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2화
죽은 자들의 밤(2)
언데드가 된 와중에도 훈련받은 기억은 남아 있는지, 창을 앞으로 내민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다가왔다.
여섯 개의 창날이 자신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튼튼한 방어구로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압박감이 상당했다.
‘하나씩 빼내서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알렉스는 일단 정면에서의 맞상대를 포기하고, 병사들의 옆을 향해 내달렸다.
창 같은 중병기로 방진을 이루고 있으면, 아무래도 방향전환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긴 창대를 내밀고 있다가 적의 이동에 맞춰 옆으로 방향을 선회하려면, 개인일 때와 달리 양옆의 아군이 방해가 되는 것이다.
알렉스는 그 점을 노리고 주변을 빙빙 맴돌았고, 노림수는 기대 이상으로 잘 먹혀들어갔다.
정예 병사들이라면 위치를 조정할 때도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지겠지만, 백작의 사병들은 그렇게까지 뛰어난 자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언데드화된 인간이다 보니 지능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알렉스를 따라 움직이려다가 자기들끼리 동선이 엉키며, 순식간에 자세들이 무너졌다.
‘……뭐야? 괜한 걱정이었나?’
기회를 엿보던 알렉스는 곧바로 실드 차지를 발동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는 창대를 방패로 후려친 후.
알렉스는 몸을 낮추고 방패로 머리를 보호하는 자세로, 검을 휘둘러 병사 셋의 팔을 베고 빠져나왔다.
언데드의 약점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머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다수인 만큼 단번에 급소를 노리기보단, 차근차근 전력을 갉아먹는 방식을 선택했다.
확실하게 적을 제거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내 실력으로 안전을 확신할 수 없으니.
일단은 포위당하지 않도록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경로에서, 범위 안에 들어오는 부위들만 공격하는 것이 우선이다.
‘상대가 언데드뿐이라서 다행이군.’
네크로맨서처럼 언데드를 부리는 술자가 함께 있지 않으니, 수가 많아도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상위 개체의 언데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상대는 가장 하급의 언데드인 좀비와 거의 동일한 수준.
거기에 상극의 힘인 신성력이 실린 공격에 닿을 때마다 점점 근원이 되는 흑마력이 소멸되고 있으니, 전투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성스러운 칼침 몇 번 놔줬더니 움직임이 다들 둔해진다.
‘걱정했던 만큼 위험할 것 같진 않군. 슬슬 마무리를 지어도 되겠어.’
밀집된 대형 안으로 파고들어 병사 하나의 목을 날린 알렉스가, 방패를 옆구리에 단단히 붙여서 찔러오는 공격들을 막아냈다.
반대편에서 쑤시고 들어오는 창날은 어깨를 덮은 스파울러로 튕겨내고, 실드 차지를 이용해 단숨에 파고들어 벌어진 상대의 입안으로 칼날을 찔러 넣었다.
“그갸갉!”
“꺼져!”
뽑아낸 칼을 뒤로 돌며 휘둘러 적 하나의 팔을 끊어내고, 물어뜯으려는 듯 입질을 하며 달라붙는 병사 좀비의 턱을 방패 날로 후려쳐 거칠게 찢어버렸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싸워도 됐겠는데? 걱정했던 것만큼 난이도가 높진 않네.’
싸움은 곧 막바지로 치달았다.
병사 여섯을 전부 처리하는 동안, 중간에 레벨이 또 한 번 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직은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아서 그런지,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 요구량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알렉스 Lv 25]
[잔여 스킬 포인트 1]
‘이제 뭘 올리지? 으음. 일단 말을 찾으면서 생각해 볼-’
절그럭. 저걱.
어두워지기 전에 봤던 기억을 뒤져 마구간의 위치를 가늠하던 알렉스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병사들과 싸우며 소란을 일으킨 탓에, 근처에 있던 적이 찾아온 모양이다.
발소리가 들리는 어둠 속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시종? 병사?’
둘 다 아니었다.
온몸을 금속으로 뒤덮은 전투병기.
기사였다.
‘……어이, 장난치지 마. 왜 이 새벽에 기사가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건데? 당직사관이라도 되냐?’
병사들과의 전투로 차올랐던 자신감이 급격히 고개를 숙인다.
기사라 해도 가벼운 옷차림이었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상대는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중세판 아이언맨이라 할 수 있는 존재다.
물론 전신 갑주로 무장했다고 해서 약점이 아예 없지는 않다.
관절 부위의 미세한 틈.
착용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된 몇 군데의 접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이음매인 만큼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검술의 달인이면 모를까.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며 그런 약점을 완벽하게 공략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다.
자신의 실력으로 확률을 따지자면, 소수점 아랫부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알렉스는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기사쯤 되는 인물이면 광역 저주에 저항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상대가 정상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건넸다.
천만다행으로 희망은 빛을 발했다.
“누구……? 나…… 다, 르온.”
“아! 다르온 경!”
조슈앙을 처음 만났을 때 호위로 붙어있던 기사다.
‘다행이다. 싸우지 않아도 되겠-’
알렉스를 응시하던 다르온이 더듬거리며 투구의 바이저(눈 보호대)를 올린다.
