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5화
지하제단(4)
통로까지만 진입하면 위험요소가 많이 줄어든다.
넓은 공동과 달리 포위당할 우려도 없고, 폭이 좁기에 동시에 덤벼드는 적의 수에도 제한이 걸리게 된다.
‘이 안에서는 공간을 가득 채운 마기에 저항할 수 있게 만드느라 사제들이 다른 성법을 펼치기 어려웠지만, 통로 쪽으로 벗어나면 능력향상을 위한 축복이나 회복의 성법도 받을 수 있다.’
통로의 너비가 딱 대여섯 명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일렬로 섰을 때 가득 찰 정도이니, 사제들의 보조를 받으며 기사들과 함께 막아선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준 시간 동안 기운을 회복한 마법사들이 한방을 터뜨려준다면.
‘그런 식으로 추격을 뿌리쳐가며 움직이면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럼 적들이 계속 쫓아와도 병사들을 동원해 싸울 수 있어.’
출입구 앞에 진을 치고 좁은 계단 위로 올라오는 적들을 처리한다.
그렇게 되면 지형적 이점이 크기에 백 마리의 듀라한도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쿵.
“꺄악!?”
“이제 알아서 뛰십시오!”
기사들을 따라잡은 알렉스는 바닥에 던지듯이 코르넬리아를 내려놓고 검을 고쳐 잡았다.
싸우는 게 아니라 통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길을 막고 버티는 듀라한에게 그대로 달려갔다.
[홀리 웨폰]
[심판의 일격]
전력을 다한 검격이 빛을 뿌리며 나아갔다.
머리라는 급소가 없기에 몸통을 노리고 휘둘러진 검이, 갑옷을 가르며 듀라한의 상체를 대각선으로 잘라 버렸다.
조각난 몸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듀라한은 평범한 시체로 돌아갔다.
‘역시 언데드는 성기사의 밥이지. 그냥 무슨 전설의 명검으로 베는 것 같네.’
원래 언데드란 자잘한 부상 따위는 무시하며 반격을 가한다는 점이 무서운 법인데, 스킬들의 데미지 보정이 중첩되니 기사급 수준의 몬스터를 한 방에 파괴하는 위력이 나와 버렸다.
확실히 신성력과 흑마력의 상성이란 건, 비슷한 상대에게도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준다.
‘사령술사도 적당히 강한 수준이었으면 충분히 싸울 만했을 텐데. 하필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딱지가 기다리고 있어서…….’
“대, 대단하군!”
“팔라딘의 능력이란 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안타까운 마음을 기사들의 탄성이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통로까지만 들어가면 충분히 안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린 대로 통로 안에서 수비하며 퇴각하기 위해, 열심히 검을 휘두르면서 외치던 때였다.
갑자기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아나 일행들의 발목을 잡아챘다.
“가게 둘 것 같더냐?”
“허엇!?”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자,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어둠이 일렁이며 수십 개의 검은 손들이 솟구쳤다.
사령술을 이용한 제압기술인 암령의 손을 대단위로 펼친 것이었다.
열심히 뛰고 있던 일행들은 발을 붙잡히자 그대로 넘어졌고, 이내 온몸이 속박당해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제기랄, 놔라!”
여러 개의 손에 전신이 붙들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던 사람은 둘뿐에 불과했다.
홀리 웨폰을 두른 칼 덕분에, 손목을 살짝 까닥이는 것만으로 암령의 손을 베어낼 수 있었던 알렉스.
그리고 괴력으로 자신을 방해하는 손들을 잡아 뜯어낸 이사벨까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두 사람은 낭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초 지체한 사이에 가까이 다가온 듀라한들이, 몸으로 벽을 세워 출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데려와라.”
네크로맨서의 지시에, 듀라한들은 쩔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아, 안 돼!”
“끄흐흑! 신이시여! 저를 구원하소서!”
“컥, 케헥!”
듀라한들은 마법사와 사제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 올려, 몇 차례 주먹질을 가해 얌전히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위력이 낮은 짧은 주문이나마 발동하거나 언데드에게 독으로 적용되는 치유의 성법을 발휘해 두어 마리의 듀라한이 더 쓰러지긴 했지만, 딱히 상황이 더 나아질 건 없는 가소로운 저항이었다.
“어억! 그, 그만!”
“크아악! 명예롭게 싸우자 더러운 놈들아!”
기사들 역시 듀라한에게 붙잡혀 갑옷이 벗겨지고, 사제와 마법사보다 몇 배는 더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끄억!”
“흐으윽…….”
“모자란 녀석들이었긴 하지만 교도들의 목숨을 해쳤으니, 그들의 넋을 위로하도록 정성 들인 고문의 시간도 가져야 하겠지. 어차피 실험재료로도 써야 하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네크로맨서는 사로잡힌 인간들을 보며 쇳소리 같은 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절망 속에 빠진 가운데, 알렉스와 이사벨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달려드는 듀라한들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극의 속성을 가졌고 뛰어난 두 사람이라 해도, 수십 배의 전력 차이를 극복하기란 요원했다.
‘X발…… X바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솔직히 후회가 찾아왔다.
차라리 아까 다 버리고 도망갔더라면 끔찍한 꼴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떠올려봐야 무의미한 생각이지만.
베고, 후려치고, 찌르고, 밀쳐내며, 알렉스는 온 힘을 다해 몰려오는 적들과 맞섰다.
입에서 단내가 폴폴 났지만, 멈추는 순간 끝이라는 걸 알기에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간간이 쿨타임이 돌 때마다 심판의 일격을 사용해 확정적으로 킬을 내며, 듀라한들의 수를 제법 줄여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상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알렉스 경…….”
