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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24화 (24/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4화

조사대

“깨어나셨군요. 알렉스 경.”

눈을 뜨자 단아한 용모의 소녀가 반색하며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몇 차례 눈을 깜박거린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이사벨 경. 여긴…….”

반사적으로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끊었다.

온전히 깨어난 정신이 그런 쓸데없는 걸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알려왔기 때문.

‘신전이군. 그래, 부상 때문에 기절했었지. 치료를 받고 깨어난 건가?’

기억을 더듬던 알렉스는 질문을 바꿨다.

“제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지금이 아마 7시쯤 되었을 테니…….”

“아, 그리 오래되진 않았군요.”

점심을 먹고 정오가 조금 지나 수비대의 주둔지에 도착했으니, 오크 놈들과 싸우고 정신을 잃은 건 아마 오후 4~5시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두어 시간쯤 만에 깨어난 것 치고는 몸이 상당히 가볍다.

교구의 사제가 치료를 해준 거겠지?

어쩌면 주교가 직접 성법을 걸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회복은 전문 힐러인 사제에게 맡기는 거야. 성능 확실하구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사벨이 말을 정정하며 오류를 수정해주었다.

“오후가 아니라 오전 7시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알렉스 경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마침 딱 맞게 깨어나셨습니다.”

“윽? 아예 날이 바뀐 겁니까? 이런…….”

알고 보니 꽤 오랫동안 퍼질러 잔 모양이다.

어쩐지 컨디션이 너무 괜찮더라.

“어제의 사건으로 도시가 꽤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라킨 경의 말대로, 몬스터가 그렇게 무리지어 나타난 것은 이십 년 내로는 기록된 바가 없다는 모양이더군요.”

“그렇습니까…….”

조잘거리는 이사벨의 말을 들으며, 알렉스는 슬쩍 퀘스트 창을 활성화시켰다.

퀘스트 발생 당시에는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터라,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었다.

[다가오는 멸망의 위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둠의 준동을 저지하십시오.]

[보상 : 대량의 경험치]

‘이번에도 꽤나 단출한 설명이시군. 보상은 경험치뿐인가.’

퀘스트 정보를 확인한 알렉스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별거 아닌 내용이지만, 그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땅. 딱 봐도 강 너머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다리 건너에서 등장한 몬스터들의 습격 이후에 생성된 퀘스트.

아마도 안전한 구역인 이 도시를 벗어나, 몬스터들의 영역과 겹쳐있는 개척지대로 향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어둠의 준동이란 표현을 봐서는, 지난번처럼 암흑교와 연관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추측일 뿐이지만 가능성은 꽤 높다고 생각되었다.

‘후우…… 너무 위험한 퀘스트인데.’

어떤 적을 상대해야 하고 그쪽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뭔가 그런 정보가 전혀 없으니 골치가 아프다.

그뿐이면 다행인가?

행동할 지역이 강 너머의 초원이라면, 괜히 퀘스트와는 관련도 없는 몬스터 때문에 고비가 찾아올 수도 있다.

‘게다가 엿 같은 건, 마냥 무시하고 넘어가기도 마음에 걸린다는 거지.’

퀘스트라고 해서 미증유의 힘이 자신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영 아니다 싶으면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있다.

다만 퀘스트의 명칭을 생각하면, 방치하고 지나갔다가 무시무시한 재난이 이 도시에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멸망의 위기. 이 명칭의 주체가 케이트리아라면…….’

케이트리아시는 델트시 같은 소도시와는 달리, 인구수가 몇 배는 더 많은 대형도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넘어갔다가 정말로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다면,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

자신이 선을 부르짖는 정의의 용사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떼로 죽는다는데 남의 사정은 알 바 아니라고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렉스 경? 듣고 계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무슨 이야기였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퀘스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영주의 명으로 정예들을 추려 조사대를 파견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교단에도 협조 요청이 들어왔고요.”

“아하?”

오크는 대삼림과 가까운 초원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로, 강 너머라 해도 인근 지역에서는 볼일이 드문 종족이다.

그런 오크들이 도시 주변까지 다가와 습격을 했고, 오랜 시간 동안 다리를 지켜주던 마법에 손상을 입히기까지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심상치 않은 일이기에, 조사를 위한 병력을 꾸리는 것은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교구장께서 제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시더군요. 영주의 행정관이 알렉스 경과 저를 지명하여 협력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예? 그건 또 무슨?”

난데없는 소리에 의문을 표하자, 이사벨은 뺨을 긁적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전투에서 있던 저희의 활약상이 꽤나 부풀려져서 보고된 모양입니다. 특히 알렉스 경에 대해서는 거의 신화 속 영웅처럼, 아! 물론 그럴 만한 일을 해내셨습니다만.”

확실히 병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을 정도로 대활약을 하긴 했다.

방패를 들고 빈틈을 막아선 게 전부이긴 하지만,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다리가 뚫려 수비대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경께서 꼭 참여를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이곳 교구의 소속도 아니고, 알렉스 경은 아직 서임을 받은 신분도 아니시니…….”

이사벨은 알렉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흐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내색이 느껴진다.

다만, 그렇게 되면 당초에 이야기했던 알렉스의 정식 팔라딘 추천이 늦어지니,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 모양이다.

이미 본인의 일정 때문에 케이트리아까지 동행했는데, 여기서 더 약속을 미루자고 하기는 미안할 터.

“이사벨 경은 조사대에 들어가고 싶으신 겁니까?”

