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1화
위기의 케이트리아(2)
알렉스는 이사벨과 함께 말을 몰아 대로를 걸었다.
따각. 다그닥.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도시를 구경하던 알렉스는, 성벽에 다다를 때쯤 이사벨을 향해 말을 걸었다.
“위문이라면 뭘 해야 하는 겁니까?”
케이트리아 교구의 의뢰.
경계지역인 도시의 서문 너머에 주둔한 국경수비대를 만나, 그들의 노고를 위로해 주란 내용.
예상보다 더 별거 없는 부탁이라, 흥미를 느낄 구석이 전혀 없는 의뢰였다.
“병사들을 모아놓고 기도를 한 뒤, 축복을 기원해 주는 정도입니다.”
“……역시 그게 다로군요.”
이사벨의 대답에 알렉스는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관심이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수비대를 도와 몬스터와 싸운다든지 하는 상황을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다른 교구에서도 대부분 이런 일을 했었습니다. 도시에 아무 문제가 없어서라기보단, 자신들의 일을 굳이 외부인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다.
정식으로 무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을 요청한 상황이면 모를까, 안면이나 트라고 인사를 돌리는 초임 팔라딘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길 리는 없을 터.
‘국경수비대라. 군대 위문공연처럼 생각하면 되나.’
현대에서 현역으로 군 생활을 했던 기억이 잠시 떠오른다.
유명세가 전혀 없는 가수라도 위문공연을 오는 사람이 여성이라면, 생활관에 박혀 있던 시커먼 남정네들이 우르르 다 몰려온다.
혹시나 신인 걸그룹이라도 뜨면 그야말로 부대가 뒤집히는 거고.
‘기도문이나 외우는 걸 반기는 병사가 있을까 싶지만, 종교가 커다란 힘을 가진 세계이니 의외로 인기가 있을지도.’
걸그룹처럼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도 아니지만, 이사벨은 겉보기엔 예쁘장한 소녀 같은 느낌이기도 하니 어쩌면 병사들이 아이돌을 대하듯 상당히 반겨줄지도 모르겠다.
‘공연 온 아이돌과 달리, 이사벨이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은 찬송가와 칼춤 정도뿐이겠다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성벽에 다다른 알렉스는, 이윽고 성문을 지나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동문과 달리 위수지역인 서문 너머로 향하는 일이라 검문이 있었지만, 주교의 인장이 박힌 의뢰편지를 보여주자 병사들은 바로 길을 터주었다.
성을 지나자 넓은 들판이 시야 끝까지 쭉 뻗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도시 케이트리아가 건설된 이 땅의 이름은 핑겔 대초원으로, 서부 최대의 곡창지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물론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땅은 전부 이곳에서 동쪽에 몰려 있고, 서쪽으로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지역이다.
정확히는 통행이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말해야 옳다.
“저 안쪽 어딘가에 대삼림이 있겠군요.”
“그렇다고 합니다. 인간의 출입을 불허하는 괴물들의 땅이지요.”
초원 끝에 위치해 있다는 핑겔 대삼림.
그 안쪽이 어떻게 되어 있고 전체 면적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곳은 말 그대로 몬스터들의 천국이기 때문.
케이트리아가 타국의 영토와 그리 인접해 있지 않음에도 변경백령으로 지정되어, 상당수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가는 길에 몬스터 한 마리쯤 나오지 않을까요?”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케이트리아가 서부의 마지막 도시라지만, 대삼림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지도를 봤기에 대강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혹시나 싶어 말해봤다.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니 또 모르지 않나?
경험치를 올릴 수 있게 적당한 상대가 하나쯤 나와 주면 고마울 텐데.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이동하던 두 사람은, 대초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케이트리아가 서부의 가장 끝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저 커다란 강 덕분이다.
수심이 깊고 너비도 길어 어지간한 몬스터조차 건너기 어려운 웅장한 물줄기.
국경수비대라고 하면 굉장히 외진 곳에 있을 것 같지만, 여기는 말을 타고 도시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는 위치에 주둔해 있다.
이 넓은 강에서 딱 한 군데에 위치한 다리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경수비대보다 다리수비대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인다.
“정지! 신원을 밝히십시오!”
다리 주변의 땅에 지어져 있는 주둔지로 향하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수비대원 몇 사람이 다가와 검문을 실시했다.
성문에서와 동일한 절차를 거친 후.
병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알렉스와 이사벨은 주둔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 * *
“예루스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알렉스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병사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종교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깊숙하게 박혀 있는 모양이네.’
솔직히 위문이라고 해봐야 딱히 즐거운 일도 아니니, 짬이 딸리는 병사 몇 명쯤 모아놓고 기도나 잠깐하고 말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주둔지의 병사 대부분이 모여들어, 교단의 교리를 읊어주는 이사벨의 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개중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긴 현대에서도 실제로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들이 나타난다면, 종교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지긴 하겠지. 어쩌면 이쪽 세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게 되지 않으려나.’
