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4화
지하제단(3)
스켈레톤은 네크로맨서가 레벨이 낮은 초기부터 부릴 수 있는 언데드이기에, 그리 강한 몬스터는 아니다.
몸체가 뼈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평범한 성인 남성이 몽둥이로 가격해도 쉽게 팔다리를 부술 수 있다.
훈련된 병사라면 두세 마리 정도는 무리 없이 홀로 상대할 만한 정도.
하지만 그것도 술자의 수준이 떨어질 때의 이야기이지, 고위 네크로맨서가 다루는 해골 병사는 뼈의 강도가 철과 맞먹을 정도로 튼튼해진다.
‘저쪽의 추정 레벨은 60대…… 면 좋겠지만, 어쩌면 70을 넘을지도.’
시체골렘을 만들어 다른 암흑교도에게 넘길 정도이니, 아마도 레벨 70대의 고위 사령술사로 예상된다.
그 정도만 되도 한 나라에서 최강을 다투는 기사거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파의 마스터급 마법사와 비견된다.
그만한 실력자가 다루는 소환수라면 해골 병사라 해도 수준이 상당할 터.
무장이라고는 갑옷도 없이 본소드 하나만 들고 있지만, 그런 만큼 몸놀림이 가볍기에 경무장 차림의 병사들은 아차 하는 사이에 썰려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군의 전위직은 전부 판금갑옷을 입었거나 무장에 충실한 중장보병들이다.
사제와 마법사에게 접근하는 놈들만 차단하면, 전열이 쉽게 무너질 일은 없어 보였다.
“흐아압!”
알렉스는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러 두 마리의 해골 병사를 단칼에 베어냈다.
수적으로는 상당히 열세이지만,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성기사는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함에 있어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는 직종.
고작 스켈레톤 따위는 홀리 웨폰을 두른 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게다가.
“예루스시여! 가련한 이들에게 안식을 내려주소서!”
뻐걱!
아군에는 이런 잔챙이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성기사가 있다.
괴력으로 장병기를 휘두르는 이사벨의 공격에, 몰려들던 해골 병사 서너 마리가 단번에 박살 난다.
뒤편에 있는 해골 병사들까지 파편에 맞아 부서질 정도니, 그녀 혼자서도 시간만 주어지면 스켈레톤들을 전부 해치울 기세였다.
‘문제는 고작 이게 다가 아닐 거라는 점인데.’
해골 병사들을 가뿐하게 베어 넘기며, 알렉스는 틈틈이 제단 앞에 서 있는 네크로맨서에게 시선을 보냈다.
무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보는 노인.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망할. 무슨 꿍꿍이지?’
이미 상당수의 해골 병사를 해치웠고 나머지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저쪽에선 뭔가를 더 하려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적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쓰고 있을 때였다.
“오염된 대지를 불사르는 화룡의 노여움으로!”
제단이 위치한 방향을 향해, 기사들의 머리 위로 거센 바람과 함께 굵직한 한줄기 화염이 쏘아져 날아갔다.
잘 싸우고 있는 전위를 보조하기보단,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술자를 직접 치는 것을 선택한 마법사들의 공격.
실제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압축가스를 점화하여 분사하는 화염방사기가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돌던 공기가 한순간에 후끈거리는 열기로 달아올랐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거센 불꽃이 네크로맨서의 전신을 덮쳤다.
“……무슨?”
알렉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불줄기에 완전히 집어 삼켜질 때까지도,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불길은 10초가량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헉, 허억…….”
“흐읏…….”
상당한 마력을 쥐어짜 낸 주문이었는지, 롤랑과 코르넬리아는 지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시야를 가리던 불길이 흩어지며, 네크로맨서가 서 있던 자리가 다시 드러났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는…….”
그을림 하나 없는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네크로맨서.
몸 전체를 감싼 채 흐릿하게 일렁거리는 거무스레한 기운이, 그가 어떤 보호마법의 일종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털 오라기 하나만큼의 타격도 입지 않은 네크로맨서가, 오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프리스트 여섯, 메이지 둘, 나이트 다섯.”
