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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32화 (32/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2화

지하제단

반쯤 무너진 허름한 옛 신전의 터.

오크들과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를 더 치르고 난 영지군은, 목적지로 삼았던 과거의 유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너무 조용하군요.”

“이교도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는데. 알렉스 경. 여기가 맞는 겁니까?”

“으음…….”

건물들을 더 뒤져봐야 알겠지만, 딱히 뭔가 눈에 띄는 것이 없어 알렉스가 조금 당황하던 때.

병사들을 지휘하는 부사관들 중 속된 말로 짬이 좀 되는 간부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기사들에게 다가와 보고를 전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보입니다.”

“음? 그게 사실인가? 내 눈에는 무너진 기둥이나 석판 같은 것들 밖에 안 들어오는데.”

“확실합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오히려 자국을 알아보기 더 편하더군요. 수는 열 명 내외에 시간은 오래된 것부터 꽤 최근까지. 빠른 것들만 추렸을 때 사나흘 사이에 남겨진 흔적도 있습니다.”

“오크들의 것은 아니고?”

“족적의 크기와 형상이 전혀 다릅니다. 짐승도 몬스터도 아닌 사람입니다. 뭐 신발을 신고 다니는 생물이 또 있다면 모르지요.”

꽤 상세한 보고에 수뇌부에 속한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외곽이라 하지만 오크들의 영역 안으로 이렇게 드나들 수 있는 인간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거론되었던 이교도들뿐일 것이다.

흔적을 따라 움직인 일행들은 유적의 안쪽, 작은 건물들이 무너진 폐허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발길이 여기서 끊어졌습니다.”

“그냥 폐허뿐이지 않은가?”

“잠시…… 이 부근은 뭔가 다르군요. 이끼의 방향이 뒤죽박죽인 것이, 주변 건물들과 달리 누군가 최근에 일부러 무너뜨린 걸로 보입니다. 꽤 수상하군요.”

“숨겨진 출입구라도 있다는 건가? 확인해 봐야겠군.”

병사들을 동원해 큼지막한 석재 파편들을 몇 번 퍼 나르자, 과연 예상대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윽, 이건……?”

“끄응.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듭니다.”

“음침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분위기군.”

안쪽이 전혀 보이질 않는 컴컴한 계단 안쪽으로부터, 감각을 굉장히 거슬리게 하는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횃불 대신 홀리 웨폰을 키고 안으로 잠시 들어섰던 알렉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꽤 깊어 보이는군요. 계단이 얼마나 이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알렉스의 말이 끝나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마법사 한 사람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조사대에서도 함께했었던 롤랑의 제자였다.

알렉스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못 미더운 기색을 드러냈지만, 마법으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도움이 될 터이기에 별말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품에서 무언가 빼곡하게 그려진 종이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운 마법사가, 계단 앞에 가만히 서서 주문을 외웠다.

“바람 속성에 친숙한 코르넬리아의 마법은 이런 탐색에 매우 유용하지. 재능도 아주 뛰어난 녀석일세.”

어떤 재주를 보이려나 생각하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알렉스의 곁으로 다가온 롤랑이 슬쩍 제자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코르넬리아?”

“내 제자 말일세. 아니, 이름도 모르고 있었나?”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보니. 사실 조사대에선 다른 소속끼리 서로 데면데면했잖습니까.”

“하긴 그땐 일이 이리 커질 줄 몰랐지. 교단의 인사들은 언제나 우리 마법사들을 못마땅하게 봐서 선입견도 있었고…… 그래도 자네는 다른 성직자들과는 성격이 꽤 달라 보이네만.”

많은 부분에서 다른 점이 있긴 하지.

입 밖으로 꺼내기는 곤란하지만.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튼, 저 녀석 말일세. 여태껏 실전 경험이 없었다는 게 유일한 흠이지만, 아마 조금 익숙해지면 어디를 가서도 한 사람 몫 이상은 하겠지.”

“예, 뭐. 그렇군요.”

‘하는 짓을 보니까 영 별로던데.’

왜 갑자기 자신에게 제자의 능력을 어필하는지 의아해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자니,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와 코르넬리아를 중심으로 맴돌았다.

