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31화 (31/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31화

진격

“창 세워! 세우라고!”

“끄워어억!”

“아악! 내 팔!”

“쫄지 마, 이 새끼들아!”

공포에 젖은 비명과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교차한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전장에서 발생하는 뜨거운 열기.

개미 떼처럼 뒤엉킨 인간과 오크들의 머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버텨! 손에 힘 풀지 말라고!!”

“좌측 진형이 무너집니다!”

“그냥 빠져! 기병들이 밀고 나간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지면이 약하게 흔들렸다.

몸에 부러진 창을 꽂은 채 성난 함성을 지르며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려던 오크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전마와 부딪치고 피를 뿜으며 바닥을 굴렀다.

“크와악!”

“입 냄새 난다, 망할 돼지 놈들아!”

투지를 불태우며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알렉스는 고삐를 살짝 당겨 속도를 조절해 가며 정확히 목을 베고 지나가는 칼질을 선사해 주었다.

‘확실히 감각이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군.’

[라이딩 Lv 2]

기마술에 포인트를 하나 더 투자해 둔 덕분에, 지난번처럼 말 위에서 어설프게 싸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레벨로 최대치를 찍을 수 있는 라이딩 스킬은 굳이 마스터할 필요 없이, 2레벨만 투자해도 알렉스에게 능숙한 기사다운 마상 전투를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

‘맥스 레벨이면 거의 인마일체의 경지로 들어설 것 같지만…… 포인트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니 당장은 2레벨로 충분하겠지.’

43레벨로 올라서며 얻은 6개의 포인트.

알렉스는 라이딩을 포함해 여러 스킬들에 포인트를 골고루 분배해 놨었다.

[신앙 Lv 7]

[블레싱 Lv 3]

기존에 있던 스킬들 중 효용성이 무난한 것들로 하나씩.

[심판의 일격 Lv 2]

[스펠 가드 Lv 1]

그리고 새로운 공격스킬과 방어스킬을 추가로 습득해 두었다.

심판의 일격은 격노의 응징과 달리 발동제한이 필요 없는 기술로, 사용 시 적을 공격할 때마다 무기 끝에서 신성력을 방출해 대상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는 스킬이다.

데미지 보정이 있어 그냥 칼을 휘두를 때보다 더 강한 공격을 가할 수 있기는 한데, 사실 평범한 적에게는 신성력으로 인한 추가 피해가 미미한 수준이긴 하다.

상처 주변에 뜨거운 물에 덴 것처럼 작은 화상이 생기는 정도.

그럼에도 굳이 2레벨로 투자해 둔 것은, 심판의 일격이 신성력과 상극의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엄청난 효율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언데드나 악마계열, 혹은 암흑교도처럼 마기를 품은 존재라면, 신성력에 의한 추가 피해가 오히려 물리적인 데미지보다 훨씬 더 높아지기도 한다.

‘거기에 더 끝내주는 점은 홀리 웨폰의 성속성 추가 피해와 중첩으로 딜이 박힌다는 거지.’

홀리 웨폰이 걸린 무기로 심판의 일격을 사용한다면, 특정 몬스터에 한해 일반 공격의 수십 배에 달하는 위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음. 수십 배까지는 조금 오바인가?’

아무튼 탱커 포지션인 성기사로도, 주력 딜러 직업군이 부럽지 않은 데미지를 뽑아낼 수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퀘스트 달성을 위해 상대해야 할 적으로 암흑교의 고위 네크로맨서를 상정하고 있기에, 여러모로 가치가 높은 스킬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문피해로 입는 데미지를 감소시켜 주고 정신계 상태이상의 내성을 높이는 스킬인 스펠 가드.

몬스터 사냥에서의 효율은 물론, 대인전이나 전쟁 컨텐츠 때문에라도 꼭 찍어두는 성기사의 필수 스킬 중 하나다.

현실이 된 지금은 마법을 쓰는 몬스터를 거의 만나지 못해 과연 괜찮은 효율이 나올지 애매하긴 한데, 암흑교도들이 대부분 흑마법을 다루는 것을 생각해서 하나 정도는 찍어두기로 했다.

‘아군의 공격에 휩쓸리는 것도 생각해 둬야 하고.’

