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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9화 (19/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9화

여정의 시작

“의미를 알 수 없는 발언입니다. 알렉스 경. 이상한 점이라니요?”

정말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기색의 이사벨을 보며, 알렉스는 단어 선택에 주의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교단에 정식으로 적을 올린 사람이 아님에도, 우연히 성법을 깨우치지 않았습니까?”

“네, 예루스 님의 은총이 깃든 일이지요. 드물긴 하지만 간혹 일어나곤 하는 일이니 문제가 될 점이 없습니다.”

“그 부분은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품은 의문은 교단의 성직자분들과 비교해서, 제 성법에 미진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는 점입니다.”

다짜고짜 나한테 이상한 점이 없냐고 물으면 그 때문에 오히려 수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교단 출신이 아니란 점을 핑계 삼아 속을 떠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한 이사벨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런 걱정이었습니까? 하핫! 확실히 교단 출신이 아니시긴 하군요.”

표정을 푼 이사벨이 설명을 이어갔다.

“성법에는 뚜렷한 정답이란 것이 없습니다. 비슷한 형태의 발현에 따라 분류를 구분해 두긴 하지만, 개개인의 차이가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남들과 다른 특이한 성법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단 의미입니까?”

“누가 감히 예루스 님이 내려주신 은혜에 의혹을 품는단 말입니까?”

이사벨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알렉스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안감의 대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확실히 게임에서도 어떤 신을 섬기든 상관없이, 성기사는 전부 동일한 스킬 트리에서 원하는 능력을 익히고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신이 없이 예루스 하나만 남은 세계관이 되었을 지라 해도, 타인이 자신의 힘에 이상한 점을 느끼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실제로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고 해도 이들 입장에선 성법을 다루는 것 자체가 신의 인증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니, 뭔가 의심을 품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군.’

걱정 없이 다녀도 될 것 같긴 하다.

낯선 땅에 떨어져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꾸 경계심을 품고 너무 쫄아 있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제 레벨이 조금 올라서 그런지 자신감은 붙네. 35레벨이면 어지간한 견습기사급은 되니까, 이제 당당하게 다녀도 문제가 없겠지.’

성기사라는 특수성을 제외하고 생각해도, 이제는 어딜 다녀도 무력으로 그리 꿀리진 않을 것이다.

유저들 사이에서야 35레벨은 아직 초보 티도 못 벗어난 뉴비이지만, NPC를 기준으로는 중상위권에 비벼도 될 만한 수준이다.

“이사벨 경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외부 출신이시라 약간의 교육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알렉스 경이라면 분명 훌륭한 팔라딘이 되실 겁니다!”

일단 교단에 정식으로 소속되어, 본인의 클래스에 맞게 팔라딘 서임을 받기 위한 활동을 하기로.

알렉스는 그렇게 이곳 세계에서 자신이 걸어갈 방향에 대한 첫 결정을 내렸다.

* * *

델트시 신전 수도실 안쪽.

사제들의 생활공간 한 자리를 이사벨의 입김을 통해 받게 된 알렉스는, 무구들을 손질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에 이사벨이 관여해야 하기에, 그녀의 업무가 마무리될 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기다려야 한다.

‘오늘 중으로 손을 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아마 오후쯤이나 늦어도 내일 정도엔 다른 도시로 출발할 수 있겠지. 아, 이 정도면 되겠다.’

이사벨을 따라나서는 여정에 대해 생각하며 손을 움직이던 알렉스는, 깔끔하게 광을 낸 장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존의 스파울러와 그리브에 더해, 곡선과 직선의 유려한 조화미가 돋보이는 투구와 흉갑.

팔과 손을 뒤덮어 보호하는 뱀브레이스와 건틀릿.

그토록 탐내던 판금갑옷 세트가 손에 들어왔다.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교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조슈앙이, 가문의 재산에 손을 대 선물해 준 것들이다.

조슈앙은 알렉스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며, 자신이 백작위를 계승하게 되면 봉토를 내려줄 테니 기사가 될 생각은 없냐고 은근하게 물어보기도 했었다.

물론 팔라딘 서임을 들먹이며 정중히 거절했지만.

‘아무튼, 백작가의 사건에 내 언질이 먹혀들어 가서 다행이었지.’

이사벨에게 조슈앙이 심한 처분을 당하지 않도록 사정을 봐달라고 넌지시 이야기를 했었다.

그 결과 내용 자체를 다르게 조작할 수는 없지만, 백작가에 정상참작이 내려지도록 해석할 수 있는 보고가 작성된 모양이다.

악에 물든 백작가의 장녀가 암흑의 힘으로 저주를 뿌렸다.

라는 대신, 암흑교도가 사악한 마술로 백작가의 사람들을 조종해 비극이 시작되었다 정도로 말이다.

헬리나가 혼자만의 힘으로 마녀가 된 건 아닐 테니, 거짓은 아니긴 하다.

‘그 연기 속 목소리…… 그놈이 헬리나를 끌어들이고 이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가 아닐까?’

꼬리를 잡을 단서가 더 나오진 않았지만, 언젠가 놈과 다시 만나게 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자신은 교단의 팔라딘이 될 예정이고, 암흑교는 현 세계의 유일한 정통인 예루스의 교단과 대척점인 관계이니.

‘뭐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 엇! 저기 방패 끝에 얼룩이!’

알렉스는 암흑교에 대한 상념들을 떨치고 무구의 손질에 집중했다.

