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4화
두 명의 성기사
암흑교도였던 헬리나, 연기 속의 목소리, 사람들의 언데드화.
알렉스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에 대해 이사벨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귀족가에 어둠의 종자가 버젓이 들어서다니,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군요. 게다가 이런 대규모의 사악한 저주라니. 알렉스 경이 아니었으면 델트시에 무서운 재앙이 내릴 뻔했습니다.”
“외성 쪽엔 저주의 여파가 닿지 않았습니까?”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가 크진 않았습니다. 교단의 사제분들께서 사악한 기운을 빨리 감지하시기도 했고, 마침 팔라딘인 제가 머물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피해 구역을 빠르게 정화할 수 있었습니다.”
덤덤한 말투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이사벨.
딱히 자랑을 하려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당연한 일을 말한다는 듯한 표정이다.
팔라딘은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엘리트이니, 나이가 어려도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 맞기는 했다.
“무작정 저주의 발생지를 찾아온 것인데, 알렉스 경 덕분에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이제 교단의 집행자로서 온당히 처리할 일을 해야겠군요.”
다시 투구를 쓰고 걸음을 옮겨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창을 집어 든 이사벨이, 알렉스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어, 무엇을……?”
“예? 물론 성내에 남은 악의 잔재를 정화하는 일이지요. 어쩌면 혹시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비스듬히 세운 창을 어깨에 기댄 이사벨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낸다.
저렇게 세워도 머리 위로 팔 하나 정도는 더 올라가는 길이라니.
창이 장병기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역시 단신인 점이 꽤나 부각된다.
160은 확실히 안 되고, 150이나 겨우 넘을까?
그러고 보니 창도 평범한 것이 아니라, 창날 양쪽으로 도끼와 훅(Hook)이 달려 있는 폴액스다.
투창에 적합한 생김새는 아닌데, 잘도 저걸 던져서 다르온을 맞췄다.
플레일 못지않게 폴액스도 상당히 흉악한 병기거늘, 작은 몸으로 전신갑주를 입고 잘도 저런 무기들까지 다루는구나 싶었다.
“알렉스 경? 왜 그러십니까?”
조그만 체구에 대비되는 무구들을 보며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자니, 이사벨이 의아해하는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아, 미안합니다. 이곳에 벌어진 참상에 대해 잠시 생각하느라. 아무튼, 저야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이 비극을 정리하도록 하죠.”
성내에 남아 있는 언데드화된 인간들을 처리하자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교단의 팔라딘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고, 안전하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 않은가?
저런 진짜 성기사가 곁에 있어 준다면, 다르온 같은 좀비 기사가 더 나타나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얼굴만 보면 바퀴벌레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지만, 전투능력은 아까 잠깐 본 거로도 충분히 입증이 되었으니. 일단 따라다니다가 기회를 봐서 내 신성력에 대해 넌지시 떠봐야겠군.’
알렉스는 다르온이 떨어뜨린 검을 주워들었다.
부러진 검보다 좀 더 길고 묵직해서 다루기에 약간 어색한 감이 있지만, 품질은 꽤 좋아 보이기에 만족스러웠다.
이사벨과 함께 성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알렉스는 언데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약간 아쉽게도 욕심냈던 만큼 레벨을 올리지는 못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는 없지만, 상태창에는 퍼센테이지로 표시되는 경험치 칸이 존재한다.
레벨이 조금 높아져서 그런지, 시종이나 병사 좀비들을 해치워도 경험치가 그리 오르지 않았다.
20대 레벨일 때와 비교하면, 좀비들에게 얻는 경험치가 거의 열 배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하긴, 게임일 때도 약한 몹을 몰아 잡는 걸로는 경험치가 별로 오르지 않았었지. 끊임없이 강한 적에게 도전해야 해서 난이도가 꽤 하드한 편이었는데.’
“저기 또 있습니다!”
적이 나타나자 기쁜 목소리와 함께 달려간 이사벨이, 무자비하게 폴액스를 휘둘러 상대의 목을 날려 버린다.
이왕이면 아까처럼 중무장한 기사 좀비가 나오면 좋을 텐데.
영주성내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는 다르온 하나뿐이었던 모양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래도 몇 차례의 전투를 더 거치며, 레벨 업 한 번을 더 챙길 수는 있었다.
[알렉스 Lv 31]
[잔여 스킬 포인트 6]
‘내 정신 좀 봐라? 다르온을 잡고 오른 포인트도 아직 정리를 못 했네.’
팔라딘 이사벨에게 깊이 신경 쓰느라, 레벨을 올리고 얻은 포인트를 투자하지 못한 상태.
일단 제일 중요히 여기는 부분이 갑작스러운 피습에 대한 안전이기에, 이전부터 그랬듯이 방패술 스킬에 가장 먼저 눈이 갔다.
[실드 마스터리 Lv 4]
[방어 본능 Lv 4]
이어서 신성력의 근본과 부상을 회복할 수단에 또 하나씩 투자를 했다.
[신앙 Lv 6]
[치유의 손길 Lv 3]
‘나머지 두 개는 검술을 올리는 거로 할까?’
성법과 방패술도 좋지만 적을 수월하게 해치우기 위해선, 무기술의 레벨을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꼈다.
게임에서야 각 직업군이 파티를 이루어 특성에 맞게 역할 분담을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적을 직접 쓰러뜨려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적어도 기사 수준의 검술 레벨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드 마스터리 Lv 5]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없습니다.]
[숙련도 기준치 충족 미달]
‘음?’
