는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며 이사벨에게서 눈을 돌렸다.

흑마법으로 고등한 경지를 이룬 그에겐, 성유물이라 해도 충분히 강제로 벗겨낼 능력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대악마의 힘을 복구하기 위해 며칠째 상당한 기운을 소진한 상태이고, 실험재료들을 사로잡느라 추가로 마력을 소모하기도 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다 마무리된 것도 아니기에, 당장 성유물을 훼손시키겠다고 더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침입자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하던 일로 다시 돌아가려던 그때.

네크로맨서에게 알렉스의 음성이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그 나이를 먹도록 여자 옷 하나도 벗길 줄 모르나?”

막 등을 돌려 걷던 네크로맨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뭐라고 했지?”

“하긴, 딱 봐도 동정으로 늙은 것 같긴 하군. 그래서 이만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된 건가.”

네크로맨서의 표정이 경직되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군. 본교의 장로인 내가 취하고자 하면, 언제든지 무수한 여인들이-”

“글쎄. 젊어서부터 그만한 지위를 갖췄던 건 아니었을 텐데. 죽어라 노력해서 뛰어난 경지를 이루긴 했겠지만, 그사이에 다 늙어서 남자 구실도 못하게 된 건 아닌지. 할배, 서기는 서나?”

막 던진 말이긴 했으나 아주 틀리진 않았는지, 네크로맨서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일신에 지닌 힘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누구나 팩트로 맞으면 아픈 법이다.

“……귀한 재료라 깨끗한 상태로 가져가려고 했거늘. 아직도 기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손질을 해둘 필요가 있겠구나.”

늘어진 뺨을 푸들거리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니, 도발이 제대로 먹히긴 한 것 같았다.

알렉스를 구속하고 있던 듀라한이, 그의 양팔을 뒤로 꺾으며 위로 들어 올렸다.

방패는 벗겨지고 갑옷들도 거의 다 해체되어 가던 중이라, 알렉스의 몸은 가볍게 끌려 올라갔다.

샌드백처럼 들려진 알렉스의 앞으로, 다른 듀라한이 다가와 사정없이 주먹질을 했다.

“꺽!”

갑옷이 벗겨진 튜닉 차림의 몸통 위에 건틀릿으로 손을 덮은 듀라한의 주먹이 꽂히니,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은 충격이 뱃속을 뒤집어놓았다.

“웨엑!”

“그 철 쪼가리는 언제까지 잡고 있을 셈이냐? 뭔가 해볼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시도했어야 하지 않을까.”

구타를 당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부러진 칼을 놓지 않고 있는 알렉스를 보며, 네크로맨서가 비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위액을 토해내며 경련하던 알렉스가 힘겹게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채워졌다. 이 X새꺄.”

“……뭘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그렇게 입만 살아서는-”

네크로맨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렉스가 급격하게 몸을 움직였다.

검을 쥔 오른팔을 축으로 두고 거칠게 온몸을 뒤트니, 왼팔이 영 좋지 않은 모양새로 꺾이며 파열음을 냈다.

쁘지직.

왼쪽 어깨에서 끔찍한 통증이 몰려와 눈앞이 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알렉스는 고통을 꾹 참은 채 오른팔에 힘을 주어 자신을 붙잡은 듀라한을 뿌리쳤다.

한 뼘밖에 남지 않은 칼날이 작은 반원을 그리며, 듀라한의 팔 보호대를 파고들었다.

[홀리 웨폰]

내뻗어진 손목이 잘리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남은 힘을 쥐어짜 내 뛰어오른 알렉스가, 손잡이를 돌려 검을 역수로 쥐었다.

“쓸데없는 짓을-”

[심판의 일격]

듀라한의 목 안쪽으로 짧은 칼날이 파고들었다.

치명상을 입히기엔 부족한 길이여야 했으나, 심판의 일격과 홀리 웨폰의 추가 데미지가 모자란 위력을 채워주었다.

신성력이 파고들어 몸 안을 헤집자, 듀라한은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허, 그래. 듀라한 한 마리를 더 해치우긴 했군. 하지만 그래 봐야 뭐가 달라지지?”

시체와 함께 넘어진 알렉스의 몸 위를 다른 듀라한들이 덮치며 내리눌렀다.

“그게 최후의 발악이었다면 차라리 내게 덤벼보지 그랬나?”

“끄으, 이 정도 공격으로 고위 사령술사를 잡을 수는 없지. 다만…….”

듀라한의 밑에 깔린 알렉스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네크로맨서의 표정에 의문이 서렸다.

알렉스의 얼굴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딜 보고 있는 것이냐?”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다른 쪽으로 정신이 팔려,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기에.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렉스 Lv 45]

‘간신히 올렸다.’

소환수의 경험치 획득판정은 다른 암흑교도들을 해치웠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짰다.

이미 두 번째 타락기사를 잡았을 당시에 경험치 바가 상당히 채워졌었음에도, 스켈레톤과 듀라한들을 그렇게나 해치우며 아직 레벨을 올리지 못했을 정도.

그래도 다행히 지금, 마지막 한 조각을 채워 레벨을 올리게 되었다.

“야, 나 45렙 찍었다.”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인가?”

‘그래. 알아들을 리가 없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45레벨.

게임을 하던 당시 유저의 기준으로, 이제야 해당 클래스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평가되는 레벨이다.

이 레벨을 전후로 스테이터스의 증가폭이 제법 크게 바뀐다.

뿐만 아니라 직군에 상관없이 모든 캐릭터에게는, 45레벨부터 제한이 풀리는 스킬들이 있다.

