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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10화 (10/151)

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10화

루미넌 백작가(4)

“어쩌지…….”

배정받은 객실 안.

혼잣말을 중얼거린 알렉스는 침상 주변을 서성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상류사회에 스며든 그림자란 이름의 퀘스트.

암흑교의 표식이 새겨진 아티팩트를 가족에게 나눠주었다는 백작가의 장녀.

해야 할 일은 명확해 보이긴 했다.

‘장녀 헬리나는 암흑교와 연관된 사람일 거야.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확인할 수 있겠지.’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의 세계관 설정에 따르면, 암흑교는 대륙 모든 종교의 공적이었다.

종교와 연관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암흑교도들의 힘의 근원인 어둠의 기운과 상극이기도 했다.

지금은 어째 종교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모양이지만, 아무튼 성기사나 사제들은 암흑교도와 조우하면 어렵지 않게 상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다.

그들은 신성력에 닿으면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기에.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전투는 필연적이겠군. 괜찮으려나?’

게임에서는 대부분의 퀘스트에 레벨 제한이란 게 붙어 있었다.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라는 가이드라인.

그리고 레벨 제한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어지간히 플레이어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의 퀘스트는 클리어할 확률이 꽤 높은 편이다.

다만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는 그런 구분이 있기는 한 건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수락이나 거절 같은 선택지도 없이 멋대로 생겨나 버린 퀘스트가 아닌가?

‘상대가 엄청난 강적이라면? 괜히 찾아갔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끔살당하는 거 아냐?’

게임 내에서도 암흑교와 연관된 직업 퀘스트는, 최소 30레벨 이상은 되어야 시작되는 편이었다.

마냥 ‘퀘스트가 생겼으니 하러 가야지~’라는 마음으로 임하기는 어려웠다.

게임과 달리 몬스터나 NPC들의 레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선택을 내리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레벨은 강약을 따지는 가장 기초적인 기준인데, 싸워보지 않고는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더 거지 같은 건 뒤처리도 만만치 않다는 건데.’

헬리나가 암흑교의 인물임을 파악하고 싸워서 승리했다고 치자.

백작가 내에서 가주의 장녀를 죽이고 아무 탈이 없을 수 있을까?

암흑교도라는 정체와 자신이 가진 신성력에 대해 밝히면 잘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고이 보내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할 것이다.

최소한 교단과 연락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들 테고, 당분간 피하려고 했던 결정이 무색하게 교단의 성직자들과 마주치게 될 터.

‘문제없이 잘 풀리면 교단을 등에 업을 수도 있겠지만, 재수 없으면 너 이놈 이단 새끼 화형이 될지도 모르겠군. 하이리스크 하이리턴도 좋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긴 고민이 이어지며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넘어갈 때쯤.

알렉스는 방 바깥에서 들려온 작은 기척을 느끼고,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찾아온 것 같다.

영주성에서 일하는 하인일까? 하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불길함을 느낀 알렉스는 바닥에 내려둔 무기와 방패를 집어 들었다.

이후 소음이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몸을 움직여, 문 옆의 벽 쪽으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기기긱.

천천히 문이 열렸다.

이런 늦은 시간에 무단 침입자라니 수상하기 그지없다.

불과 얼마 전에 잠자리에서 습격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영주성 내에서까지 그딴 일이 벌어질 리는 없는데?’

당황스럽지만 만약에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손에 든 검을 콱 움켜쥐었다.

마침 조슈앙과 헤어지고 방에 들어오고 나서도 쭉 깊이 고민하느라, 아직 갑옷은 벗지 않은 상태다.

싸워야 한다면 만전의 상태로 임할 수 있다.

침입자가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알렉스는 검을 뽑아 상대의 목을 겨누었다.

“멈춰라.”

움직임을 멈춘 상대가 천천히 알렉스를 돌아본다.

때마침 달빛이 창안을 비추고 있었기에, 등불이 없어도 어느 정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금발을 가진, 이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

일단 하녀로 여길만한 외모나 복장은 아니었다.

달빛이 비췄다지만 어둠을 완전히 몰아낸 건 아니라 그런지, 묘하게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라 생각할 무렵.

여인의 입이 열렸다.

“간만에 신선한 정기를 빨아내 볼까 했더니.”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알렉스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무언가 철퇴 같은 것이 복부를 후려친 느낌이다.

“컥-!”

“이건 생각지 못한 상황이네. 자고 있었으면 행복한 꿈을 꾸다가 죽었을 텐데, 왜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 거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여유가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

방금의 공격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헬리나구나! 망할!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그냥 넘어갈까 하던 참인데, 이렇게 찾아온다고?’

퀘스트 목표가 먼저 자신을 찾을 거란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삼킨 알렉스는, 눈을 부릅뜨고 헬리나를 노려보았다.

복부에 느낀 충격은 분명히 육체를 이용한 물리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초현실적인 방법.

예를 들자면 마법 같은 것을 사용했다는 의미다.

‘위치(Witch). 마녀의 힘이겠군. 주문을 외운 것도 아니니 염동력 같은 부류의 이능인가?’

암흑교와 연관된 인물임을 확신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다.

