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2화
위기의 케이트리아(3)
“전투 준비!”
“무기 반출 빨리빨리 안 하냐!”
“이 새끼들아! 발이 보이지!?”
주둔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막사에서 뛰쳐나온 병사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로 뛰어다니고, 간부들은 모여든 병력들의 무장을 점검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훈련받은 자들이라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다리를 향해 발을 맞춰 진군했다.
“알렉스 경! 몬스터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네 저도 봤습니다.”
“병사들을 도와 싸웁시다!”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보이자, 살짝 흥분한 표정의 이사벨이 알렉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알렉스는 침착하게 병사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일단 따라가 봅시다.”
몬스터 무리와 싸운다는 위험과 얻게 될 이득을 비교했을 때, 과연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
이사벨과 둘뿐이라면 안전을 더 고려했겠지만, 이만한 병력이 함께 있으니 그리 위험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나설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네.’
다리 중간쯤에 멈춰서 대형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을 살펴보며, 알렉스는 어쩌면 자신들이 활약할 새도 없이 전투가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고 있지만, 두려운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휘관인 그라킨은 아예 여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강 너머의 몬스터들을 토벌한다더니, 다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건가?’
병사들의 뒤에 서서 건너편을 지켜보는 그라킨에게 다가가자, 그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데이모르의 방벽을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저도 처음인데, 두 분께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군요.”
‘데이모르의 방벽?’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알렉스가 의아해하며 이사벨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지, 눈을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젓는다.
군부대에서 쓰이는 전술용어인가?
잠시 생각하던 알렉스는 그라킨에게 말을 걸었다.
“그라킨 경. 도움이 필요하진 않겠습니까?”
“하핫! 마음만 받겠습니다. 초원에서였다면 당연히 도움을 청했겠으나, 지금은 저희들로 충분합니다. 이 다리 위에서 저희는 무적이니까 말이죠.”
“대장님.”
웃음을 터뜨리는 그라킨에게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몬스터 출현, 유형 오크로 확인. 수 30여 마리. 전원 바움 라이더입니다.”
“하! 오크 놈들이 여기까지 머리를 들이밀다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오크.
익숙한 이름에 알렉스는 병사들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거리가 가까워져, 이제 슬슬 상대의 모습이 정확하게 눈에 보인다.
녹색의 피부를 가진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괴물.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굉장히 호전적이고 인간을 적대하기에, 몬스터로 분류되어 있는 아인종이다.
게임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워낙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종족이기에, 알렉스도 쉽게 놈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괜찮은 건가? 오크 30마리에 바움 라이더면…….’
알렉스는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크는 일반 병사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몬스터다.
게다가 오크들이 길들여 타고 다니는 바움은 초원에 사는 야생동물로, 현실의 버팔로와 비슷한 형태의 생물이다.
큰 뿔을 앞세워 달려드는 바움 떼의 돌진은 기사단의 랜스 차지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
30마리가 대단히 많은 수는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인 것이다.
이쪽 병사의 수는 눈대중으로 봤을 때 100여 명 정도.
알렉스가 군사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30여 기의 기병 돌격을 100여 명의 보병으로 막는 게 과연 쉬운 일일지 의문이었다.
‘해낼 수 있다고 해도 피해가 적지 않을 텐데, 어떻게 이리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거지?’
이들이 죽음도 불사하는 군기로 정신을 무장한 상태라서일까?
아니면 설마 일당십도 가능한 정예 중의 최정예로 이루어진 부대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자니, 저 반대편 다리 앞에서 오크들이 멈춰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5기의 오크 라이더들이 다리에 올라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차 5대가 나란히 지나가도 될 법한 너비의 다리인지라, 바움 5마리는 여유롭게 거리를 벌리고 일렬로 다가올 수 있었다.
“쯧, 간을 보는 건가? 한꺼번에 몰려오면 바로 전부 처리할 수 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5기의 오크 라이더들의 돌진에 혀를 찬 그라킨이,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방벽 전개!”
처음엔 무슨 짓거린가 싶었는데, 이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며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딱 병사들이 멈춰 선 지점 앞에서 다리 위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무언가 희뿌연 안개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법?’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저게 그라킨에게 무적이라는 말을 입에 담게 만든 자신감의 원천인가?