그동안 올려둔 스킬 트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종류가 달라지긴 하지만, 무엇을 찍던지 다른 어떤 스킬들보다 압도적인 효율을 보이는 스킬이다.

‘신앙, 격노의 응징, 홀리 웨폰, 심판의 일격. 필요한 최소 레벨은 다 채웠다.’

지금껏 당장 필요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스킬들을 찍으며 성장해 왔지만, 상위 스킬에 대한 트리 역시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건을 채우며 활성화된 하나의 스킬에, 주저 없이 포인트를 사용했다.

[디바인 크로스 Lv 1]

45레벨 해금 스킬은 유저들의 취향에 따라, 1차 각성기니 필살기니 하는 식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만큼 강력한 위력을 갖추어 유저에게 사랑받는 스킬들.

알렉스가 선택한 디바인 크로스는 자신을 중심으로 신성력을 방출해 적을 섬멸하는 광역기로, 만렙을 찍을 때까지도 버리지 않고 우려먹는 명품 사골이라 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알렉스의 몸 안에서 신성력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다행히 스킬을 쓸 정도는 채워졌군.’

게임과 달리 레벨 업을 했다고 모든 부상이 치료되고 힘을 최대치까지 회복하진 않지만, 늘어난 스테이터스만큼 바닥났던 체력과 신성력이 채워지긴 했다.

“대체……? 분명 다 죽어가던 놈이었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네크로맨서가 경계심을 품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으나, 그보다 먼저 알렉스의 몸에서 신성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디바인 크로스]

알렉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십자 형태의 빛이 방출되며,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고 듀라한들을 집어삼켰다.

십자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걸쳐 있지 않은 놈들도, 강렬한 빛의 폭발에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며 형체를 잃어버린다.

몸을 구속하던 것들이 전부 사라졌기에, 알렉스는 바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아악! 이, 이놈. 어떻게 갑자기 이만한 힘을!”

얼굴을 가린 채 비틀거리며 물러난 네크로맨서가 고통에 신음하며 악을 질렀다.

일부러 도발을 해가며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속 붙잡아뒀었는데.

필살기라고 불릴 정도의 스킬이지만, 역시 레벨 차이가 상당하다 보니 이 정도로 놈을 쓰러뜨릴 순 없었다.

그래도 확실히 제법 피해를 입혔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알렉스는 떨어진 방패를 주워들고 네크로맨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으, 까불지 마라!”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를 내밀자, 해골의 형태를 한 흑색의 불꽃들이 알렉스를 향해 쏘아졌다.

데스 스트라이크.

음차원의 에너지로 타오르는 불덩이에 악령을 깃들게 한 사이한 마법이다.

급하게 사용한 주문이긴 해도, 어지간한 기사쯤은 단숨에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령술사의 흑마법.

퍼엉! 퍼버벅!

그러나 날아간 불덩이들은 빛으로 물든 방패에 의해 모조리 막혔다.

게임에서는 방패를 무기로 분류하지 않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방패에도 홀리 웨폰을 걸 수가 있다.

검과 방패에 이중으로 홀리 웨폰을 쓸 수가 없어 평소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테크닉이지만, 검을 잃고 방패 하나에만 의지해야 하는 지금은 유용한 방식이기도 했다.

“이, 이런!”

짧은 주문이었어도 결코 위력이 약한 마법은 아니었으나, 알렉스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스펠 가드]

방패에 홀리 웨폰을 걸어 신성력으로 덮은 것이 주효하기도 했고, 출정 전에 미리 찍어둔 스킬로 마법피격의 피해가 감소한 덕분이기도 하다.

조금 흔들리는 정도에 그칠 뿐 여전히 꿋꿋하게 밀고 들어오는 알렉스를 보며, 네크로맨서는 낭패한 얼굴로 다른 주문을 외웠다.

뛰어오는 기세를 죽이지 않으며 몸으로 들이받으려는 듯 가까워지는 알렉스를 피해, 바닥에서 일어난 그림자가 네크로맨서를 감싸고 순식간에 다른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계파에 따라 조금씩 방식은 다르지만, 흔히 블링크란 명칭으로 통합되어 불리는 공간전이의 마법이었다.

기사와 마법사의 전투에선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효용성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주문이기도 하다.

안전한 위치로 몸을 옮긴 네크로맨서가, 더욱더 위력적인 마법을 쓰기 위해 흑마력을 끌어모으려던 때였다.

“어억!?”

네크로맨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며 감출 수 없는 다급함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적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알렉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피해를 좀 입혔다고 해봐야, 내가 놈을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애초에 노림수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에.

제단 위로 단번에 뛰어오른 알렉스가 방패를 높이 들어 올렸다.

여전히 끔찍한 기운을 펑펑 풍기고 있는 거대한 손목이 눈에 들어온다.

“자, 잠깐! 안 돼!”

예상을 벗어난 위력적인 성법에 당황한 탓에, 침착함을 잃고 너무 멀리까지 거리를 벌렸다.

경악한 네크로맨서가 반사적으로 크게 외쳤으나, 당연히 알렉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전신의 체중을 하단부의 모서리에 전부 실으며, 알렉스는 신성력으로 덮인 방패로 대악마라 불리던 존재의 파편을 내리찍었다.

즈지직.

농밀한 어둠의 힘에 신성력이 파고들며,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동 안에서 무형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막대한 기운이 사방으로 꿈틀거리는 게 피부 위로 느껴지는 듯하다.

정확히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건진 마법적인 지식이 부족해 파악하지 못했으나.

[에픽 퀘스트 ‘다가오는 멸망의 위기’가 완료되었습니다.]

“흐하핫! 안 되긴 X발놈아! 엿이나 먹어라!”

기대하던 알림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며, 알렉스는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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