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5화
조사대(2)
“끔찍하군.”
“이건…… 오크들의 짓인가?”
“내가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소.”
마탑의 마법사라던 40대의 중년 남성이 앞으로 나서며,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알렉스 역시 앞으로 나서진 않았으나, 굳은 시선으로 층을 이룬 시체들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구조물을 이룬 시체들은 마치 생기가 다 빨려 나간 것처럼 하나같이 비쩍 마른 외형이다.
다만 그럼에도 고통과 두려움에 찬 표정들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두드러져 있다.
하층민들이 모여든 개척마을이라 해도 심하게 피골이 상접해 있는 시체들의 모습에, 알렉스는 부정적인 감정이 들끓는 와중에 옅은 의문을 떠올렸다.
‘미라 같은 외형…… 오크 우두머리?’
다리를 습격했던 오크의 우두머리로 보이던 개체가, 샤먼의 주술을 받아 마법 방벽을 파괴했었다.
그런데 그 직후 저 시체들과 비슷한 꼴이 되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그때 샤먼의 주술을 보면서 굉장히 기분 나쁜 감각을 느꼈었는데.’
당시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이 기괴한 조형물을 보고 있자니 공통적인 부분이 어렴풋이 감지되는 것 같았다.
기억을 뒤적이던 알렉스는 그 느낌이 루미넌 백작가에서 퍼졌던 저주를 맞닥뜨렸을 때와, 어느 정도 흡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마법? 암흑교의 짓인 건가?’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도 언뜻 이런 느낌의 구조물들을, 암흑교도들이 등장하는 맵에서 몇 번 마주쳤었다.
모니터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마주하는 인식의 차이가 너무 커서,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
“이 안에서 뭔가 복잡하게 얽힌 마법의 흔적이 느껴지네만. 자세히 분석하려면 시간이 걸리겠군. 확실한 건 학계에 알려져 있는 오크의 주술과는 계열이 많이 다르다는 걸세. 오크의 짓이 아니야.”
“오크가 아니면 대체?”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겁니까?”
대강의 조사를 끝낸 마법사가 발언을 하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표정이 일그러진 기사들이 앞다투어 의문을 표했다.
대답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암흑교의 인간제단…….”
모두의 시선에 알렉스에게로 향했다.
“인신공양을 통해 음차원의 힘을 뽑아내는 사이한 흑마법입니다. 이미 사용이 끝나고 남은 잔재로 보이는군요.”
“흑마법? 아직도 그런 금기에 손을 대는-”
“그런 불경한!”
마법사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질문을 건네려는 차에, 이사벨이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인간제단에 다가선 이사벨이 손을 내밀어 시체를 만지더니, 이내 이마를 한껏 찡그리며 이를 드러냈다.
“알렉스 경의 말이 맞습니다!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에 반발하는 더러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럴 수가, 예루스시여…….”
케이트리아 교구에서 파견된 사제 사이먼이, 신을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에 불이 붙은 것처럼 분노가 서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이사벨은, 알렉스의 곁으로 돌아와 큰소리로 외쳤다.
“한 번은 우연이라 쳐도 두 번이나 이렇게 이단의 흔적을 마주하다니. 분명 서부 어딘가에 작지 않은 규모의 이교도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당장 돌아가서 교단에 알리고 대대적인 토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크흠, 이사벨 경. 조금 진정하시죠. 영주님의 명에 따라 먼저 이곳의 조사를 끝마쳐야 합니다.”
길길이 날뛰는 이사벨에게 영주의 기사 한 사람이 다가갔다.
레스빈이란 이름의 기사로, 조사대를 지휘하는 책임자의 자리에 있는 자였다.
하지만 조사대장의 말에도 이사벨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팔라딘은 신벌을 집행하는 지상의 대리자로서, 이단의 척결이야말로 그 어떤 임무보다 우선시해야 할 최선의 과업입니다! 당장 도시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사벨 경! 외부의 협력 인원이라 하지만 지휘권을 가진 내 말에 따르지 않고 이탈을 하겠다는 것은, 나의 주군이신 로델론 백작 각하의 명예를 업신여기는 처사요!”
교단의 성기사와 자신들의 상급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하자, 다른 대원들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주위를 에워쌌다.
교단과 부딪치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지만 병사로서 소속을 우선할 수밖에 없기에,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알렉스 경. 경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좀 원만하게 풀어볼 순 없겠소?”
레스빈과 함께 온 다른 두 기사가, 알렉스에게 가까이 다가와 사정하듯 말했다.
조사가 막 시작된 상황에 괜한 마찰을 빚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 두 기사의 이름을 떠올리던 알렉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지안 경, 티오핀 경. 저도 불필요한 힘 싸움은 원치 않습니다. 제가 잘 말해보도록 하지요.”
퀘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알렉스로선, 여기서 물러난다는 결정은 전혀 끌리는 선택이 아니었다.