주변의 오크들을 베어 넘기던 알렉스의 시선이 잠시 후방 쪽으로 향했다.

롤랑을 비롯해 몇몇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며 오크들이 뭉쳐 있는 곳을 향해 마법을 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게임에서나 여기서나 마법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공격 수단에 속한다.

문제는 게임에선 유저끼리 파티를 맺으면 아군에게 어떠한 피해도 들어가지 않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그런 호의적인 시스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전위직인 알렉스로선 싫어도 아군이 발동한 마법에 피해를 입는 것을 염두에 둬야 했다.

‘……쟤도 또 껴 있네.’

지난 전투에서 한번 트러블이 빚었었던 여마법사가 보여, 알렉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미리 경고를 해주는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마구 마법을 쏴댄다면, 아군이고 나발이고 대가리를 깨버려도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다른 마법사들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떨어지긴 하겠지만.

“2진이 몰려온다!”

누군가가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귀를 찔러, 잠시 잡생각을 떠올리던 알렉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전방에 백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오크 무리가 몰려오고 있다.

조금 전에 깨부순 놈들과 비슷한 수였으나, 이번에는 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크고 사나운 기세를 풍기는 오크가 드문드문 섞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일반 전사 계급의 상위 개체인 대전사, 오크 하이 워리어들.

평범한 오크 워리어보다 전투 능력이 배는 뛰어난 놈들이기에, 방진을 갖춘 병사들이라 해도 조금만 틈이 생기면 한순간에 파고들어 날뛸 능력이 있는 몬스터다.

“중앙을 비우고 적을 유도해라!”

“양익은 순차적으로 반보씩 전진!”

“거리 조절 똑바로 못하냐! 옆 전우들 다 죽일 거야!?”

병사들의 대열 양쪽 끝이 조금씩 앞으로 나서고, 가운데 진형의 병력밀도가 듬성듬성하게 변한다.

깔때기 위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오크 무리가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손님 받아라!”

“오크 따위에게 죽는 새끼는 내가 친히 저승에서 끌고 와 다시 특훈을 시켜주마!”

“으아아아-!”

중앙의 후열에 밀집해 있던 영지군 최정예인 중장보병들을 지휘하면서, 전장의 광기에 취한 기사들이 품위를 집어던지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뛰쳐나갔다.

알렉스 역시 열기에 휩쓸려, 아군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말을 몰았다.

흥분한 와중에도 경험치 욕심은 잊지 않아, 평범한 오크들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대전사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40대 레벨이 되어 일반 오크들로는 경험치를 코딱지만큼 밖에 얻지 못하지만, 상위 개체인 대전사쯤 되면 그래도 아직 주워 담을 만한 양을 토해낼 것이다.

“쿠와악!”

“오냐, 반갑다.”

도끼질로 인사를 해오는 오크 대전사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기사를 위한 대형 랜스가 아닌 영지군의 보급품으로, 품질이 썩 좋진 않지만 마상 전투를 위해서 잠시 빌려온 무기.

말 위에서 다루기에 창만큼 효율적인 무기도 드물다.

높이의 장점과 길이의 장점이 합쳐지면, 창술의 달인이 아니라 해도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거기에 속도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일격필살이란 표현이 들어맞는 위력이 생긴다.

딱히 기교랄 것도 없는 단순한 찌르기에 불과한 일격이었으나, 오크 대전사는 직선으로 달려들기를 포기하고 창대를 쳐내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아무리 투지로 똘똘 뭉친 오크 대전사라해도, 기마창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거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빠르게 발을 놀리며 달려들 틈을 찾는 오크 대전사를 향해, 알렉스 역시 말을 조종해 위치를 바꿔가며 창끝을 놈에게 겨누었다.

‘창술 스킬이 없어도 제법 손에 익은 느낌이 나네.’

소드 마스터리 스킬을 그럭저럭 수준급으로 올려둬서 그런지, 창은 처음 다루는 무기인데도 그리 어색하지가 않다.

검술과 창술은 무기를 다루는 방식부터가 크게 차이 나지만, 결국은 무기술이란 분야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게임에서는 검술 스킬을 마스터하고 창을 들어봐야 아무런 보너스가 생기지 않지만, 현실이 되고 나니 마스터리 스킬의 숙련도가 다른 무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듯한 감각이다.