네크로맨서의 시선이 일행들을 훑고 지나가며 마지막으로 이사벨과 알렉스에게 이르렀다.
“그리고 팔라딘 둘.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기에 적당하군.”
무감정하게 내뱉어지는 말들.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를 살짝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필요 없다.”
화르륵.
해골 병사들의 텅 빈 동공 안에서 검붉은 불길이 피어났다.
기세가 갑자기 달라진 해골 병사들이, 다른 일행들은 무시한 채 오로지 일반 병사들만을 노리고 사납게 달려들었다.
“어억!”
“이, 이놈들이!”
“멈춰라!”
열정적으로 날뛰던 이사벨을 비롯해 다른 기사들이 놈들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함부로 자리를 비웠다가 진형에 구멍이 뚫리면 후위직들이 위험하기에, 병사들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변화는 단순히 해골 병사들이 사나워진 것에 그치지 않았다.
펑! 퍼벙!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병사들에게 달라붙은 스켈레톤들이 폭발을 일으킨 것.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일행들의 갑옷 위를 거세게 두드렸다.
“읏!?”
“아악!”
“사, 살려 줘!”
“이런…….”
날아든 뼛조각은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들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으나, 사슬갑옷을 입은 병사들에겐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나마 사슬을 걸친 부분은 큰 상처가 없었으나, 팔과 다리 같은 가죽으로 덮은 부분은 보호구가 갈가리 찢어져 뼛조각이 피부를 뚫고 박혀 들어갔다.
일행들을 포위했던 해골 병사들은 전부 터져나가 뼈무덤을 이루었고, 아군 병사들도 하나같이 치명상을 입어 바닥에 드러누웠다.
사방에 가득 차 있던 적들이 자폭으로 사라졌기에, 사제들이 다급하게 병사들을 향해 움직이며 치료의 성법을 펼치려던 순간.
탕-!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울리자, 더는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쩔그럭. 콰직.
사방에 뿌려진 뼛조각들을 짓밟으며 새로운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데군데 깨져 있긴 하나, 해골 병사와는 달리 금속질의 갑주를 입은 시체 기사들.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나타난 그것들의 수는 족히 백 마리는 되어 보였으며, 하나같이 목 위가 텅 비어 있었다.
언데드 몬스터의 하나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머리 없는 기사 듀라한.
좀비 계열 언데드의 상위 개체로, 해골 병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강력한 몬스터였다.
“빌어먹을…….”
“아아, 신이시여…….”
한 마리 한 마리가 최소 견습기사 이상이며, 평균적으로 평기사 수준에 육박하는 몬스터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만큼이나 불러내다니.
절로 탄식이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듀라한. 추정 레벨 30대 중반…… 아니, 고위 사령술사의 소환수이니 어쩌면 40대…… 이런 X발.’
빠드득.
상대와의 전력 차이를 가늠하던 알렉스의 입에서 절로 잇소리가 새어 나왔다.
턱에 힘을 주고 있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사기 치지 말라고 악을 지르게 될 것만 같았다.
“난 기사들을 좋아한다.”
쇠를 긁는 듯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일행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단련된 몸뚱이. 그건 꽤 아름다운 예술품이라 할 수 있지. 다만 딱 하나, 도대체 지능이 있는 것이 맞나 의심되는 기사 놈들의 머리통은 영 짜증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야.”
클클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처음으로 감정의 표현을 드러낸 네크로맨서가, 굳어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듀라한들은 완벽하게 내 취향에 걸맞은 노예들이지. 이제 너희 중 일부도 내 컬렉션 안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마.”
멍하니 네크로맨서를 보고 있던 기사들은,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제기랄! 후퇴합시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야!”
“퇴로를 확보하라!”
가장 상급자인 레스빈의 지시에, 기사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후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보다 한발 먼저, 출입구를 등지고 있던 사제들이 통로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조금 전까지 신을 부르짖으며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누구보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모습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상황판단이 빠르다고 해야 하나.’
