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8화
어둠의 추종자들(2)
“쯧. 하급신도 놈들은 역시 오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 도움이 안 되는군. 한심한 것들! 쓸 만한 녀석들은 다 대업을 위해 몰려갔으니 어쩔 수 없지만.”
알렉스의 말에 변명하듯 투덜거리는 어둠사제.
숨겨둔 한 수가 더 있을까 살피던 알렉스는, 딱히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자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역시 저놈들도 뭔가를 꾸미느라 이런 상황에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군. 나중을 기약하지 않고 지금 발견하길 잘한 거야.’
지켜주는 전위가 없는 어둠사제는 레벨이 높아도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더 볼 것도 없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쳇!”
혀를 찬 어둠사제가 알렉스를 향해 흑마력을 발산했다.
어둠사제의 의지에 따라 발현된 흑마법이 강력한 구속구가 되어 알렉스의 몸을 짓눌렀다.
둔화 디버프.
단체가 아닌 개인을 대상으로 사용했기에 위력이 상당했다.
‘으윽.’
몸이 느려진 알렉스가 블레싱을 걸어가며 주문을 해주하려 했지만, 반쯤 회복되는 것에 그칠 뿐 흑마법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전력으로 뛰던 도중에 갑작스레 밸런스가 무너졌기에, 알렉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알렉스 경!”
앞을 막던 암흑전사들을 이제 막 전부 해치운 이사벨이, 알렉스를 향해 달려왔다.
“아냐! 저놈부터!”
“읏, 알겠습니다!”
시간을 주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기에, 알렉스는 다급히 손짓하며 어둠사제를 가리켰다.
뜻을 알아들은 이사벨이 방향을 바꿔 어둠사제를 향해 돌격했다.
‘처리할 수 있겠지?’
살짝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의 거리가 좁혀지는 걸 바라본다.
근접전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이사벨이 놈의 모가지를 따버리겠지만, 눈을 감고 중얼거리고 있는 어둠사제도 뭔가 거창한 걸 준비하는 것 같아 방심할 수 없었다.
이사벨이 어둠사제와의 거리를 열 걸음 정도로 좁힌 순간.
“빌어먹을. 여기서 소비하기엔 아까운 힘이거늘.”
놈에게서 한층 농도가 짙어진 흑마력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드드드득.
어둠사제가 딛고 있던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알렉스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시체, 시체, 수많은 시체.
세 자릿수 이상의 시체가 들어간 것이 확실한, 뼈와 살점 그리고 해골과 장기들이 뭉쳐 만들어진 거인의 형상.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끔찍한 생김새의 괴물을 보며, 신음과도 같은 단어가 절로 흘러나왔다.
“어보미네이션…….”
다른 이름으로는 시체골렘.
고위 네크로맨서쯤 되어야 다루는 것이 가능한, 상급 레벨의 사령술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개척마을의 주민들 대다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진한 사기를 풍기며 대지에 선 거대한 시체골렘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왜…… 어떻게 어둠사제가 시체골렘을……?’
언데드를 부리는 건 네크로맨서의 능력이지, 직군이 다른 어둠사제의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제작한 네크로맨서의 수준에 따라 레벨이 달라지긴 하지만, 시체골렘은 기본적으로 고레벨일 수밖에 없는 상위의 언데드 몬스터다.
추정 레벨은 최소로 잡아도 60대.
NPC를 기준으로 보통 한 지방에서 적수가 없는 기사나 유명 학파의 장로급 마법사 정도가, 간신히 60레벨을 찍는 수준에 그친다.
시체골렘은 그런 자들이 목숨 걸고 싸워야 맞상대가 가능한 존재.
저런 괴물을 무리 없이 사냥하려면, 적어도 하나의 국가에서 최고를 다툴 만한 실력자가 나서야 한다.
‘이길 방법이 없다.’
게임을 기반으로 한 그런 제반 지식들을 갖추고 있기에, 알렉스는 현재의 전력으로는 저것에게서 승리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시체골렘의 머리를 대신하듯 목 부근의 살점 속에 하반신을 파묻고 있는 어둠사제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흣! 장로님의 권능은 언제 봐도 놀랍군. 이따위 버러지들에게 써먹어야 한다는 게 너무 아까우, 그윽!?”
