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3화
죽은 자들의 밤(3)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안을 파고든 칼날이 힘줄을 끊어냈는지, 다르온의 손에서 흘러내린 검이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전투는 기대했던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쿵!
“컥!”
검을 놓치기가 무섭게 다르온이 달려들어 몸을 부딪쳐왔다.
중무장한 기사의 몸뚱이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기가 된다.
몸을 붙잡은 다르온이 자세를 숙이며 다리를 걸어 알렉스를 넘어뜨렸다.
공격을 성공시키고 기뻐하던 알렉스는 그대로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이런!?’
기사들은 검술과 기마술, 마상창술을 연마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지만, 맨몸으로 행하는 격투술도 등한시하진 않는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레슬링은 친선시합도 자주 열리기에, 기사라면 일정 수준 정도는 익혀두는 무술.
다급히 방패로 밀쳐내며 힐트 끝으로 머리와 어깨를 후려쳤지만, 갑옷과 투구로 보호받는 기사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순 없었다.
‘망할!’
상대가 한쪽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임에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다르온은 육중한 무게와 우월한 근력으로 알렉스를 짓누르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건틀릿을 착용한 기사의 주먹은 망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내리찍는 주먹을 최대한 막아보려 했지만, 이렇게 초근접전에 포지션마저 불리한 상황에서는 몸을 제대로 보호하기가 어려웠다.
쿵! 쿵!
“으윽…….”
반복되는 충격에 머리가 어지러워져 갔다.
이대로는 당하고 만다.
알렉스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검을 놓고 상대의 몸을 밀쳐내며 치유의 손길을 발동시켰다.
언데드가 된 다르온에게 치유의 손길은, 회복이 아닌 피해를 입히는 효과가 적용된다.
“캬아아악!”
사실 데미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극이 되는 기운이 흘러들어오자 다르온을 온몸으로 불쾌감을 표현하며, 알렉스의 손에서 떨어지고자 상체를 뒤로 젖혔다.
‘됐다! 빠져나…… 아?’
콰앙!
압박이 줄어든 틈을 타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던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이 들림과 동시에, 다르온이 순식간에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재빨리 몸을 세우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니, 흉갑 한쪽이 심하게 찌그러진 다르온이 땅을 짚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십여 걸음쯤의 거리를 두고,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길쭉한 창 한 자루가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무슨?’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알렉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오는 커다란 전투마와 그 위에 올라탄 은색으로 빛나는 전신갑주.
기사의 완전체라 할 수 있는 형상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 살았다! 잠깐, 아직 새벽인데?’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모습의 기사를 바라보며, 알렉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못 알아볼 리가 없는 익숙한 힘이다.
‘팔라딘!? 이런, 괜찮으려나? 내가 신성력을 쓰면서 싸우는 모습을 봤을 텐데.’
그렇게 만나기 어렵다고 들은 성기사를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되다니.
신성력으로 온몸을 물들인 기사를 보며, 알렉스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켕기는 점이 있다 보니 마냥 반길 수가 없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아군이 나타났다 싶었는데, 어쩌면 사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
성기사가 안장 뒤에서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플레일이라는 병기였다.
자루에 달려 있는 쇠사슬과 그 끝에 연결된 뾰족한 스파이크가 붙어있는 구체.
알렉스가 사용하는 메이스가 신사적으로 여겨질 만큼 꽤나 흉포한 생김새의 둔기다.
“그륵, 키아악!”
말을 몰아 다가온 성기사가 철퇴를 휘둘러 다르온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막 휘청거리며 일어서고 있던 다르온은 다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공격에 스치며 다시 나동그라지고 만다.
알렉스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다르온의 몸통에서 금속파편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봤기 때문.
투창으로 한번 손상되었던 부분에 철퇴의 타격까지 이어지며, 흉갑 일부가 깨져 나간 것이다.
겨드랑이 아랫부분에 주먹 반개 크기쯤 되는 틈이 생겼다.
‘내가 처리할 수 있겠는데?’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다르온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성기사 혼자서 쓰러뜨릴 것 같긴 하지만, 숟가락을 얹을 기회가 보이는데 멀뚱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게임 시스템에서 적에게 얻는 경험치의 지분은, 흔히 첫타와 막타라 불리는 행동을 한 유저에게 가장 크게 돌아간다.
맨 처음으로 공격하거나 숨통을 끊는 마무리 공격을 가하는 것.
빨리 레벨을 올려 강해지고자 하는 알렉스로선, 놓치긴 아까운 기회라 할 수 있다.
현실이 된 지금은 경험치 계산이 어떻게 적용될지 모르지만, 게이머의 감각이 이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였다.
신성력을 담은 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한달음에 달려간 알렉스는 아직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다르온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목 위까지 닿을 수 있도록 최대한 비스듬한 각도로 찔러야 한다.’
벌어진 틈이 작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회를 포착하며 높아진 집중력과 약간의 행운, 레벨이 높아진 검술 스킬 등의 조건이 더해진 덕분인지, 계획한 각도에서 노리던 위치로 정확히 검을 꽂을 수 있었다.
