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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20화 (20/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20화

위기의 케이트리아

“내일쯤이면 케이트리아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

스프를 떠 마시던 알렉스는 이사벨의 말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이트리아…… 서부의 끝에 있는 대도시였지요?”

“그렇습니다.”

알렉스는 신전에 머무는 동안, 이사벨에게 부탁해 사제들의 서재를 이용할 기회를 얻었었다.

여러 분야의 책이 있었지만 주로 뒤적거린 것은 이 세계의 지리에 대한 지식들.

덕분에 아는 것이 변변찮았던 알렉스는 각 나라의 주요 지명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필사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대륙지도라 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

“제 일정에 억지로 참여시켜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이런 것도 다 좋은 경험이지요.”

이사벨은 알렉스를 자신이 속한 교구의 본당이 위치해 있는 대도시, 글라즈번으로 바로 안내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녀의 순례행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임 팔라딘은 교단의 본격적인 임무에 투입되기 전에 직속 교구의 상위 관구를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가벼운 의뢰들을 해결하는 기간을 갖는다.

성직자들은 이를 순례행이라 부르는데, 사실 같은 관구에 속한 교구장 및 고위 사제들과 안면이나 터두는 행위에 가깝다.

당연히 각 교구에서 무슨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의뢰를, 막 서임식을 치른 초임 팔라딘에게 맡기진 않는다.

“그래도 케이트리아를 끝으로 관구를 돌아보는 일정은 끝이 나니, 곧바로 제가 소속된 글라즈번으로 이동하면 이번 달 안으로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예 뭐,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구란 일정 구역 안의 여러 교구들의 연합체를 의미한다.

이름 그대로 대륙 남부와 서부를 아우르는 남서 관구와, 마찬가지로 북부와 동부를 담당하는 북동 관구, 마지막으로 대륙 중심부에 위치하며 교황이 기거하는 교황청이 있는 중앙 관구까지.

예루스의 교단은 그렇게 총 세 개의 관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사벨의 출신지인 글라즈번은 서부의 대도시이자 남서 관구에 속한 교구로, 이번 목적지인 케이트리아도 변방이긴 하나 서부 지역에 속한 도시이니, 조금 빙 돌아서 간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케이트리아. 서부 땅끝의 마지막 도시라 배웠는데, 치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도 가본 적은 처음이지만, 군대가 많이 주둔해 있는 변경백령이니만큼, 치안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하긴. 변경백령이라…… 몬스터를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통 타국과 영토가 맞닿은 일부 봉토를 지배하는 영주를 변경백이라 칭하며, 다른 귀족들에 비해 군사권과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된다.

특히 케이트리아 변경백령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핑겔 대초원을 끼고 있다는 지형의 특수성이 더해져, 상당한 군세를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몬스터 말씀입니까? 저도 만나게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순례행은 너무 조용하기만 했던 터라…… 알렉스 경을 만난 델트에서의 일이 제가 경험한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하, 각지에서 매번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대륙이 혼란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평화로운 게 좋은 거긴 하죠.”

“앗!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부끄러운 말을 했군요. 반성하겠습니다.”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야…….”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숙실이 위치한 2층으로 올라갔다.

새벽에 일어나 동이 트자마자 출발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지나가다 들린 작은 마을이지만 의외로 깔끔하고 규모가 큰 여관시설이 갖춰져 있어, 두 사람이 머물기로 한 방은 기대 이상으로 넓고 아늑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긴 했다.

“……이사벨 경? 방을 한 개만 잡으신 겁니까?”

“네.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머물 수 있는 큰 방을 빌렸습니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담담하게 대답하는 이사벨.

워낙 차분한 태도였는지라, 알렉스는 오히려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여긴 원래 혼숙이 당연한가……? 아니, 그건 아닌데?’

이곳에도 당연히 정조 관념이란 것은 존재했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보통은 방을 따로 잡는 것이 정상이다.

‘설마 그런 쪽으로의 개념이 부족한 건가? 그러고 보니 팔라딘이 되기 전에는 교회 구역에서 수련만 했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교단의 집행자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전투훈련과 교리에 대한 교육만을 받았다면, 어쩌면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선 무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본적인 성교육 정도는 받았을 법 한데.

본인이 관심이 없어서 자각하지 못하는 건가?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침대도 하나뿐이군요.”

“앗? 그렇습니까? 으음, 그래도 사이즈가 커서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리 면적을 차지하는 편도 아니고…… 아! 함께 생활하던 수녀님께서 저는 정말 죽은 듯이 잔다고 들었으니, 잠버릇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거참 다행이군요.”

대답을 보니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한방에서 자는 것도 모자라 침대도 같이 써야 한다니.

여행경비는 이사벨이 일체 부담하겠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다음부턴 객실을 잡을 때 미리 간섭을 해야겠다.

‘아니 뭐, 여성이라고 해서 딱히 무슨 마음을 품고 있던 건 아니지만…… 이거 괜스레 나만 민망한 기분이 드네. 끄응.’

당황스럽지만 괜히 티를 내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오늘은 그냥 받아들이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이사벨은 침대 한쪽 귀퉁이에 눕자마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알렉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반대편 자리에 누웠다.

‘저리 쉽게 잠들 수 있다니, 축복받은 체질이네. 나는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항상 몇십 분은 뒤척이다가 잠이 들곤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은 더 오래 뒤척이게 될 것 같다.

미동도 거의 없이 고요하게 잠에 빠진 이사벨을 잠시 지켜봤다.

잠든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평범한 소녀처럼 보인다.

누가 이 얼굴을 보고 폴액스와 플레일을 휘둘러, 사람 머리를 부수고 목을 자르는 기사라고 생각할까?