여성교도라면 타락기사나 암살자보단, 마녀나 어둠사제의 길을 선택하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니까.

“얌전히 있어 줘요, 팔팔한 전사님. 그래도 죽기 전에 최고의 쾌락을 누리다 갈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리며, 알렉스는 몸이 살짝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녀가 사용하는 저주의 일종.

하지만 말 그대로 살짝 둔해지는 정도일 뿐, 크게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알렉스의 몸에 깃든 신성력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어둠의 힘을 밀어내며 저항한 덕분이었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열 살배기 어린아이 수준으로 신체 능력이 떨어졌을 터.

알렉스를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했는지, 헬리나는 웃음을 띤 채 별다른 경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성기사라는 걸 모르고 있어?’

전사라는 무덤덤한 호칭도 그렇고, 헬리나는 암흑교도가 성직자들에게 보일 만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다 알고 이렇게 찾아온 건가 싶었는데, 그냥 평범한 손님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알렉스도 침입자가 마녀인 줄 바로 알아차렸다면, 보자마자 검을 멈추지 않고 목을 베었을 것이다.

신성력과 흑마력의 충돌을 시험하기 전에는, 외견만 보고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긴 어렵다.

알렉스는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힘이 다해 쓰러지는 것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한층 짙은 미소를 지은 헬리나가 느긋하게 그에게로 다가왔다.

가벼운 발소리를 들으며 기회를 기다리던 알렉스는, 거리가 필요한 만큼 가까워졌다고 여겨지자마자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꺗!?”

홀리 웨폰이 발동하며 은은한 신성력이 롱소드에 서린다.

날카로운 칼날이 앞을 막기 위해 들어 올린 헬리나의 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악-!”

비명과 함께 핏물이 뿌려짐과 동시에, 무형의 타격이 알렉스의 어깨를 후려쳤다.

“으읏.”

휘청거리며 밀려난 알렉스가 재빨리 방패를 들어 앞을 가렸다.

공격이 한 번으로 그치진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

쾅!

예상대로 어깨가 빠질 듯한 강렬한 충격이 이어지며, 방패와 함께 팔이 뒤로 젖혀졌다.

‘이런!’

다행히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온 방패가, 뒤이은 세 번째 공격을 저절로 막아주었다.

이번에는 방어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특수 공격은 방어 본능으로 막을 수 없는데? 이것도 바뀐 건가.’

딴생각을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지만, 성기사 고인물 유저의 감각이 절로 반응하며 의문을 표했다.

방어 본능의 기존 스킬 효과는 물리 공격에만 한정되기에, 화살 같은 투사체는 막아도 마법에까진 적용이 되진 않았었다.

현실로 넘어오며 스킬의 성능이 더 좋아진 셈.

다만 마법에 반응하긴 했어도 충격까지 완전히 흘려 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침입자를 인지하자마자 무장을 챙기긴 했지만 가죽 끈으로 고정할 정도의 여유는 없던 탓에, 알렉스는 시큰거리는 손목 통증을 느끼며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이런!’

그래도 다행히 세 번째 연속 공격을 끝으로, 마녀의 마법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마법이 아무리 만능처럼 보여도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주문조차 필요 없는 종류의 힘이라면, 상당한 양의 자원을 잡아먹는 능력일 터.

“아아악! 팔라딘이라니!”

팔이 잘린 헬리나가 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가, 품속으로 아직 멀쩡한 쪽의 손을 집어넣어 목걸이를 꺼내 잡았다.

알렉스가 의심을 품게 만들었던 바로 그 아티팩트와 같은 종류였다.

표식이 새겨졌을 뿐 특별히 사악한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던 클레인의 목걸이와 달리, 이쪽은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연기가 목걸이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망할!?’

아티팩트의 성능으로 힘을 회복했는지, 헬리나가 손가락을 뻗어 알렉스를 가리켰다.

간신히 숨 한번 돌리자마자 다시 마법 공격을 시작하려는 헬리나를 보며,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걷어찼다.

허공으로 떠오른 방패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부딪혀 날아간다.

나름대로 노리고 한 행동이긴 했다.

무형의 공격이라 해도 몇 차례 직접 부딪혔으니, 범위와 속도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

이어서 손에 쥔 롱소드를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손에서 놨어도 홀리 웨폰의 효과가 바로 사라지는 건 아닌지, 희미한 빛을 머금은 칼날이 어둠을 몰아내며 날아간다.

재차 공격을 가하려던 헬리나가 기겁하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한발 빠르게 날아간 검이 그녀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아악! 예루스의 똥구멍이나 핥는 새끼가!”

경기를 일으키며 넘어진 헬리나를 향해, 알렉스는 온힘을 다해서 달려들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답이 없으니, 어떻게든 붙어서 한 방을 먹여줘야 했다.

‘제발, 보호막 같은 능력까진 없어야 할 텐데!’

좁은 방 안이었기에 단숨에 상대의 앞에 도달한 알렉스는, 보조무장으로 매달고 있던 메이스를 쥐고 치켜들었다.

“자, 잠까-”

“흐아-압!”

빠득!

신성력이 담긴 메이스가 헬리나의 코뼈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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