그 생각에 답하듯, 시원한 웃음기가 섞인 그라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저희 케이트리아의 안전을 책임지는 수비대 비장의 수단, 데이모르의 방벽입니다! 과거 데이모르라는 대마법사가 그 당시 영주의 요청으로 이 다리에 설치했다고 알려지는 영구 마법이지요.”
겉보기엔 그냥 옅은 안개의 막처럼 보이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꽤나 비범한 마법인 모양이다.
“뭐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이 꽤 나간다는 모양입니다만. 그래도 이게 있으면 강 너머의 몬스터가 이쪽으로 넘어올 일은, 결단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하하!”
꽤나 신이 나셨군.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앞을 바라보니, 5마리의 오크들이 바움과 함께 방벽에 온몸을 부딪치는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쿠웅!
거의 동시에 방벽에 머리를 박아서 그런지 상당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과연, 겉보기엔 그냥 뿌연 김이 올라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름 그대로 방벽의 역할을 해주긴 하는 모양이다.
방벽과 충돌한 바움들이 충격에 쓰러지고, 올라타 있던 오크들 역시 반동으로 인해 벽에 얼굴을 처박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어서 앞 열에 서 있던 병사들이 창을 내밀고 놈들을 찌르기 시작했다.
“찔러!”
“멍청한 놈들!”
“후후, 보셨습니까? 저쪽에선 결코 벽을 넘을 수 없지만, 이 안에선 얼마든지 바깥으로 공격하는 게 가능합니다.”
병사들의 공격에 오크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가리키면서, 그라킨은 침을 튀겨가며 알렉스와 이사벨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확실히 대단한 마법이긴 하다.
적의 진입을 차단하는 벽으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안에서는 아무런 방해 없이 공격이 가능하게 해준다니.
그러고 보니 병사들의 무장상태도 조금 특이하긴 했다.
앞에 선 일부 병사들과 후열의 예비대로 보이는 이들만 창을 잡고 있고, 나머지는 죄다 활을 들고 있다.
창병과 궁병이 거의 반반으로 이루어진 부대인 것이다.
검이나 둔기 같은 가장 흔한 무기를 든 보병이나, 방패수 같은 병종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저 방벽 마법 때문에 수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벽에 붙은 적을 처리하는 창병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병으로만 병과를 구성했군요.”
곁에 있던 이사벨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동일한 말을 꺼내었다.
“저렇게 싸운다면 확실히 무적을 자신할만하겠습니다.”
“저희가 나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아쉽군요.”
자신도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는지 살짝 침울해하는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피식하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확실히 나도 아깝긴 하네. 경험치를 올릴 기회인가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라킨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나머지도 멍청하게 달려들어주면 좋겠는데, 선발대가 당하는 걸 봤으니 아마 도망치겠군.”
“대장님, 사격 지시를 할까요?”
“됐다. 조금 더 끌어들이면 모를까, 어차피 이 거리에서 쏴봐야 오크 놈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없을…… 뭐지?”
말을 하다말고 의아해하는 기색을 풍기는 그라킨.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스도 의문을 떠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크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놈들이 돌았나?”
“역시 미개한 몬스터라 생각이란 걸 못하는 모양입니다.”
“풋! 뭐 우리야 고마울 따름이지. 사격 준비!”
그라킨의 지시에 후열의 궁병들이 시위를 메기고 대기한다.
그동안 알렉스는 돌진하는 오크들의 뒤를 살피고 있었다.
‘저것들은?’
남은 모든 오크가 이쪽을 향해 달려든 것은 아니다.
딱 두 마리의 오크가 뒤쪽에 남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온몸에 치렁치렁한 장식을 달고 지팡이를 흔드는 오크와, 다른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쯤 큰 근육질 덩치 한 마리.
게임에서의 지식이 있는 알렉스는 곧바로 놈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크 샤먼이잖아?’
지팡이를 든 놈은 마법과 비슷하지만 약간 궤를 달리하는, 원시주술이란 능력을 사용하는 오크 종족의 상위 개체다.
