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3화
위기의 케이트리아(4)
쿠웅.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진 바움과 오크가 바닥을 뒹굴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양옆으로 갈라지며 피한 탓에 깔리는 사고는 없었지만, 급하게 움직이던 이들이 일부 넘어지고 서로 부딪치며 자잘한 상처가 발생했다.
“어어! 일어난다!”
“뭘 보고 있어!? 어서 죽여!”
생명력이 강한 야생짐승과 몬스터답게 곧바로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두 생물체에 시선이 쏠렸지만, 알렉스는 그쪽을 살피는 대신 여전히 몸에 꽉 힘을 주고 버텼다.
아직 눈앞에 적이 잔뜩 남아 있기 때문.
콰앙!
“으윽…….”
망치로 전신을 두들기는 듯한 통증에 눈물을 찔끔 머금는다.
아무리 튼튼한 갑옷과 방패로 무장했다 해도, 1톤에 육박하는 무게의 바움과 충돌하고 버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렉스는 스킬의 도움으로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었다.
굳건한 태세.
일시적으로 방어력과 상태이상의 저항력을 올려주는 성기사의 밥줄 스킬 중 하나.
특히나 현 상황에서는 넉백 저항의 효과가, 그 값어치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피, 피해!”
“으악!”
일어나는 몬스터를 처리하려고 움직이던 병사들이 기겁하며 다시 물러난다.
두 번째 바움과 오크가 비슷한 지점으로 떨어지며, 자신의 동료를 깔아뭉갠다.
쿠웅!
“크윽!”
그동안 이어지는 세 번째 충돌.
알렉스의 앙다문 이빨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굳건한 태세 덕분에 철벽처럼 버티고 있는 게 가능했지만, 피해에 완전히 면역이 되는 건 아니다.
바움과의 충돌로 발생하는 충격량의 일부가, 스킬로 증폭된 방어능력을 뚫고 고스란히 알렉스의 몸으로 전달이 되고 있다.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돌진이 계속되었다.
알렉스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하고 흘러나왔다.
장기에 손상이 간 것이다.
구토감과 함께 머리가 핑 하고 도는 기분이 들었다.
몸 안의 뼈가 전부 부러져, 개수가 두 배쯤 늘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 만큼 했어. 이제 나도 피해야 한다.’
여섯 번의 돌진까지 막아낸 후.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여긴 알렉스가 스킬을 해제했다.
그러나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곧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누적된 충격이 워낙 크다 보니 다리가 풀려 버린 것이다.
“……망할.”
자신의 상황이 완전히 조졌음을 깨달은 알렉스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코앞까지 다가온 바움을 노려볼 때였다.
누군가 알렉스를 붙잡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알렉스 경. 괜찮은 겁니까?”
“이사, 베…….”
경탄과 염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사벨과 눈을 마주하며, 알렉스는 너무 힘을 주느라 일그러져있던 얼굴로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쉬고 계십시오.”
알렉스를 내려둔 이사벨은 등에 매달고 있던 폴액스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그녀는 힘차게 땅을 박차며, 전력을 다해 폴액스를 휘둘렀다.
가로로 낮게 휘둘러진 폴액스의 도끼날이, 막 방벽을 통과하던 바움의 다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무릎 주변이 잘려나간 바움이 쓰러지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자, 위에 올라타 있던 오크 역시 나동그라지며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직 열댓 마리가 넘는 바움 라이더가 더 남아 있기에, 이사벨은 자세를 유지하며 반복적으로 폴액스를 휘둘렀다.
“으음…….”
들어오는 바움의 다리를 딱 세 번까지 절단한 이사벨은, 시큰거리는 손목과 어깨의 통증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신성력으로 근력을 강화한 상태였음에도, 달려오는 바움에게 공격을 가하며 팔에 적지 않은 부하가 걸렸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정면에서 받아낸 겁니까? 알렉스 경. 그런 대단한 성법까지 갖추고 있었다니, 점점 더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이사벨이 바닥에 누워 있는 알렉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적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판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크들이 물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워억!”
오크 샤먼의 외침이 퍼지고 나자, 남은 오크들은 바움의 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전력의 절반에 가까운 바움 라이더들이 고작 두 사람에게 순차적으로 당했다.
거기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대형을 조절하며 전투에 끼어들었으니, 오크들의 입장에선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쏴!”
“그냥 보내줄 거냐!”
전열로 나서며 사격 시야를 회복한 궁병들이 오크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이놈 살아 있다!”
“찔러 죽여!”
“찢어 죽일 오크 새끼들!”
알렉스와 이사벨에 의해 바닥을 나뒹굴던 오크와 바움들은, 뒤쪽으로 대형을 바꾼 창병들의 창에 꿰여 비명을 내질렀다.
진입과 동시에 넘어진 녀석들은 충격을 해소하기도 전에 공격을 허용했기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후욱! 흐으…….”
“이, 이겼다.”
살아남은 오크들이 더 이상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도망친 뒤.