말을 내뱉던 어둠사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시체골렘의 무릎께에서 살덩어리의 일부가 터져나간다.
“예루스 님의 이름으로 너의 존재를 부정하겠다!”
이사벨의 공격이었다.
상대와의 격차를 인지하고 굳어버린 알렉스와 달리, 여전히 신념의 불꽃을 두 눈에 담은 이사벨은 투지를 전혀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겁도 없이…… 진정으로 신을 맹신하기에 저럴 수 있는 건가.’
디버프는 이미 사라졌지만 두려움으로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던 알렉스의 눈빛이, 서서히 또렷해지며 안정을 되찾아갔다.
지레 겁먹고 포기했던 가능성을 이사벨 덕분에 약간이나마 엿보았기 때문이다.
‘덩치가 저래서 새 발의 피처럼 느껴지지만, 방금 타격은 확실히 제대로 들어갔다.’
타인의 정보까진 볼 수 없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알렉스는 이사벨의 실력이 레벨로 따지면 40대 초반쯤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근력에 치중된 신체강화라는 성법으로 공격력이 극대화된 이사벨이지만, 시체골렘과의 레벨 차이를 생각하면 데미지가 크게 박히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렇지만 그건 게임 기준의 계산일뿐이야. 현실의 세계에선 강인한 전사라도 어린아이가 찌른 단검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어.’
게임에서나 레벨이 깡패지, 뒤집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격차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게다가 저 시체골렘은 원래 술자의 손을 떠나 어둠사제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중이다.
아마도 술자에게 양도를 받았고 같은 어둠 속성의 마력을 가졌기에 통제가 되는 모양이지만, 본래의 위력을 전부 내지 못하는 상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면 추정 레벨을 더 낮게 잡을 수도 있다.’
검과 방패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웅! 쿵!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며 이사벨을 붙잡기 위해 손을 휘두르는 시체골렘을 향해, 전의를 되찾은 알렉스가 쏘아지듯 달려 나갔다.
‘덩치가 커서 위협적이지만 움직임이 굼뜨다. 어둠사제 놈이 제대로 조종하지 못한다는 증거야.’
이사벨은 몸놀림이 날쌘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체골렘은 다리 주변을 맴돌며 손이 닿는 거리에서 공격 중인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몸집의 차이가 있으니 고작 한 번의 타격만 허용해도 중상으로 이어지게 되겠지만, 어쨌든 싸움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히트 앤 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해 피해를 누적시키면 적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홀리 웨폰 Lv 3]
아직 쓰지 않았던 포인트를 홀리 웨폰에 투자했다.
지금은 방어가 아닌 공격력이 필요할 때.
특히 상대가 일반 몬스터가 아닌 언데드이기에, 홀리 웨폰의 효율은 최대치로 늘어난다.
이제는 더 이상 희미하다고 부를 수 없는 광채가 알렉스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예루스으읏!”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사벨처럼 신앙으로 무장한 팔라딘이 되자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검 자루가 부서져라 손에 힘을 주었다.
신이든 뭐든 무언가의 가호에 의지해야, 체고 8미터쯤에 달하는 괴물과 싸우겠다는 미친 짓을 시도할 수 있으리라.
신성력으로 빛나는 검이 시체골렘의 발목을 베고 지나갔다.
꽤 깊숙하게 벤다고 베었지만, 다리의 둘레도 상당하다 보니 별로 티가 나는 것 같지도 않다.
“크으!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
그래도 시체골렘의 상처로 신성력이 파고들자, 어둠사제가 인상을 쓰며 분노를 터뜨린다.
‘본인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소환물을 다루기 위해, 감각을 동기화한 채 힘을 쏟아붓고 있는 중이군. 그럼 조건이 나쁘지 않다.’
만약 시체골렘이 개별적인 전투가 가능하고 어둠사제는 흑마법으로 보조하는 형식이었다면, 진즉에 거대한 주먹에 깔려 피떡이 되었을 터다.