암흑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각 교구의 성기사들에게 동원령을 요청하는 건 좋다.
제대로 된 전문가들이 모여든다면 훨씬 깔끔하고 안전하게 일을 해결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정보의 전파와 인원선출,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연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질질 끌다가 정작 퀘스트 명칭대로 멸망의 위기가 들이닥치게 되면?
‘어쩌면 우리끼리 충분히 해결할 만한 있는 일을, 괜히 미루다가 크게 키울 수도 있겠지. 지금 조사대를 이탈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냐.’
교단의 규칙을 세뇌에 가깝게 주입받으며 팔라딘이 된 탓인지, 사건이 암흑교와 엮이자 유연하지 못한 고지식한 면모를 드러낸 이사벨.
그러나 알렉스가 나서서 설득을 하자, 의외로 그녀는 쉽게 말을 듣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교단에 알리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사벨 경.”
“하지만, 알렉스 경! 이단과 관련된 증거를 발견하면 곧바로 교단에 보고를 하고, 먼지 한 톨까지 철저히 파헤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시간을 끌다가 오히려 때를 놓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조사를 진행하며 자세한 정황들을 더 확보하도록 합시다. 아니면 저와 따로 행동하시겠습니까?”
“읏! 아, 아닙니다. 알렉스 경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살짝 강하게 말하자 대번에 꼬리를 만다.
알렉스를 굉장히 우수한 재원이라 여기고 반드시 자신의 교구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개별 행동을 하자는 소리에 바로 주장을 접고 알렉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조사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지요. 분란을 일으켜 미안합니다, 레스빈 경.”
“……레스빈 경.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렉스가 상황을 그렇게 정리하자, 이사벨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남긴 했으나 레스빈을 향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소속이 여럿이니 잡음이 잠깐 나올 수도 있지. 이단과 관련된 일이라니 우리도 더 철저하게 조사에 임하겠소.”
레스빈은 이사벨의 사과를 받으며, 고맙다는 듯이 알렉스를 향해 눈인사를 보냈다.
조사대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뭔가 또 발견되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작은 개척마을답게 수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딱히 나오는 게 없군.”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긴 한데.”
“음? 그게 무엇이오?”
특별한 무언가가 더 나오지 않던 상황에서, 중년 마법사가 운을 떼며 마을 중심의 제단을 가리켰다.
매장은 어렵지만 화장이라도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었으나, 모든 처리는 조사를 빠르게 끝마치고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기에 일단 내버려 둔 인간제단.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다시 마주하며 대원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마법사의 발언이 길게 이어졌다.
“저 흉물에 들어간 사람의 수는 넉넉히 잡아도 마흔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소. 반면에 이곳의 집들을 세어보니, 인구의 수가 못해도 백 명은 넘었을 것인데.”
“아! 머릿수가 맞지 않는군!”
작은 개척마을이라도 대도시인 케이트리아에서 흘러 들어간 이들이 적지 않다.
적어도 주민이 세 자릿수는 되는 규모의 마을일 텐데, 다른 시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생존자들이 빠져나간 걸까요?”
“그건 아닐 테지. 간다면 어디로 가겠소? 마을이 이 꼴이 나는 와중에 도망을 친다면 당연히 도시로 왔을 텐데.”
“하긴, 그런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지요.”
“여기가 가장 가까운 개척마을이니,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잖소?”
“확률이 낮긴 한데…… 과연 안쪽의 다른 마을이라고 멀쩡하겠습니까?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겠군요.”
이야기를 나누던 조사대원들은 이윽고 말에 올라탔다.
여기서는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으니, 이곳보다 안쪽에 자리 잡은 다른 개척마을로 이동하기로 했다.
두 번째 마을, 그리고 세 번째 마을까지도.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스산한 공기가 맴도는 텅 빈 마을 안에서, 보기 흉한 인간제단만이 조사대원들을 반겨주었다.
다른 곳에서도 여전히 주민들의 수는 맞지 않았다.
“나머지 인원은 대체 어디로…… 이교도들이 사람들을 끌고 간 건가? 무엇 때문에?”
“여기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나오는 곳이, 영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마지막 개척지라오.”
“거기서도 뭔가 단서가 없다면, 현재의 병력으로는 그 이상 더 진입하는 건 위험합니다.”
“어쩔 수 없지. 딱 그곳까지만 살펴보고 복귀하도록 하겠소.”
의견을 맞춘 조사대는 마지막 네 번째 마을로 향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네 번째 개척마을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오크다!”
“전투 준비!”
마을 입구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던 오크들이, 조사대를 보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유쾌하지 않은 광경들을 연달아 마주하며 스트레스가 쌓여 있던 조사대원들은, 몬스터를 만나자 눈에 불을 켜고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싹 쓸어버려!”
“끄워어억!”
숨길 수 없는 살의가 사방에서 진동하듯 터져 나왔다.
인간과 오크, 두 종족의 전사들이 거친 함성을 내지르며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