근육과 뼈가 칼날이 파고드는 것을 방해했으나, 홀리 웨폰이 적용된 롱소드는 언데드에게 뛰어난 명검과도 같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그르륵!”
‘이런! 조금 부족하다.’
모든 게 다 맞아떨어졌으나, 다르온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칼날이 목구멍 안쪽을 파고들었으나, 아쉽게도 숨통을 끊기엔 약간 길이가 부족했다.
“캬악!”
반격을 가하기 위해 휘둘러진 다르온의 주먹에, 방어 본능이 반응하며 방패가 움직였다.
‘아냐, 지금 막으면 기회를 놓친다.’
다르온을 공격하고 지나갔던 성기사가 다시 선회해서 돌아오고 있다.
말발굽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으니, 가드를 해서 밀려난다면 마무리를 지을 기회를 빼앗기고 말 터.
알렉스는 검을 놓고 방패를 당기며 몸을 아래로 숙였다.
방어 본능이 자동으로 공격을 막는 스킬이라지만, 자신의 의지에 반하면서까지 몸을 조종하진 않는다.
부웅.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주먹.
등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쫙 돋았다.
위험한 선택이긴 했지만, 물러나지 않은 덕분에 한 번 더 기회가 생겼다.
실드 차지.
지근거리에서 발동한 돌진 스킬이기에 한 발자국 내딛는 것에 그쳤지만, 휘둘러지는 방패에 충분한 힘이 실렸다.
“이야아-악!”
방패가 망치 역할이 되어 검 자루를 때렸다.
쨍!
칼날이 부러지며 손잡이가 튀어 올랐다.
‘……얻은 지 하루 만에 박살 나버렸군.’
그래도 칼날은 확실하게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다르온이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
동일한 알림이 연달아 떠오른다.
조용히 알림을 지켜본 알렉스는, 기사를 해치우며 단번에 다섯 개의 레벨이 올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겼다.’
푸르르륵.
승리에 기쁨에 젖어 들고 있자니, 바로 뒤에서 거친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자 코앞으로 다가온 전투마의 커다란 눈동자가 보인다.
고개를 조금 위로 들어 올리니, 투구 안쪽에서부터 발산되는 이글거리는 눈빛과 마주할 수 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일단 적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내 신성력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까?’
시선을 교환한 시간은 잠깐이었으나, 그사이에 오만가지 걱정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쿵.
잠시 알렉스를 바라보던 성기사가 말에서 내렸다.
강렬한 위압감을 주는 무장과 말 위에 타고 있던 높이 때문에 몰랐었는데, 지상을 밟은 성기사의 체구는 상당히 왜소한 편이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여기서 본교의 형제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알렉스는 깜짝 놀라 순간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투구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가냘픈 여성의 것이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성기사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투구를 벗었다.
흑색의 머리카락이 투구에 딸려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실례했습니다. 글라즈번 교구에 소속된 이사벨이라 합니다.”
목소리를 듣고도 놀랐지만, 얼굴을 보고는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스물을 넘긴 것 같지는 않은 얼굴이다.
키까지 작아서 더 앳되 보이는 느낌이었다.
전신갑주로 무장한 기사를 창을 던지고 플레일을 휘둘러 때려눕힌 강자가, 소녀라는 단어에 어울릴 법한 인물이었다니.
알렉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음…… 알렉스입니다.”
“반갑습니다, 알렉스 형제님. 형제님은 어느 교구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교구는 교단의 비숍(주교)급 이상의 사제가 관장하는 교계 구역으로, 도시 한 곳을 본당으로 지정해 델트시 같은 사목구 여러 개를 포함하는 중간 규모의 행정 단위를 뜻한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이사벨이라 밝힌 성기사 소녀의 눈치를 보느라, 곧바로 마땅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나를 계속 형제라고 부르는데? 내 신성력에 대해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걸까?’
수상함을 느끼고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어서 같은 교단의 인물이라 여긴 건지, 태도만 봐서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머뭇거리는 알렉스를 보며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이사벨은, 이내 알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임무를 수행 중이십니까? 하긴 이런 상황이 벌어진 곳에 계신 걸 보니, 우연이라고 여기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는군요.”
“그게…….”
“임무 중에는 같은 형제자매끼리라 해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모든 정보를 비밀로 유지할 권한이 있다. 맞지요?”
“……음.”
“앗! 말이 너무 많았군요. 제가 최근에 갓 서임을 받고 순례 행을 시작한 지라, 처음 만나는 팔라딘 형제님에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혼자 지레짐작하며 수긍하는 이사벨.
하는 행동은 어려 보이는 외모에 맞게 어수룩한 느낌을 주는데, 허리춤에 걸린 철구가 쩔그럭거릴 때마다 괜히 움찔하며 시선이 간다.
여러모로 언밸런스한 풍모와 분위기를 가진 성기사다.
‘나를 같은 팔라딘이라 여기는 건가? 의도치 않게 교단의 인물과 접촉했지만……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처럼 위험하진 않을지도?’
알렉스는 그냥 이대로 넘어가도 괜찮을까 생각했다가, 그래도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기 위해선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판단했다.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선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뽑아내야 한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 적당한 말을 골라낸 알렉스는, 이사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