아무래도 시체골렘을 다루기 위해선 다른 흑마법을 쓸 여력이 남지 않는 모양이니, 기대하는 것보다 승산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퍼엉!
알렉스와 이사벨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분투하는 와중에, 시체골렘의 가슴에서 뜨거운 화염의 꽃이 피어났다.
“크아악!”
“늦어서 미안합니다.”
마법사 롤랑의 합류였다.
슬쩍 돌아보자 뱀처럼 지팡이를 돌돌 말고 타오르는 불길을 다루는 롤랑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제자 여마법사의 모습도.
‘당연히 그래야지. 마법사씩이나 되어서 아직도 정신을 놓고 있으면 되겠어?’
“오, 젠장! 저런 흉측한 괴물은 처음이군.”
“알렉스 경! 우리도 돕겠네!”
“예루스시여, 구원을 내리소서!”
사이먼 사제와 함께 묶여 뒤편에 물러나 있던 기사들도, 제법 안정을 되찾았는지 잘 정제된 투기를 내뿜으며 다가왔다.
‘좋아. 해볼 만하다.’
병사들은 여전히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주요전력들이 가세한 것으로도 승산은 충분히 올라왔다.
“무리하지 말고 최대한 조심해서 천천히 피해를 쌓아 갑시다!”
“알겠소.”
“마법사들, 시체골렘보다 위에 있는 저놈을 노려주십시오!”
“으음, 노력해 보지.”
저 덩치 큰 살덩어리를 파괴하기보단, 코어 역할이 되어 괴물을 조종하고 있는 어둠사제를 공략하는 편이 수월할 거다.
근접계열들은 안전을 위주로 조금씩 데미지를 누적하는 방식을, 반대로 마법사들은 한 방에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약점공략을 지시했다.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방식이지만 한 가지 방법만 노리기보단, 다각도의 방면으로 공략해가는 편이 더 잘 먹힐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멸의 화염이여-”
“만물을 에워싸는 무한의 숨결로-”
두 마법사의 주문과 함께 마력이 움직이며 공기가 진동한다.
화계열 속성을 주력으로 다루는 롤랑이 피워낸 불꽃과, 풍계열 속성의 주문으로 그를 보조하는 제자 마법사.
퍼엉! 화르륵.
바람을 품고 위력을 키워낸 불덩어리가 쏘아져, 목표로 잡은 어둠사제를 덮쳤다.
“크아아! 이 비루한 벌레 놈들이!”
거대 살덩어리의 꼭대기에서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는 어둠사제는 자신이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시체골렘의 한쪽 손을 들어 마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다리만큼이나 두툼한 팔로 머리를 가리고 있으니, 위력이 상당한 두 마법사의 공격으로도 방어를 뚫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마법을 막는다고 적의 신경이 머리 부근에 쏠려 있는 만큼, 아래에서 공략하는 전위직들의 위험도가 낮아지기에.
스걱.
“젠장! 검으로는 베어도 별 타격이 없는 것 같군!”
“중병기로 살점을 뜯어내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무기를 더 챙겨올 것을!”
“조바심내지 말고 차분하게 갑시다!”
알렉스는 기사들과 함께 착실하게 시체골렘의 다리 한쪽을 노렸다.
이대로 계속 싸우다 보면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이쪽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그러나 그것은 조금 안일한 생각이었다.
뻐억!
“꺄아앗!”
“이사벨!”
시체골렘이 휘두른 손을 피하지 못한 이사벨이, 10미터가 넘는 거리를 날아간 후 바닥을 뒹굴었다.
아군들이 상대에게 차근차근 피해를 입혀가고는 있지만, 어둠사제 역시 계속되는 전투로 점점 시체골렘의 통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전부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한층 정밀해진 움직임으로 이사벨을 날려 버린 뒤 허리를 크게 비튼 시체골렘이, 막 뒤편에서 공격을 가하려던 기사의 머리 위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쿵!
“조지안 경!”
“안 돼!”
대지의 여드름을 짜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대한 주먹 아래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처음으로 발생하게 된 사망자.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는 끔찍한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