깨져 버린 방패를 대신해 새로운 히터 실드도 받아냈다.

라운드 실드나 카이트 실드 등 방패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아무래도 한손 무기와 함께 다루며 전투에 거치적거리지 않기로는 히터 실드가 제일 편한 느낌이다.

‘다른 방패들보다 방어 면적이 좁긴 해도, 갑옷이 있으니 그리 문제는 아니지.’

사실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은 방패 자체를 쓸 필요도 별로 없긴 하다.

화살은 물론이고 지근거리가 아니면 총탄도 튕겨내는 것이 판금갑옷이니까.

알아보니 이 세계에도 아직 주류는 아니지만, 화약을 사용하는 화기가 개발되고 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무연화약을 이용한 관통력 높은 현대식 화기로나 갑옷을 뚫을 수 있지, 흑색화약을 쓰는 화승총 따위로는 플레이트에 찌그러진 자국을 남기는 게 고작이다.

‘역시 판금갑옷은 최고야. 나야 갑옷이 있어도 방패를 쓰긴 해야겠지만. 스킬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방패의 활용도가 높으니까.’

공짜로 얻은 장비들에게 애정을 쏟고 있자니,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알렉스 경. 며칠이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자신과 교단을 잇는 연줄이 되어줄 조그마한 동료.

이사벨이 방안을 빼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장비를 손보던 중이셨습니까?”

“네. 전사라면 무구의 관리에 소홀해선 안 되니까요.”

“옳은 말씀이군요. 그래도 그런 일은 보통 아랫사람의 도움을 받는 모양이던데…… 전부 스스로 관리하려면 조금 번거로우시겠습니다.”

맞는 소리다.

전투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장비는 목숨 줄과 같기에 정비를 게을리해선 안 되지만, 이게 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긴 했다.

특히나 판금갑옷 세트는 워낙 비싼 물건인 만큼, 이제까지 해온 것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그나마 무구 손질 스킬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마저도 없었으면 몸값 비싼 장비들을 관리한다고 매번 고생했을 거야.’

대장장이 아들이라 관련 지식을 스킬로 가지고 있어 다행이었다.

부유한 기사들은 에스콰이어나 페이지(종자 수련을 받는 시동)를 두고 무구의 관리를 일임하지만, 알렉스는 그럴 처지가 아니기에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

“뭐…… 그 정도 귀찮음은 감수해야지요. 그런데 이사벨 경도 본인이 장비를 관리하시지 않습니까?”

이사벨이 따로 사람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 걸 안다.

알렉스가 왜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하냐고 묻자, 이사벨은 해맑은 표정으로 갑옷을 통통 두드리며 대답했다.

“아! 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팔라딘의 무구는 낮은 급수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성유물이니까요.”

“……성유물?”

마법이 내재된 물품을 아티팩트라 부르듯, 신성력이 깃들어 특별한 능력을 담은 물품을 성유물이라 칭한다.

“이 갑옷엔 신성력에 반응해 손상을 저절로 복구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또는 이런 식으로-”

이사벨이 정신을 집중하듯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이자, 몸에 붙어있던 전신갑주가 짤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해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알렉스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편리하게 탈착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장점을 자랑하는 게 뿌듯했는지 가슴을 펴고 미소 짓던 이사벨은, 다시 기능을 작동해 갑옷을 장착했다.

흩어져 있던 갑옷 부품들이 저절로 움직여 조립되는 광경은, 알렉스의 소유욕을 굉장히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미친, 갖고 싶다!’

판금갑옷의 몇 없는 단점 중 하나가 입고 벗는데 다른 장비보다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남의 도움이 없다고 전신갑주를 착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능숙한 사람도 혼자서는 시간이 10분씩은 걸린다.

기사들이 괜히 시종을 두려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자동수복에 탈착 기능까지 있는 전신갑주라고?

알렉스의 시선이 열심히 닦아둔 자신의 갑옷으로 향했다.

분명 충분히 훌륭한 무구인데, 이사벨의 갑옷을 보고나니 어째 초라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 참! 잡담을 하느라 용건이 늦었군요. 제 볼일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이사벨은 남은 말을 마저 이어갔다.

“곧 있을 식사 시간을 보내고 나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스 경도 준비를 마쳐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사벨이 떠나가고 나서, 알렉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팔라딘 서임을 받으면 나도 저거 주나……?”

분명 원하던 걸 얻었는데, 남의 떡이 너무나도 커 보였다.

* * *

모든 준비를 갖추고 난 후.

알렉스는 자신의 늙은 전투마의 앞에 섰다.

‘이 녀석도 쌩쌩한 젊은 말로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조슈앙에게 튼튼한 무구들을 받아냈지만, 차마 말까지 요구하진 못했다.

훈련을 마친 어린 전투마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비견되는 고가의 상품이다.

현대로 치면 고급 스포츠카나 마찬가지니, 아무리 도움을 주었다지만 거기까지 욕심부리는 건 염치없는 짓이긴 하다.

히잉- 푸르르륵!

자신의 생각이 전달됐는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레질하는 녀석.

“워어, 진정해라. 눈치만 빨라서는.”

“알렉스 경? 슬슬 출발하도록 합시다.”

“아, 예.”

자신과 마찬가지로 떠날 준비를 끝낸 이사벨의 말에, 알렉스는 말을 다독이고는 위로 올라탔다.

이윽고 중무장을 갖춘 두 남녀는 빠른 속도로 가도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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