곁에서 함께 싸우던 이사벨이 힘겨운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저는 신을 위해 싸우다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알렉스 경을 끌어들이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썅! 그딴 소리 할 힘으로 하나라도 더 잡아!”
“하핫! 격식 없는 무례한 말투지만 어째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제 부족한 신앙으로는 더 이상 예루스께서 권능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군요.”
쨍그랑.
이사벨이 무기를 놓치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마치 기도하는 자세처럼 무릎을 꿇고 앞으로 고개를 숙인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턱이 바스러질 듯이 이빨을 악물었다.
듀라한 무리에게 가려져 더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사벨에게서 눈을 돌리고, 알렉스는 몇 차례 더 검을 움직여 적들을 쓰러뜨렸다.
“얼굴을 봐서는 풋풋한 애송이 같은데, 제법 실력이 있군. 하지만 부질없는 저항이란 걸 알지 않나? 머리까지 근육이 들어차 사고할 능력도 잃은 것이냐?”
네크로맨서의 조롱에도 알렉스는 묵묵히 몸을 움직였다.
혼자서 몇 마리나 해치웠을까?
거의 본능에 몸을 맡기는 듯한 감각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던 알렉스의 동작이 멈추었다.
챙! 짤그락.
칼날이 부러졌다.
‘……염병할 칼은 항상 뭐만 하면 깨지고 지랄이야.’
사실 칼이 멀쩡했어도 더 싸우긴 어려웠을 것이다.
신성력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고, 몸은 더 이상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다.
털썩.
‘으윽?’
갑자기 시야가 이상해져 의아해하던 알렉스는, 이내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디어 끝났군. 생각보다 전력 소모가 컸지만…… 뭐 상관없지. 이깟 노예들이야 또 만들면 그만이니.”
듀라한들이 다가와 쓰러진 알렉스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로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알렉스는, 어느 순간 본인이 제단 곁에 있는 네크로맨서의 앞까지 끌려왔다는 것을 자각했다.
쿵.
바로 옆에서 뭔가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곁눈질을 하니,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사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라딘 한 쌍이라. 괜찮은 재료를 손에 넣었군. 오래전부터 너희 성직자란 놈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보는 것이 내 희망 사항 중 하나였지. 아쉽게도 번번이 실패를 했었지만.”
네크로맨서의 말에 알렉스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성력을 품었던 몸은 죽은 후에도 흑마력이 잘 받아지지 않더군.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이번에는 연구의 성과가 나오면 좋겠구나.”
사제가 여섯이나 있으니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겠다거나, 꼭 연구를 성공시켜 너희 두 연놈을 듀라한으로 만들겠다는 둥.
정말로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었는지, 네크로맨서는 꽤나 말이 많아지며 즐거운 기색을 한껏 풍겼다.
눈을 끔벅거리던 알렉스가 슬쩍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부러진 검.
칼날이 한 뼘가량밖에 남지 않은 검이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 정도는 위협이라 여기지도 않는 거냐.’
그럴 만도 하긴 했다.
노괴물이란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저 네크로맨서가, 탈진으로 쓰러진 자신이 부러진 칼을 쥐고 있다고 신경이나 쓸 리가 없다.
알렉스는 최대한 냉철하게 자신의 상태를 살피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저건…… 대체 뭐지? 네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냐.”
“음? 그래, 궁금할 수도 있겠군.”
알렉스가 갈라진 음성으로 질문을 건네자, 네크로맨서는 제단 위를 힐끔 쳐다보고는 선심을 쓴다는 듯이 대답을 해주었다.
“대악마의 신체를 보존한 것이다. 성소의 제단을 통해 저것의 힘을 되살리던 중이었지.”
“……신전에서 악마의 힘을 복구한다고? 그게 말이 되나?”
“클클! 어리석은 놈. 신과 악마는 결국 인간이 붙인 이름일 뿐,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점을 빼면 그리 다를 것도 없지. 예루스만을 유일신이라 우기는 너희 머저리들은 기를 쓰고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신과 악마가 같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수긍하자, 네크로맨서는 살짝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꽤나 특이한 놈이로구나.”
“내가 조금 그렇지. 저걸로 뭘 하려던 건지도 알려주지그래?”
알렉스의 말에, 네크로맨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재미있는 녀석을 다 보는군. 마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특별히 알려주도록 하마. 이곳에서 뿜어지는 대악마의 마기에 이끌려, 대삼림의 몬스터들이 광란을 일으키며 몰려오게 될 것이다.”
네크로맨서의 답변에 알렉스는 움찔하며 되물었다.
“대삼림의 몬스터들이……?”
“아마 오늘 중으로 계획을 이룰 수 있을 테지. 그때가 되면 몬스터들의 이동 방향을 내륙으로 인도하는 것이 내 마지막 역할이니라.”
‘과연. 그런 식이었나.’
이야기로만 들었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삼림의 몬스터들은 초원의 오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함과 물량을 이루고 있을 터.
어지간한 대도시는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퀘스트가 가리키는 멸망의 위기란 그걸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제한시간 2h 56m]
잠시 퀘스트창을 확인한 알렉스는, 슬그머니 손에 힘을 쥐어보았다.
잠깐이긴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주 약간이나마 몸에 기운이 돌아왔다.
조금만 더 회복이 된다면, 심판의 일격을 한 번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그런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네크로맨서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크크큭. 대화로 시간을 벌었으니 이제 뭔가 해보겠느냐?”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모습.
알렉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내심을 들켰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려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짐작도 하지 못할 방법이 나에게는 있다.’
딱 한 번.
한순간의 작은 기회만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된다.
침을 삼켜 목구멍의 칼칼한 느낌을 가라앉히면서, 알렉스는 행동할 타이밍을 가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