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1화
죽은 자들의 밤
한 번, 두 번, 세 번.
숨도 쉬지 않고 내려친 메이스가 헬리나의 머리를 터진 토마토처럼 으깨 버렸다.
[에픽 퀘스트 ‘상류사회에 스며든 그림자’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후우, 허으…… 끄, 끝났나?”
호흡을 가다듬은 알렉스가 경계심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상대가 싱겁게 쓰러졌다.
퀘스트 완료와 레벨 업 알림이 떴으니 죽은 건 확실할 텐데.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다.
‘생각보다 수준 높은 마녀는 아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경계를 풀고 팔을 늘어뜨릴 때였다.
헬리나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흡!?”
-안타깝구나. 아직 준비를 온전히 갖추지 못했거늘.
기괴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알렉스는 순간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넘어졌다.
물속에 들어선 것처럼 숨이 턱 막힌다.
‘이게…… 뭐…….’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 도시의 벌레들을 처리할 정도는 되겠군.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강대한 어둠의 마력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죽는다.’
살기 위한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알렉스는 자신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알렉스 Lv 24]
[잔여 스킬 포인트 7]
무려 여섯 번의 레벨 업.
거기에 퀘스트 보상까지 더해, 스킬 포인트는 총 7개가 모여 있었다.
하지만 감탄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스킬창으로 전환한 알렉스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포인트를 소모했다.
[신앙 Lv 5]
신앙 스킬에 2포인트를 투자하자 통증이 제법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알렉스는 신앙이 5레벨이 되며 습득조건을 채운 한 가지 스킬을 배웠다.
[블레싱 Lv 1]
신의 축복.
지속시간 동안 부정한 기운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며, 전체적인 능력치를 상승시켜 주는 스킬이다.
사제 클래스라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버프 스킬의 일종.
본인에게 축복을 걸자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크게 가셨다.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긴 했지만, 알렉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무릎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으…… 넌 또 뭐야.”
-호오? 흥미로운 놈이군. 분명 먼지나 다름없는 작은 벌레였는데?
연기를 향해 말을 걸자, 살짝 놀랐다는 듯한 감정이 전해져 온다.
-자세히 살펴보고 싶지만, 시간이 다 되었구나. 어디 한번 발버둥쳐 보거라 예루스의 종복아.
그 말을 끝으로 연기가 흩어지며 방안을 가득 채우던 존재감이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땀으로 범벅이 된 알렉스는, 얼굴을 닦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X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헬리나를 죽이고 퀘스트를 완료한 것으로도,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되진 않은 것 같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다시 허리에 차고, 방패 역시 팔목에 단단히 고정했다.
마법과 몇 번 부딪힌 탓에 표면이 조금 찌그러지긴 했지만, 사용에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발버둥 치라고? 뭔가 위기를 암시하는 말이었는데.’
마녀는 죽고 연기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방에서 묘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알렉스는 남은 스킬 포인트를 마저 사용했다.
[실드 마스터리 Lv 3]
[방어 본능 Lv 3]
[홀리 웨폰 Lv 2]
실드 마스터리와 방어 본능, 홀리 웨폰에 각각 1개씩.
그리고 마지막 남은 포인트로는 실드 마스터리가 3레벨을 찍으며 해금된 새로운 스킬을 배웠다.
[실드 차지 Lv 1]
방패를 앞세운 돌진기 겸 공격기로, 방어와 속도 보정이 붙고 충돌대상에게 경직을 주는 옵션까지 있는 스킬이다.
어떤 스타일의 성기사를 키우든지 반드시 마스터하는 필수 스킬 중 하나.
물론 게임에서의 이야기니, 지금은 과연 그만큼 효율적인 스킬일지 직접 써보고 판단해야 했다.
“후우. 매일 밤마다 편하게 잠드는 날이 없군.”
포인트를 전부 소모한 알렉스는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어둠 속을 걸으며, 알렉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마녀도 그렇고, 연기 속의 음성도 나를 예루스의 성기사라 여겼어.’
종교적인 문제로 교단과 충돌할 것을 걱정했던 알렉스에겐,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물론 암흑교도가 한 말을 그대로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긴 하다.
‘그래도 일단 겉보기로는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정말 내 힘의 근원이 예루스일 수도 있는 거고.’
게임 속 캐릭터가 그대로 넘어온 건 아니니, 어쩌면 이쪽의 상황에 맞춰 종교 역시 변경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교단의 인물과 마주치는 걸 너무 겁내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부담감을 조금 덜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니,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의 형상이 들어왔다.
캄캄한 탓에 윤곽이 제대로 드러나진 않지만, 대략적으로 보이는 복장으로는 성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아닐까 싶었다.
“거기 누굽니까?”
“저는 하, 하녀, 아, 아르…… 느, 그륵.”