“앗! 그렇습니다. 이곳 교구장님의 말로는 조사대에 파견할 인력이 사제 한 사람뿐이 없다고 하더군요.”

“사제 하나?”

꽤나 중요한 일일 텐데, 고작 한 명뿐이라고?

조사대가 몇 명으로 꾸려질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와의 전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사제 역시 귀한 인력이긴 해도, 고작 한 사람만 지원한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그 한 사람이 주교 본인인 것도 아닐 텐데.

“교구의 사정상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뭔가 처리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글쎄. 내 생각엔 우릴 이용해 먹으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농담이라고 넘기긴 했으나, 이사벨의 앞에서 자신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던 델트리온 주교.

분명 교구간의 정치적인 관계가 있을 텐데 그런 태도를 드러낸 건, 팔라딘의 자격을 갖췄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이사벨을 얕잡아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마침 알렉스와 이사벨이 어제의 일로 인지도를 쌓기도 했으니, 위험성이 높아 보이는 일에 자신들 교구의 인력들을 보내는 대신, 두 사람을 밀어 넣으려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강 너머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면, 개척마을들에도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교단에 몸담은 이로서 그곳 사람들의 위험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뒷사정 따윈 전혀 떠올려보지 않았는지, 순수하게 성직자로서 남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이사벨.

아직 세속의 때가 덜 탄 나이에 팔라딘이라는 자리에 오른 이답긴 하다.

“그래요. 같이 갑시다.”

알렉스는 이사벨과 함께 조사대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차피 퀘스트를 무시하기는 꺼림칙했으니, 부탁하지 않아도 그런 자리를 찾아봐야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 마당에 괜히 머뭇거리며 재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겠지.

“앗! 괜찮으시겠습니까? 글라즈번으로의 복귀가 많이 늦어질지도 모릅니다.”

우려와 달리 쉽게 수락이 나오자, 이사벨이 눈을 빛내며 재차 확인해왔다.

“누군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서야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알렉스 경은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었습니다!”

이사벨의 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굳이 부정하진 않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사대의 출정은 언제입니까?”

“정오까지는 합류해야 합니다. 좀 더 쉬고 계십시오. 제가 교구장님께 참가 의사를 밝히고 오겠습니다.”

발랄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이사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다시 한번 퀘스트에 대해 떠올렸다.

과연 잘한 선택일까?

저번 퀘스트처럼 별 탈 없이 완수하고, 레벨 업의 발판이 되어주는 사건인 걸로 마무리 지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알렉스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사제의 치료를 받은 후에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딱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었다.

‘흠. 뭐 별수 있나. 또 몸으로 부딪쳐 봐야지.’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자잘한 걱정 따위는 그만두기로 한다.

퀘스트를 잘 해결하고 나면 성장에 진일보를 기대할 수 있을 터.

어차피 위기와 기회는 상황에 따라서 같은 말이나 다름이 없다.

돌아올 이사벨을 기다리며, 알렉스는 필요한 채비를 갖췄다.

* * *

수십 기의 기마가 달리며 거센 울림이 대지 위로 번져 나갔다.

넓은 초원을 거침없이 질주하며, 알렉스는 간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딱히 몬스터도 보이지 않고, 일행이 많으니 주변을 경계한다고 긴장할 필요도 없네. 마음 편히 달릴 수 있어서 좋구만.’

알렉스는 자신을 호위하듯 세모꼴로 주변을 둘러싼 채 움직이는 병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동성을 생각해 전원 기병대로 이루어진 조사병력이 50명에, 그중 3명은 영주의 기사들이다.

일반적으로 백작급 귀족이 상시보유하고 있는 사병의 수는, 몇백에서 많아도 천 명을 넘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부유한 귀족을 기준으로도 1:3을 넘기 어려운 정도.

어딘가와 전쟁을 준비 중인 게 아니라면, 기병을 세 자릿수 이상 운용할 수 있는 귀족은 매우 드물다.

그러니 변경백임을 감안해도 기병으로만 구성된 50인의 병력이란 건, 영주가 꽤나 신경을 써서 조사대를 꾸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거기에 교단의 인력이 알렉스와 이사벨, 그리고 케이트리아 교구에서 파견된 사제 한 명.

추가로 마탑에서 나왔다는 마법사 두 명을 더해, 총인원은 55명이었다.

‘실제 마법사는 처음 보는데…… 과연 게임과 얼마나 차이가 나려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후위에 배치되어 있는 마법사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던 알렉스는,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으니 속도를 줄이고 경계 수준을 올리라는 신호다.

조사대의 목표는 초원 최심부에 서식하던 오크들이, 도시와 가까운 거리까지 진출해 자리를 잡았는지 확인하는 것.

다만 무작정 돌아다니기보단, 소재가 파악되어 있는 개척마을들의 상황을 먼저 살피기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다.

“알렉스 경. 감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고함을 지르지 않고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조사대가 감속하자, 바로 곁에서 달리고 있던 이사벨이 말을 걸어왔다.

“예. 저도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저 앞에 목적지로 잡았던 개척마을이 보인다.

한데 분위기가 영 싸했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마치 비어버린 폐가를 보는 듯한 기분.

“주민들이 다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오크놈들에게 당한 건가?”

이어서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조사대가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X발!”

“……저게 뭐야?”

“맙소사-!”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마을의 중심으로 나아가던 조사대는, 충격적인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인원들이 욕설을 내뱉거나 말문이 막힌 채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뒤틀린 광인 예술가가 만든 것처럼 보이는 탑 모양의 기이한 조형물.

‘그것’의 재료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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