6레벨의 검술을 창술로 치환하면 2~3레벨 정도는 되는 것 같달까?

‘다른 무기 스킬을 안 찍어도 조금이나마 보정치를 받는다니, 이것도 개꿀이라 할 수 있군.’

푸슉.

끈질기게 상대를 쫓아 움직이던 창날이 결국 가죽을 뚫는 소리와 함께 피를 머금었다.

다만 아쉽게도 기술이 부족한 탓에, 오크 대전사를 한 방에 처치할 정도의 위력이 나오진 않았다.

“끄와악!”

오크 대전사가 성난 고함을 지르며 배를 뚫고 들어온 창대를 붙잡아 당겼다.

“터프한 놈이구만.”

힘 싸움을 벌여봐야 나무로 만든 창대가 부러지고 끝날 게 뻔하기에, 알렉스는 창을 놓아버리고 등자에서 발을 빼냈다.

이어서 말에서 뛰어 내려온 알렉스가 실드 차지를 발동하며 오크 대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 실력을 다하려면 역시 아직은 두 발로 뛰는 게 낫긴 해.’

“크와아!”

배에 박힌 창을 쥔 오크 대전사가, 피가 솟구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을 뽑아내어 알렉스를 향해 휘둘렀다.

가볍게 방패를 들어 막아내자 창 자루가 박살 나며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과연 상위 개체답게 맷집도 근력도 상당한 놈이다.

물론 그래 봐야 알렉스의 방어를 뚫을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다.

부러진 창을 던지고 본래 들고 있던 도끼를 양손으로 잡아 내리치는 오크 대전사의 공격에도, 알렉스는 큰 부담 없이 방패로 피해를 흘려내며 틈틈이 놈의 몸에 칼집을 내주었다.

‘방패 하나로 미친 짓을 몇 번 벌이고 나니, 이 정도 공격은 가볍게만 느껴지네.’

복부에 바람구멍을 여섯 개쯤 추가해주자, 피를 줄줄 쏟아낸 오크 대전사는 결국 힘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꿈틀거리는 녀석의 뒷목에 칼을 꽂아 마무리를 지은 알렉스는, 주변을 돌며 오크 잡병들과 대전사 몇 놈 더 처리했다.

아군들이 꽤 잘 싸워준 덕분인지 전투는 금방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오크들은 거의 다 시체가 되어 바닥에 드러누워 있고, 아군의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아 대승이라 할 만한 싸움이었다.

경험치가 제법 들어왔는데, 아쉽게도 레벨이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알렉스 경! 저기 목표물이 보입니다!”

검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외침에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인위적인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서 오크 잔당들을 때려잡던 다른 기사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행정관들이 내어준 지도가 틀림이 없군.”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이쪽 구역에 오크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외곽에 위치해 있다 보니 규모가 작은 잔챙이 부족들만 모여 있던 모양이오.”

오크들은 한 지역에 군락을 이루어 살아가지만 몇몇 강력한 전사들을 중심으로 나뉘어 부족 단위 생활을 하기에, 각각의 활동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

신전이 위치해 있는 이곳 지역은 다행히도 예상보다 적은 수의 오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부족의 오크들이 낌새를 느끼고 몰려오겠지만, 당장은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이교도들이 오크를 부린다기에 훨씬 많은 수를 예상했는데…….”

“놈들도 다룰 수 있는 오크의 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음. 과연.”

생각해 보면 암흑교도 결국은 인간들의 집단인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오크들과 온전한 협력이 되진 않을 것이다.

환영이나 세뇌와 같은 계통의 마법으로 소규모 무리에 대한 일시적인 통제가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오크 군락 전체를 조종하지는 못할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아무튼, 고지가 저 앞이니 빠르게 정리하고 출발합시다.”

잠시 부대를 정비한 영지군은 시야 안에 들어온 구조물을 향해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제한시간 5h 52m]

‘6시간…… 그래도 제한을 넘기진 않겠군.’

퀘스트창을 확인한 알렉스는 슬쩍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 고대의 신전에 다른 암흑교도들이 숨어있다면, 아무리 전투를 질질 끈다고 해도 남은 제한시간 안에는 승부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얼마나 강한 놈이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전부 깔끔히 해결하고 몸 성히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말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