발음이 뭉개지는 괴상한 대답이 들려왔다.
알렉스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홀리 웨폰의 레벨을 올려 한층 밝아진 신성력이 광원이 되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썅.”
절로 욕설이 나왔다.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진물을 흘리는 징그러운 형상의 하녀가,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머릿속으로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좀비.
‘아까의 경고는 이걸 말하는 거였나?’
그 연기 속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헬리나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등장한 것 같은데, 암흑교의 고위 간부와 일시적으로 연결되었던 걸까?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고 생각하자.’
알렉스는 다가오는 하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블레싱, 신성한 축복의 힘이 대상을 파고든다.
딱 봐도 좀비 같은 언데드라는 느낌이지만, 여기는 무덤가도 아니고 상대는 멀쩡한 하녀복을 입고 있다.
사자소생의 주문으로 일으킨 시체는 아니라는 의미.
방금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저렇게 되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저주 같은 것에 당해 언데드로 변하는 거라면 축복으로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캬으아!”
그렇기에 먼저 블레싱 스킬을 사용해 본 것인데, 상대는 신성력에 닿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다가오는 속도를 높였다.
이미 축복으로 되돌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닌 모양.
어쩔 수 없이 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스는 하녀를 향해 실드 차지를 발동했다.
몸이 빠르게 움직인다.
‘움직임이 굉장히 가볍다. 여기서도 괜찮은 스킬 같은데? 아, 이건 폭풍 레벨 업 탓인가?’
한달음에 하녀의 앞으로 달려간 알렉스는, 방패를 휘둘러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목 위의 부분이 사라지며, 복도 벽에 살점이 흩뿌려졌다.
막 공격을 이어가려던 알렉스는 머쓱해하며 높이 치켜든 검을 내렸다.
‘……대미지도 제법 나오나 보네.’
한 방으로 보내 버릴 줄은 몰랐는데.
여섯 번의 레벨 업으로 전반적인 능력치가 꽤 상승한 탓도 있고, 아무래도 하녀의 레벨 자체가 낮아서 쉽게 해치울 수 있기도 했을 것이다.
‘좋은 곳으로 가시길.’
하녀의 명복을 빌어준 알렉스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쉽게 이기긴 했지만, 긴장을 풀진 않았다.
앞으로 적이 얼마나 더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부패의 저주…… 라고 해야 하나? 산 사람을 언데드로 만든 게 하녀 한 사람만은 아니겠지.’
아까 느껴진 그 소름끼치는 힘이라면 분명 광범위의 흑마법일 텐데, 대상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일지 모르겠다.
영주성 한정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설마 델트시 전체에 뿌려진 저주는 아니겠지.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목소리가 아쉬워하며 준비가 부족하다고 했었으니까.’
물론 영주성 내의 사람들만 괴물이 되었다고 해도, 충분히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내성에 머물러 생활하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쉽게 쓰러뜨린 하녀와 달리, 건물 바깥에는 야간경계를 서는 무장한 병사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재수 없게 언데드로 변한 기사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병사는 몰라도 기사는 아직 위험해.’
레벨이 전보다 꽤 오르긴 했지만, 일대일로 기사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설 정도는 아니다.
상대가 언데드화되었다면 신성력의 힘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레벨의 격차를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조심스레 나아가던 알렉스는 좀비처럼 변한 하인 세 명을 더 해치우고 나서야, 건물 입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말이 있는 방향이 어디지?’
빨리 말에 올라 내성을 벗어나야 한다.
달빛에 의지해 사방을 둘러보며 움직이고 있자니,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려왔다.
“거기 사람입니까?”
“그어억.”
“……염병. 좀 봐주면 안 되나.”
발소리의 정체는 언데드화된 병사였다.
그 수가 다해서 여섯 명.
보통 경계 근무는 2인 1조가 되는 게 기본인데 6명이나 모여 있는 걸 보니, 각 근무지에서 교대한 인원들이 복귀하는 와중에 저주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알렉스의 입장에선 재수가 없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다들 자기 키만 한 길이의 창을 들고 있다.
집단으로 운용되는 창병들과의 근접전이란, 전신갑주로 무장한 기사가 아니고서야 상대하기 까다롭다.
‘그래도 레벨이 많이 올랐으니, 저런 일반 병사들보단 월등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지.’
도주는 의미가 없다.
언데드라면 산자를 감지하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기에, 괜히 피해 보겠다고 돌아다니다가는 오히려 다른 적들을 끌어모아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기본 능력치의 차이와 자신의 스킬들을 믿고, 대형을 흐트러뜨려서 하나씩 각개격파해 보기로 했다.
“안 아프게 살살 찔러라, 살살.”
“그게겟?”
“갸으어!”
의미를 가진 단어조차 되지 못하는 말로 대답하는 병사들을 향해, 알렉스는 신성력을 머금은 검을 겨누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