이내 그녀가 손에 든 종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계단 아래로 쏘아져 모습을 감추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지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코르넬리아가, 1분쯤 지나자 숨을 크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굉장히 길군요. 500미터 정도까지 공간이 계속 이어져 있어요. 제 수준으로는 그 이상 알아볼 수가 없네요.”

“500미터? 땅속으로 그리 깊게 파고들어 갔단 말이오?”

“아뇨. 내려가는 계단은 금방 끝나고, 직선 통로가 길게 놓여 있습니다. 일단 확인한 곳까지는 생물체의 반응도 없었고요.”

도움이 안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유용하지도 않은 미묘한 정보다.

“흐음. 우리가 올 줄 알고 미리 함정을 파둔 건 아닌지?”

“여기까지 오면서 어떤 마법적인 방비가 감지되진 않았네. 이교도들이 땅속에 숨어 뭘 하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올 것을 알고 대비하고 있지는 않을 걸세.”

“애초에 모양새부터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군. 여기 신전건물에서 예전부터 쓰던 비밀통로처럼 보이는데.”

“병사들을 시켜 끝까지 수색할까요?”

“끄응, 잠시 고민 좀 해봅시다. 혹시 다른 통로로 이어져 있다면 애꿎은 병사들만 잃고 놈들을 놓칠 수도 있소.”

대화를 주고받던 수뇌부들은 결국 자신들이 나서서 안을 수색하기로 의견을 정했다.

입구에서부터 벌써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마당이니, 실력자들이 투입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어차피 병력을 다 밀어 넣기엔 통로가 비좁기도 하고…… 지난번처럼 사악한 요술을 부리는 이교도가 있다면 일반 병사들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겠지.”

“오크들이 더 나타날 수도 있으니 병사들은 여기 남겨두기로 하세.”

“부사관들은 병사들을 통제해 임시로 바리케이드라도 만들어 방비하고 있도록. 주변이 죄다 무너진 돌무더기니 자재는 충분하겠군.”

기존의 조사대 주역들과 케이트리아 교구에서 추가로 지원한 사제들. 거기에 무장이 탄탄한 중장보병 30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잘그락거리는 갑옷의 소음이 지속적으로 울려댔다.

‘더럽게 긴 통로네. 지하라서 공기도 영 안 좋고.’

횃불에 의지해 한참을 걸으며 음산한 기운이 조금 더 짙어지지 않았나 싶을 때였다.

직선이던 통로가 어느 순간부터 좌우로 굽이치더니,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뉘게 되었다.

“이런…….”

“이래서야 나아가기가 쉽지 않겠군.”

“내, 내가 탐색주문으로 확인한 부분까진 이런 길이 없었어요!”

중간 열에서 걷고 있던 코르넬리아가 한 소리를 들을 거라 여겼는지 목소리를 높여 변명했다.

확실히 한동안은 쭉 직진만 했으니, 틀렸다고 그녀를 탓할 일은 아니긴 하다.

“그 탐색주문이란 거,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게……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한 주문이라 당장은 무리에요.”

“골치 아프군. 이교도들이 숨어 있으리라 예상되는 곳이니 함부로 인원을 나눌 수도 없고.”

“일단 한쪽부터 순서대로 수색해 보는 수밖에.”

“갈림길이 더 나오지 않길 빌어야겠군.”

“형제님들. 제가 한번 힘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야 할지 정하고 있자니, 후미에 있던 사제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다.

“음. 그러니까…….”

하하호호 웃으며 출발할 분위기가 아니었던지라 하나하나 제대로 통성명을 하지 못해, 상대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사이먼 주임사제보다 품계가 높은 대사제라고 알고 있다.

“안토니오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 뭔가 방법이 있으시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한 수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바로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안토니오 대사제.

어느덧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통로를 밝게 비추었다.

‘성법? 어떤 종류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눈을 뜬 안토니오가 한쪽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무엇을 하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부정한 기운이 가장 강하게 흘러나오는 곳을 더듬어 찾았습니다.”

“아! 그런 방법이.”

알렉스는 살짝 놀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신이 알기로 게임에는 그런 종류의 스킬이 없었다.

‘성직자 스킬과 이곳의 성법이 100퍼센트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 건가. 하긴 당연한 사실인데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쳤구나.’