비록 상대가 산 사람이 아닌 언데드였다곤 하지만 말이다.

“크음.”

귀여운 소녀가 옆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알렉스는 헛기침을 하고는 등을 돌려 잠을 청했다.

예상했던 대로, 평소보다 잠을 자기가 더 어려웠다.

* * *

“저기 성이 보입니다. 알렉스 경.”

“아, 그러네요.”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여정에 오른 두 사람은, 점심이 지날 무렵에 목적지인 케이트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사건 하나 없이 한적하기만 여행길이었다.

하긴 도적 떼가 흔한 세상이라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기사로 보이는 중무장한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진 않을 것이다.

무장과 병력을 잘 갖춘 도적집단이라면 어찌어찌 기습으로 기사를 잡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짓을 했다간 본격적인 토벌령이 내려져 군대가 들이닥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

정말 실력 있는 용병대가 도적 떼로 업종을 변경한다 해도, 오래오래 해 먹고 살려면 힘없는 양민이나 노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통과!”

딱 봐도 기사의 신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서자,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바로 길을 터주었다.

간단하게나마 검문을 실시하는 몇몇 평범한 통행인들과는 대우가 달랐다.

여기나 저기나 역시 겉으로 보이는 외형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이사벨의 뒤를 쫓아 케이트리아의 신전이 위치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예루스 님의 가호가 내리소서. 기사님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은총이 함께하기를. 순례 중인 글라즈번 교구의 팔라딘 이사벨입니다. 교구장님을 뵙고자 합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교님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신전에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알렉스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교단 소속인 것도 아니니 그냥 이사벨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다가, 가끔 직급이 높은 인물이 나오면 인사나 나누는 정도.

멍하니 신전 내부를 구경하며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교구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제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헛, 이리 젊으신 팔라딘이라니. 그야말로 그분의 축복을 한가득 받으신 분이로군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 여기 알렉스 경은 순례행을 마치는 대로 저와 함께 글라즈번으로 돌아가, 팔라딘 서임을 추천하려는 유능한 기사입니다.”

“오호! 현직 팔라딘의 추천을 받는 외부인사라니, 굉장히 뛰어난 인재인 모양입니다.”

케이트리아의 교구장을 맡고 있는 델트리온 주교는, 이사벨의 말에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지그시 관찰했다.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시선에 알렉스가 살짝 불편해질 무렵.

델트리온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케이트리아 교구에도 자리는 많이 남습니다. 멀리 돌아다닐 필요 없이 이곳에서 간단한 인증 시험을 치르고, 서임을 받아보시는 건 어떨는지?”

“예? 아…….”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의에 놀란 알렉스가 말문이 막혀 있자니, 이사벨이 펄쩍 뛰어오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 무슨! 안 됩니다! 아무리 주교님이라도 이러시는 건, 그, 어…… 아, 아무튼 지나치십니다!”

이사벨은 알렉스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숨기듯이 자리를 바꾸었다.

물론 키 차이가 크게 나기에 그런다고 감춰질 리가 없고, 알렉스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사벨의 머리 위로 델트리온 주교와 시선을 마주했다.

“으허헛! 농담입니다, 농담. 아무리 그래도 다른 교구에서 점찍은 인재를 빼돌릴 순 없지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음. 아닙니다. 제가 조금 과한 반응을…….”

“물론, 올해는커녕 작년과 재작년에도 서임식을 열지 못한 저희 교구의 사정을 생각하면, 마냥 농담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만.”

“……주교님.”

“아, 이런. 제가 자꾸 괜한 말을 하는군요. 표정을 푸세요, 이사벨 경. 무섭습니다그려. 허헛!”

잠깐의 대화 시간을 더 가지고 나서, 두 사람은 델트리온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으으, 설마 그런 소리를 할 줄은…….”

“이사벨 경?”

“아, 아닙니다. 이제 용건은 다 끝났군요. 아! 교구에서 간단한 부탁 하나를 해올 테니, 그것만 처리하고 떠나면 됩니다.”

“으음. 전에 말씀하신 바로는 식사 초대라든지 티 타임 같은 뭔가 좀 더 친목을 다지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읏! 그, 그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이사벨은, 살짝 음정이 어긋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 교구마다 사정이 다르니 이럴 때도 있는 겁니다!”

“그야 뭐, 네. 그렇겠네요.”

묘하게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태도임을 알아봤지만, 알렉스는 그에 대해 더 언급하진 않았다.

‘나 때문인가. 아까 그 주교가 3년째 팔라딘 배출을 못 하고 있다 했었지? 역시 성기사는 상당히 귀한 인력인가 보군.’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급하게 인사를 건네고 빠져나오는 이사벨의 태도는, 흡사 아껴먹으려고 남겨둔 사탕을 뺏길까 봐 겁먹고 달아나는 꼬맹이 같았다.

아마도 알렉스가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 남아서 팔라딘이 되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다.

주교와 헤어지고 나서 잠시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자니, 사제 한 사람이 편지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희 교구에서 맡기는 의뢰입니다.”

“아, 제게 주시면 됩니다.”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던 이사벨이, 냉큼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편지를 받아들었다.

‘순례행은 그냥 인사치레 정도라 했으니 뭐 대단한 의뢰는 아니겠지만…… 무슨 내용일지 궁금하긴 하네.’

유저의 입장에서 N PC들의 부탁은 곧 퀘스트를 의미한다.

과연 팔라딘씩이나 되는 인물은 어떤 의뢰를 맡게 되는지 궁금해하며, 알렉스는 이사벨의 곁으로 슬쩍 가까이 다가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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