긴장과 흥분에 젖은 숨을 몰아쉬는 병사들 사이에서, 알렉스에게 다가가 부축하던 이사벨이 목소리를 높였다.
“보았는가! 홀로 저 난폭한 짐승들의 돌진을 막아내는 늠름한 모습을!”
병사들이 시선이 대번에 모여들었다.
이사벨은 병사들에게 알렉스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자세를 바꾸며 외쳤다.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루스 님의 은총, 신의 뜻을 받들어 이 땅에 기적을 행하는 대행자의 능력이다!”
“와아아악!”
“아아, 예루스시여!”
환호가 터져 나왔다.
비록 오크 바움 라이더들을 전부 막아낸 것은 아니지만, 방패 하나로 놈들의 돌격을 저지하던 알렉스의 뒷모습은 병사들의 뇌리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사벨도 뒤를 이어 활약을 보여주긴 했으나, 알렉스가 보여준 강렬한 인상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상식을 벗어난 그 모습은 기적이란 말 외에 다른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위용이었다.
“서(Sir) 알렉스!”
“알레엑스으읏! 위대한 팔라디이인!”
“신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흐어엉! 기사님! 날 가져요!”
마지막은 대체 어떤 새끼냐.
경의로 가득 찬 병사들의 외침을 들으며, 알렉스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치유의 힘을 발동하고 있지만, 워낙 몸이 상해서 쉽게 컨디션이 돌아오질 않는다.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알렉스 경. 저들의 신앙심이 더욱 굳건해지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 사베에, 겨으. 치, 치료르을…….”
“앗! 죄송합니다. 사제님이 있어야…… 어서 신전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댁도 일단은 사제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딴죽을 걸진 않았다.
이사벨도 성직자로서 사제의 서품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가 한 가지 성법 외에는 거의 다룰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지금은 빨리 신전으로 돌아가, 고위 사제의 치료를 받는 것이 최선이다.
어지러운 정신을 최대한 붙잡으며, 알렉스는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알렉스 Lv 36]
[잔여 스킬 포인트 1]
정신이 없는 와중에 레벨 업 알림을 본 것 같았는데, 확실히 레벨 한 개가 올라 있긴 했다.
‘방어만 한 것치고는 경험치를 꽤 먹었구나. 충돌 피해도 공적으로 계산이 된 건가.’
알렉스는 곧바로 스킬창을 열어 포인트를 소모했다.
다음 레벨 업에는 무슨 스킬을 익힐지 미리 생각해 둔 게 있기에, 괜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격노의 응징 Lv 1]
격노의 응징은 받거나 막아낸 피해량을 수치로 누적시켜,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모아둔 수치에 비례한 데미지의 강격을 날리는 공격 스킬이다.
안전을 위해 방어 위주의 스킬을 올리고 있던 알렉스에겐, 꽤 잘 어울리는 공격기였다.
‘처음으로 공격 스킬을 찍었군.’
실드 차지도 공격 판정은 있지만 돌진기로서의 활용에 더 중점을 두는 스킬이기에, 공격만을 위한 스킬을 배운 건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수비도 좋지만 막타를 잘 쳐야 경험치를 많이 얻을 수 있는 만큼, 확실한 한 방을 갖춰두긴 해야겠다는 판단으로 전부터 염두에 둔 스킬이기도 했다.
“알렉스 경! 이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성으로 후송해 드리겠습니다! 급양관! 어서 짐마차를 가져오게!”
“어엇? 대장님, 아직 보급품 정리가…….”
“지금 그딴 소리를 할 때야! 빨리 이분들을 모셔야 할 것 아닌가! 아참, 데이모르의 방벽! 마법이 훼손됐음을 알릴 전령도 보내야…… 에이! 그냥 나도 같이 다녀와야겠군! 서둘러 준비하게!”
“아, 알겠습니다.”
‘아?’
멍한 얼굴로 내면세계에 집중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들것에 실려 마차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서 걸을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상태가 별로인 것도 사실이기에, 알렉스는 그냥 눈을 감고 사람들의 인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에픽 퀘스트 ‘다가오는 멸망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뭐?’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려고 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알림이 떠올랐다.
퀘스트의 발생.
게다가 명칭도 뭔가 불길했다.
‘아니, X발. 뭐가 또 위기야?’
이곳 교구의 의뢰도 끝났으니 이제 그녀가 속한 교구로 돌아가, 팔라딘 서임을 위한 활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재수 없는 이름의 퀘스트가 발목을 붙잡는다.
달그락. 덜컹.
‘으윽…….’
마차가 출발하며 몸이 들썩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몸 상태가 안 좋은 마당에 신경 쓰이는 퀘스트와 마차의 진동까지 더해지며, 알렉스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알렉스 경. 금방 신전에 도착할 겁니다.”
안색이 핼쑥해진 모습을 보며, 이사벨은 걱정 어린 손길로 알렉스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알렉스는 결국 어지러움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말았다.
난폭한 운전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며, 기사들을 태운 마차가 케이트리아의 성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