체면 따위는 내던진 모습이었지만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도주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누가 먼저 가느냐를 따질 것도 아니고,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진 건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니까.
도망가야 한다는 아군의 판단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알렉스도 기사들과 함께 통로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저딴 놈이 있으니 멸망의 위기라는 명칭이 나왔지. 이걸 어떻게 나보고 해결하라는 거냐!’
지금의 전력으로 듀라한 백 마리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꽤 낮은 편일 테고, 설령 가능하다 해도 네크로맨서가 또 어떤 괴물을 불러낼지 모를 일이다.
이건 포기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네크로맨서가 불러낸 듀라한들이, 일행들을 반쯤 포위한 상태로 나타났다는 점.
전방에 배치된 놈들보다는 훨씬 수가 적지만, 출구로 향하는 길목을 막기 위해 듀라한 몇 놈이 양옆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망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길을 막아서는 놈들을 단숨에 해치우지 않으면, 금방 나머지에게 붙잡혀 퇴로가 차단되고 말 것이다.
“기, 기사들! 후욱, 어서 저 괴물들을 치우시오!”
신체능력의 차이로 순식간에 기사들에게 따라잡힌 안토니오 대사제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막 기사들과 함께 달려들려던 알렉스는, 문득 가장 믿음직한 동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선두와 후미가 뒤바뀐 상황에서, 이사벨은 듀라한 무리와 가장 가까운 뒷열에서 마법사들과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충분히 앞서나갈 능력이 있음에도, 가장 느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뒤에 남아 속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 전력을 다한 주문을 사용하느라 지친 마법사들은, 원래도 기사보다 느렸으나 지금은 더욱더 굼벵이 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이런 썅…….’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에 알렉스의 사고가 잠깐 정지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
언데드를 상대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이라면, 출구를 막아선 듀라한을 해치우고 누구보다 먼저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다.
다른 동료들이 붙잡혀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혼자서만큼은 살아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일부러 적에게 아군을 미끼로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때에 본인의 기량이 부족해 따라오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1, 2초 남짓의 짧지만 강렬한 고민 속에서, 알렉스는 이사벨과 시선을 마주쳤다.
“큭.”
왜 돕지 않느냐는 원망이나, 두고 가지 말라는 애원의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평소와 같은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내오는 이사벨.
알렉스는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들쳐 메!”
짧은 외침을 들은 이사벨이 움찔하며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곁에 있던 롤랑을 붙잡아 어깨에 걸쳤다.
이어서 그들과 합류한 알렉스가, 두려움에 물든 얼굴로 헥헥거리며 뛰던 코르넬리아를 들어 올렸다.
마법사들이 속도를 내주길 바라느니, 이편이 훨씬 확실하고 빠르다.
‘이게 잘하는 짓거린지.’
알렉스는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발을 놀렸다.
잠시도 머뭇거려선 안 될 상황이었으니, 지금의 결정 때문에 퇴로를 뚫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버릴 사람은 버리더라도 자신은 살았어야지 하고 후회를 할 수도 있다.
솔직히 짧은 기간 동안 함께 다니며 적당히 정이 들긴 했지만, 이사벨과의 관계가 목숨을 걸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몰라, X발. 그래도 두고두고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아도 되겠네.’
무슨 충동으로 위험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건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애초에 사람 감정이 딱 떨어지게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래도 덕분에 이런 위급한 와중에도 타인을 지키려 들며, 짐을 걸치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더 무거운 쪽을 선택하는 여자애 앞에서 쪽팔리지는 않게 되었다.
‘뭐, 근력이 남다른 이사벨이 롤랑을 드는 게 합리적이긴 하지만.’
“으으…….”
“떨어지면 그냥 두고 갈 거니 꽉 붙잡아!”
“흐윽!?”
신음을 흘리는 어깨 위의 짐 덩어리에게 엄포를 놓으며, 알렉스는 출구를 막아선 듀라한들과 맞붙고 있는 기사들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