소드 마스터리 스킬을 올리던 알렉스는, 새로 떠오른 알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5레벨까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6레벨로 올리려니 불가능하단 알림이 뜬다.
숙련도라니? 스킬을 찍는데 언제부터 그런 게 필요했다고?
기존에 없던 시스템이기에 얼굴에 절로 불만이 드러난다.
신앙을 6으로 올릴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마스터리 계열 스킬에만 추가된 시스템일까?
어쩌면 한 스킬에 포인트를 몰아넣어, 단번에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참나. 게임도 아닌데 그런 밸런스를 따져야 하나?’
“알렉스 경? 뭔가 불편한 점이 있으십니까?”
감정이 표정으로 확연히 드러나다 보니, 이사벨이 눈치를 채고 말을 걸어왔다.
“아, 아닙니다.”
“혹시 피곤하시면 쉬셔도 괜찮습니다. 이제 주변은 다 정리된 듯하군요. 남은 건 이 안쪽뿐인데…… 구조상 백작과 직계식솔들의 거처 같군요.”
“음. 그렇습니까?”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니 드디어 마지막 구역만 남게 되었다.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났는지,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알렉스는 불현듯 조슈앙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냥을 좋아하는 그 철부지 도련님도 저 안에서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을까?
솔직히 그리 친분이 쌓였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낮까지만 해도 제법 길게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가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면 조금 씁쓸하긴 했다.
귀족 직계의 심처라 해도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던 이들이 있었는지, 하인의 복장을 한 좀비 몇 구가 더 걸어 나와 처리하며 안으로 진입했다.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수색하고 있자니, 면식이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워어억.”
“아, 백작의 장남인…….”
쉬익- 퍽!
“앗! 아는 사람입니까?”
폴액스를 휘둘러 머리를 찍어버리고 나서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지는 이사벨의 모습에, 알렉스는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그, 아뇨. 뭐 아무래도 상관없긴 한, 저건 또 뭐야?”
쓰러진 백작의 장남, 클레인 루미넌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 목걸이!’
헬리나의 것과는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클레인이 걸고 있던 목걸이 역시 암흑교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처음 봤을 때는 딱히 꺼림칙한 힘이 느껴지진 않았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불길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주의 영향으로 사악한 힘이 증폭된 건가?’
클레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알렉스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고스트?”
좀비와는 달리 육체가 없는 존재이지만, 마찬가지로 음계에 속한 생명을 지닌 언데드 몬스터.
영체 형태의 몬스터 중에선 급이 낮은 편에 속하지만, 좀비 따위와는 달리 일반인은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기도 했다.
이름 그대로 유령이기에, 평범한 공격으로는 타격을 입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
“생명을 모독하는 거짓된 존재 따위가!”
목걸이에서 방출된 흑마력과 함께 나타난 고스트를 보며, 이사벨은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외치고는 폴액스를 휘둘러 놈의 허리를 갈랐다.
그러나 고스트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특별한 힘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냉병기로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다.
흐으으으!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힘이 담긴 귀곡성을 흘린 고스트가, 붉은 안광을 흘리며 이사벨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녀석도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진 못했다.
이사벨의 전신에서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
“이놈!”
부아아앙!
이제까지보다 몇 배는 강력해 보이는 일격이 고스트를 가르고 지나갔다.
어찌나 대단했는지 놈의 형체가 모양을 잃고 흩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역시나 제대로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기에, 놈은 다시 원형을 되찾았다.
‘신성력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했군. 근데 어째서? 근력이 강해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이사벨 경! 날 끝에 신성력을 담으세요!”
알렉스의 외침에 이사벨은 멈칫하더니,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무기에 신성력을 싣는 성법엔 많이 미숙합니다.”
“예? 그래도 영체를 공격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계속 노력하지만 잘 되지가 않은지라…….”
생각치도 못한 대답에 알렉스는 입을 쩍 벌렸다.
무슨 성기사가 홀리 웨폰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황당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또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포인트만 있으면 어떤 스킬이든 마음대로 배울 수 있는 자신과 달리, NPC들은 성법 하나를 익히는 데도 그에 맞는 재능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해는 하겠지만…… 정식 팔라딘이 홀리 웨폰을 못 쓴다니 조금 충격적이네.’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잘 아는데, 자신과 이사벨이 붙으면 10초 안에 패배할 자신이 있다.
그렇게 강한 성기사인 그녀가 기초적인 성법을 어려워한다는 것에, 차마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그래도 이까짓 악령쯤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침묵을 동반한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목소리를 높인 이사벨이 다시 강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아니, 그런 식으로는-”
부아악!
흐어어억.
부와아앙!
흐으읏!
“-타격을 줄 수가, 어…… 되네?”
몇 차례 무의미해 보이는 공격을 당한 고스트에게서, 흑마력이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기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왜 진짜지?
그래도 어쨌든 신성력으로 온몸을 덮고 있으니, 무기에도 조금이나마 그 여파가 전달이 되긴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면 차라리 맨손으로 주먹질을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알렉스는 옅은 탄식을 터뜨리고 입을 열었다.
너무 무식한 방식이라 차마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사벨 경. 물러나십시오.”
검을 겨눈 알렉스가 홀리 웨폰을 발동하며 앞으로 나섰다.
신성력으로 빛나는 칼날이 고스트의 몸을 두 동강 내주었다.
흐아악!
반으로 갈라진 고스트는 이사벨에게 맞았을 때와는 달리, 다시 하나로 뭉쳐지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