사제들의 성법은 순수하게 그들이 깨우친 신성력을 갈고닦아 사용하는 것이고, 알렉스의 스킬은 원리 같은 건 모른 채 오로지 결과만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특히나 게임의 스킬이란 건 제작계 클래스가 아니라면 대다수가 전투를 위한 것이니, 똑같이 신성력을 다룰 수 있다지만 쓰임새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존재할 터.

‘현실이 되며 달라진 것들이 많으니, 나중에 고레벨이 된다고 해도 내가 다른 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해선 안 되겠군. 나보다 훨씬 약해도 내가 모르는 유용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언젠가 만렙을 찍더라도 자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차례의 갈림길을 지나 안토니오의 안내대로 걸음을 계속 옮기자, 확실히 위험을 경고하는 듯한 감각이 점점 강하게 느껴졌다.

“느낌이 안 좋아. 앞에 뭐가 있기는 있나 보군.”

“이렇게 사악한 기운이라니…… 예루스여, 당신의 종을 가호하소서.”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듯한 기분 나쁜 공기가 점점 진해지며, 일행들이 경계심을 잔뜩 끌어올린 채 조심스레 나아갈 때였다.

크게 꺾이는 모퉁이를 돌아 몇 걸음을 옮기자, 거대한 공동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천 평은 족히 될 법한 넓은 공간.

어두웠던 통로와 달리 마법적인 조명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지, 횃불이 없어도 전체를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밝기가 유지된 곳이었다.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으음? 누구냐!”

정신없이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데, 저 앞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시선을 옮기자 거대한 제단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십수 명의 인원들까지도.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알렉스가 찾던 암흑교도들이 틀림없을 터였다.

‘저게…… 뭐지?’

그러나 알렉스의 눈은 그들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커다란 제단 위에 놓여 있는 어떤 물체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람의 것과 비슷한 생김새지만 그보다 열 배 이상은 더 커 보이는 무언가의 손목.

알렉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팔다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넓은 공동에 가득 들어찬 무지막지한 어둠의 기운이 전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미친…….’

레벨이 훨씬 낮았던 때.

루미넌 백작가에서 맞닥뜨렸던, 그저 전해져 오는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죽음이 다가오는 듯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와 비슷한 짙은 어둠의 힘이 저 손목의 형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막대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바로 앞에서 접한 탓에, 오히려 자각하는 것이 늦어졌다.

분명 여기저기에 빛을 밝히는 광원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통로를 지날 때보다 더욱 짙은 어둠 속 안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업이 막바지에 이르는 와중인데 별 잡스러운 것들이 다 몰려드는군.”

“케네스 님께서 노하시기 전에 어서 처리해!”

제단 주변에 있던 암흑교도들이 진한 흑마력을 흘리며 일행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블레싱]

알렉스는 스스로의 몸에 축복을 걸며 심호흡했다.

‘뭔가 위험한 게 있으리라고는 이미 예상했었다. 뭘 하고 있던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눈앞의 적들부터 처리해야 해.’

여전히 몸을 떨리게 만드는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다행히 축복을 걸고 나자 움직이는 데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자 역시나 핼쑥한 얼굴이 되어 벌벌 떨고 있는 아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이사벨을 포함한 신성력을 가진 교단의 인물들은 정신을 차리고 싸움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아아앗-!”

“나의 주 예루스께서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함께하시니…….”

“굳건한 반석이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사, 어떤 사악한 존재도 감히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옵고…….”

따스한 빛과 함께 포근한 기운이 일행들을 감쌌다.

안토니오 대사제를 비롯하여 여러 사제들이 신성력을 퍼뜨리며 부정한 기운에 대항하자, 파랗게 질려 있던 아군들의 안색이 점차 평온해진다.

“헛!?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제, 젠장. 왠지 몰라도 살짝 지린 것 같은데…….”

“입 다물고 전투나 준비해! 온다!”

‘그렇지! 사제들이 있어서 다행히 문제는 없겠군.’

안정을 되찾고 부산히 움직이는 아군들을 보며 걱정을 접은 알렉스는, 검과 방패를 단단히 붙잡고 숨을 길게 들이쉬며 자세를 잡았다.

케이트리아에 도착하면서부터 휘말리게 된 거대한 사건에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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