그리고 덩치 큰 녀석은 아마 이 무리에서 가장 강한 전사계급의 우두머리일 터.
‘샤먼 타입은 오크 부족의 군락지에서나 등장하는 개체인데. 이런 소규모 무리에 끼어 있다니 희한한 일이군.’
두 오크들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는, 샤먼이 우두머리에게 무언가 주술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두머리 오크의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눈에서 붉은 혈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강화 주술?’
동족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샤먼의 버프 능력이다.
알렉스는 갑자기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샤먼의 주술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뭐지?’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하진 못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라킨 경! 저쪽에!”
“음? 아, 오크 놈들의 상위 개체군요. 부하들을 밀어 넣고 자기는 상황을 보다가 달아날 작정인가? 쯧! 명예 따윈 모르는 몬스터답군!”
알렉스의 부름에 그라킨이 우두머리와 샤먼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문제를 느끼진 못했는지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꾸어어억!”
그때, 우두머리 오크가 강렬한 외침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내던졌다.
투박한 모양새의 창이 거의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방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특이하게도 분명 강한 힘이 담겨 있는 느낌이지만, 날아오는 속도는 기이할 정도로 느릿하게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잠시 그 창에 머물렀지만, 알렉스는 그 순간 남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투창을 한 우두머리 오크가, 갑자기 미라처럼 쭈글쭈글해지며 바움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두머리의 몸뚱이를 보며, 알렉스는 녀석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저게 대체?’
“푸하핫! 고작 투창 따위가 이 엄청난 마법에 통할 것 같나? 바보 같은 발악을 다 하는군!”
그라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모르의 방벽은 결코 뚫리지 않는다! 절대로 말이야!”
알렉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조금 전에 몬스터의 출몰에 대해 물어볼 때도 저런 말투로 자신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자니, 우두머리가 던진 창이 방벽과 부딪치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냈다.
쿠아앙!
다리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방벽의 정중앙, 창이 충돌한 자리에 펼쳐져 있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사라졌다.
사람 두 명 정도는 여유롭게 들어올 수 있을 만한 빈 공간이 생겨났다.
방벽의 일부가 깨진 것이다.
횡대로 달려오던 바움 라이더들이, 속도를 조절해 가며 종대로 전환했다.
순서대로 부서진 방벽의 틈을 파고들 심산.
“어, 어어?”
“무, 어으, 마, 막아라!”
모두가 멍하니 구멍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나마 지휘관답게 빨리 정신을 차린 그라킨이 손짓 발짓을 해가며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비어버린 공간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해 주는 방벽이 망가진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당에, 돌진하는 바움의 앞에 몸을 들이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벌벌 떨며 조금씩 뒷걸음질 칠뿐.
차라리 전열의 창병들을 뒤로 물리고, 사격명령을 내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탓에 시위를 붙잡고 있던 궁병들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는 앞 열의 병사들이 방해가 되어, 사격 각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선두에 선 바움 라이더가 방벽의 구멍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누군가 앞으로 뛰쳐나가며 빈 공간을 막아섰다.
“알렉스 경!”
깜짝 놀란 이사벨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방패를 앞세웠다.
‘그나마 방벽이 남아 있는 이 자리에서 막아야 한다. 저놈들이 통과하고 나면 여기 있는 병사들로는 대응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돌파당하면 뒤에 있는 자신도 어차피 위험해진다.
알렉스의 몸에서 신성력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거의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판단을 내리긴 했지만,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나선 것은 아니다.
‘쓰읍, 내 계산이 설마 틀리진 않겠지?’
작은 걱정이 들긴 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에 내린 결정.
[블레싱]
[굳건한 태세]
능력치를 향상시켜 주는 축복에 이어, 아직 실전에서 써먹어 본적은 없는 새로 익힌 방패술이 발동되었다.
부드럽게 전신을 쓰다듬던 신성력이, 강철 같은 단단함으로 변해 알렉스의 몸을 안정감 있게 받쳐주었다.
이어서.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폭주하는 바움과 연약한 인간의 몸이 충돌했다.
백여 쌍의 눈길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졌다.
그라킨과 병사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움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역동적으로 사지를 꿈틀거리며 공중을 부유하는 오크와 바움의 모습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