이사벨이 그라킨이라 이름을 밝힌 수비대장을 만나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라고 할 때만 해도, 대놓고 싫은 기색만 보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결과가 이러하니 꽤나 얼떨떨한 심정이다.
“성기사분들 덕분에 부하들이 아주 즐거워하는군요! 성 밖으로 나오는 주둔임무는 달마다 부대끼리 교대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동안은 신전의 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애석해하는 녀석들이 많았습니다.”
“신실한 병사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성기사들’이라고 표현하지만, 수비대장의 시선은 이사벨에게 고정되어 있다.
알렉스가 나서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교단의 교리도 잘 모르고 예루스의 성서는 읽어본 적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 당연하다.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아직은 진짜 성기사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같이 다니는 마당에 나도 뭔가 하는 편이 좋겠지?’
사이비 성기사라 불려도 할 말은 없지만, 신성력은 다룰 수 있지 않은가.
알렉스는 수비대장을 불러, 그에게 따로 특별한 축복을 내려주겠다고 말했다.
“음? 축복 말입니까? 하하……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기사의 신분이고 부대의 지휘관이란 자리답게 병사들처럼 호들갑을 떨진 않는다.
수비대장은 ‘그럴 필요는 없지만, 해준다니까 호의를 거절하진 않겠다’ 정도로 보이는 표정을 한 채 알렉스의 앞에 섰다.
알렉스는 수비대장을 향해 손을 내밀며 블레싱을 걸어주었다.
“그분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할지니.”
그냥 스킬만 쓰는 건 뭔가 없어 보이니, 적당히 그럴싸한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신성력이 움직이며 희미한 빛이 반짝이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수비대장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그냥 덕담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지, 진짜로 성법까지 써가며 축복을 내릴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는 얼굴.
“오오, 예루스시여…… 고맙습니다, 알렉스 경.”
기사쯤 되는 이면 자신의 몸 상태에 민감할 테니, 블레싱의 효과로 신체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을 힘이지만, 따스한 빛과 함께 몸을 채우는 활력을 느끼며 수비대장은 감격에 겨운 눈빛을 보냈다.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성직자의 성법을 경험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대단할 것도 없는 스킬 하나 써준 것으로, 알렉스는 단숨에 수비대장의 호의를 듬뿍 얻어냈다.
“그라킨 경. 병사들에게 예루스 님의 말씀을 조금 더 전하고자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렇게 하십시오.”
허락을 구한 이사벨이 병사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알렉스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수비대장과 잡담을 이어갔다.
“그렇게나 몬스터가 많단 말입니까?”
“영토를 넓히기 위해 왕국 역사상 몇 차례나 토벌대가 파견되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죠.”
“음.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오는 경우는 없습니까?”
“드물게 있기는 합니다. 보통은 대삼림이 아니라 초원을 유랑하는 놈들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오는 경우지요.”
대체로 경계 너머의 몬스터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알렉스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라킨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여기에 굳이 다리가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저 너머가 몬스터들의 땅이라면 길이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요.”
“하하! 그렇기도 합니다만, 일부러 부술 필요는 없으니까요. 혹시나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면, 이렇게 다리가 있는 편이 녀석들을 처리하기 수월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라킨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만에 하나 다수의 몬스터가 등장한다면 강을 넘으려고 하는 놈들을 따로 상대하기보단, 차라리 한쪽 방향으로 유도해 싸우는 편이 낫다.
몬스터도 힘들게 도강을 하기보단 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고 들 테니, 다리를 중심으로 경계 병력을 주둔시키는 편이 이득이라는 것.
“그리고 가끔 병사들의 실전 훈련을 위해, 강을 건너 몬스터들을 사냥하기도 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위험한 땅이지만 강 너머에 작은 개척마을들이 몇 개 있기도 하니, 그쪽과의 교류를 위해서도 다리가 있는 편이 좋긴 하지요.”
“아니, 몬스터가 사는 곳에 마을이 있단 말씀입니까?”
“강 너머라고 해도 대삼림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편이고, 이곳 초원에 서식하는 몬스터 중에는 위험도가 높은 녀석이 드문 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뭐 개척마을은 세금이 거의 면제되는 수준이니, 성내에 머물기 어려운 빈곤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넘어가기도 하는 모양이더군요.”
“아…….”
그라킨의 말에 알렉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와 세금.
어느 쪽이 더 무섭냐고 물어보면 확답을 내리기 어렵긴 하다.
하층민들에게는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차라리 면세를 선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희도 개척마을이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꾸준히 초원의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편입니다.”
“그렇습니까?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럼 이 주변에서는 몬스터들을 볼 일이 없겠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가끔 한 마리씩 길 잃은 놈이 보이는 걸 제외하면, 떼를 지어 다니는 위험한 몬스터 무리는 구경할 일도 없지요. 절대로 말입니다!”
“음. 근데 저건 뭘까요?”
알렉스는 확신을 담아 말하는 그라킨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다.
“……어어?”
데엥- 데엥!
망루 위에 올라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가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강 너머의 평야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어엇!?”
한두 마리가 아닌, 적어도 수십은 되어 보이는 몬스터 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