안도하며 다가가려던 알렉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백태가 껴 흐리멍덩한 눈.
짓무른 입술 사이로 드러난 잇몸.
“……다르온 경? 잠시 헤어진 사이에 못 알아볼 정도로 미남이 되셨군요?”
툭.
문드러진 콧대가 통째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으, 크르아악!”
“하, X발.”
믿음은 배신당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다르온이 벼락같은 검격을 휘둘렀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움직임이 너무 빨라 간신히 방패를 들어 막는 게 고작이었다.
쾅!
“크윽!”
팔등이 욱신거린다.
판금갑옷의 방어력도 문제이긴 하지만, 기사는 그냥 그 자체로도 뛰어난 사형집행인이다.
병사들과는 무력의 질이 달랐다.
“으랴악!”
악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보지만, 상대의 검에 번번이 막혀 밀려난다.
빈틈은커녕 갑옷을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
기본적으로 검술 실력의 차이가 명백했다.
하긴 기사라면 마스터리 스킬로 측정했을 때, 소드 마스터리가 적어도 6레벨은 될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그나마 방패가 있어서 버티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낭패다. 이대론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어.’
몸을 빼고 싶지만 신체능력도 저쪽이 우월하니, 달아난다고 해서 따돌릴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래도 어차피 계속 싸워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주의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갓 블레스 유! 망할 자식아!”
알렉스는 다르온을 향해 블레싱 스킬을 사용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능력치 버프 효과를 받겠지만, 언데드화가 진행된 다르온에겐 오히려 디버프가 적용될 터.
신성력에 닿아 움찔하는 다르온에게 곧바로 실드 차지를 이용해 달려들었다.
쿵!
방패로 날아드는 검을 막아내고, 돌진하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부딪쳤다.
단단한 갑옷 덕분에 데미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밀쳐지는 힘까지는 어쩔 수 없기에, 다르온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깐의 시간을 번 알렉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잘그락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을 탈 수 있다면 따돌릴 수 있긴 할 테지만…….’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달리기로 말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겠으나, 그 역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이 길가에 돌아다니고 있다면 모를까.
마구간의 문을 열고 안에 있는 녀석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분 단위의 시간이 소요될 터.
바짝 추격해오는 다르온이 그동안 구경만 하고 있을 리도 없다.
“그랅?”
“갸아악!”
‘X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에서 병사 좀비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신성력을 검에 주입했다.
한 합에 머리 하나씩.
빛나는 검이 병사 둘의 목을 잘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한손검으로 깔끔하게 사람의 목을 자르는 것은 수준 높은 검사에게나 가능한 것이지만, 홀리 웨폰을 두른 롱소드는 언데드에게 닿자 뛰어난 절삭력을 보여주었다.
까앙-!
“크읏.”
방어 본능의 발동으로 배후에서의 일격을 막아냈다.
병사들을 빠르게 처리하긴 했는데, 그 잠깐의 지체된 시간 동안 따라붙은 다르온이 공격을 가해온 것.
‘썅! 이걸 어떻게 따돌리냐고!’
내성을 벗어나 거주민들이 많은 곳까지 달아나면 답이 생길까?
하지만 그쪽에서도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있다면?
지친 상태로 포위까지 당하면 정말로 끝이다.
차라리 체력이 남아있는 지금, 낮은 가능성에 기대서 어떻게든 기사를 처리해야 했다.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은 알렉스는, 남아있는 스킬 포인트를 떠올리곤 검술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소드 마스터리 Lv 4]
게임 내에선 쉴드 마스터리를 제외하면, 마스터리 류 스킬은 성기사에게 중요도가 많이 떨어지는 스킬이다.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검술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리 좋은 무장을 하고 있어도, 공격의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상대가 무기를 다루는 같은 인간형의 적이라면, 검술 레벨의 높낮이가 크게 두드러지게 된다.
마수를 상대할 때와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걸로도 한참 부족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하는 수밖에.’
소드 마스터리가 3레벨에서 4레벨로.
간신히 중급자 수준의 검술에 발을 디딘 것이니, 평생 검술을 단련해 온 기사와 비교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그래도 초급자의 수준일 때보단 보는 눈이 제법 트이긴 했다.
‘딱 한 번. 한 번의 기회만 노리자.’
지금 실력으로는 다르온의 수비를 뚫고, 몸 중심부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려볼 만한 것은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순간을 노려, 팔꿈치의 관절부 정도에 검을 찔러 넣는 정도.
무기를 든 팔을 무력화시킬 수만 있다면, 절망적인 승산을 확 끌어올릴 수 있을 터다.
점점 심하게 찌그러지는 방패가 더 버텨주기를 바라며, 알렉스는 차분하게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크워억!”
콰득.
수차례의 타격으로 우그러진 부위가 살짝 깨져 나가며, 다르온의 칼날이 절묘하게 방패에 끼었다.
덕분에 상대방은 아주 잠깐이지만, 검을 되돌리는 데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지금이다!’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던 알렉스는, 잠깐 발생한 빈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또 해보라고 하면 백 번쯤은 반복해야 다시 볼 수 있을 법한, 아주 깔끔한 찌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