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9화
루미넌 백작가(3)
“도련님! 무기고는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출입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놈! 나 조슈앙이 신원을 보증하겠다는데 무슨 망발을! 내가 가문의 일에 끼지 않고 바깥을 겉돈다고 너도 무시하는 것이냐?”
“아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중요 구역의 열쇠들을 관리하는 하인과 조슈앙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알렉스는, 일이 생각만큼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아 혀를 찼다.
기사들의 예비무장 및 사병을 동원할 때 필요한 무구들을 보관하는 무기고는, 당연히 성채 내에서도 중요도가 높은 금역 중 하나.
가주나 가주 대리쯤 되는 이의 허가 없이는 개방할 수 없는 게 절차상 맞는 일이긴 하다.
‘이러면 나가린데.’
하인이라 하지만 태도나 차림새를 보아하니 시종장쯤 되는 위치 같다.
그만한 직급이라면 가주의 신임을 받아 성의 내무를 담당하는 자이니, 귀족 자제라 해도 마냥 윽박질러서 일을 해결할 순 없는 노릇이다.
순진해 보이는 귀족 도련님을 잘 구슬려서 괜찮은 장비 몇 개쯤 받아내려던 알렉스가, 계획이 무산되는가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쉴 때쯤.
누군가의 근엄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시간도 늦었는데 무슨 소란들이냐?”
뒤를 돌아보자 조슈앙과 비슷한 외모의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꼿꼿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레인 공자님. 둘째 도련님께서…….”
“엇, 형님…….”
클레인 루미넌.
백작의 장자이자 현 가주 대리로,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하기 위해 머물러 있는 자였다.
관계가 서먹하다고 하더니 형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번에 조슈앙의 기가 죽는다.
“조슈앙. 무슨 행패를 부리는 거지?”
“형님, 그게 아니고…….”
우물거리는 태도로 사정을 털어놓는 조슈앙.
조금 횡설수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충 위험에 처했던 자신을 도와준 이에게 보답하려 한다는 내용은 전해졌다.
별것도 아닌 상처 몇 개를 치료한 게 전부이지만 꽤 과장이 섞인 덕분에, 알렉스는 거의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가 되었다.
“사제도 아닌데 성법을 다룬다고? 흐음.”
물론 동생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클레인은, 사기꾼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알렉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쩝. 뭔가 어필이라도 해야 하나? ……응?’
장비 교체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뭐라도 보여줘야 할까 생각하던 알렉스는, 클레인에게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알렉스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간다.
명치 어림에 매달려 있는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그 목걸이…….”
“음? 목걸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평범한 물건이 아닌 것 같군요. 혹시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까?”
“호오?”
독특한 문양이 세공된 목걸이.
그렇지만 딱히 귀금속이나 보석이 박혀 있진 않아, 귀해 보이는 물건은 아니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클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철없는 동생이 이상한 수작에 놀아난 건 아닌지 의심했는데, 바로 아티팩트를 알아보는 걸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이야. 이거 실례했군.”
아티팩트.
마법이나 축복 같은 신비한 힘이 담긴 물품을 의미하는 명칭이었다.
깃든 능력의 종류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아티팩트는 아무리 미미한 효과를 가졌다 해도 희소가치가 높아 굉장히 비싼 물건이다.
“처음 보는군요. 그런 귀물은 언제 구했답니까?”
“흥! 하는 일도 없이 싸돌아다니기만 하니 모를 수밖에. 네 누이가 한참도 전에 선물해 준 것이다.”
“……누님이?”
“활력과 집중력을 높여주는 대단한 마법물품이지. 놀러만 다니며 가문의 재산을 축내는 네놈과 달리, 정무에 힘쓰는 내겐 꽤나 도움이 되는 선물이다. 가문의 사람들은 다 하나씩 차고 다니고 있거늘, 꼴을 보아하니 전해 받지 못한 모양이군.”
“으읏.”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조슈앙은 가족들에게 돌아간 선물을 혼자만 받지 못한 듯했다.
다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그건데?’
알렉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클레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노려보았다.
분명 기억에 있는 형태다.
한창 게임에 열중하며, 레벨 업이 더딘 구간에서 직업 퀘스트를 병행할 무렵.
숱하게 마주했던 어떤 집단을 상징하는 표식 중 하나가 분명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도중.
[에픽 퀘스트 ‘상류사회에 스며든 그림자’ 가 발생합니다.]
한줄기 알림이 떠올랐다.
‘퀘스트!? 뭐야, 퀘스트가 가능하다고?’
게임을 조금이라도 해봤다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단어.
어떠한 임무를 받아 목적을 달성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범용적인 게임 시스템이다.
퀘스트 시스템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알렉스는 살짝 흥분하며, 퀘스트창을 띄워 내용을 열람했다.
[상류사회에 스며든 그림자]
[암약하는 비밀세력의 존재를 밝혀내십시오.]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스킬 포인트]
‘……내용이 이게 다야?’
너무나 단출한 설명에 약간 당황했다.
그래도 보상을 확인하니 눈이 번쩍 뜨인다.
‘경험치는 당연하지만 스킬 포인트?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 중 하나잖아?’
스텟이나 스킬 포인트처럼 캐릭터의 능력 수치를 영구적으로 상승시켜주는 보상은, 게임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그의 기억을 뒤져봐도 굉장히 드물었다.
‘그나저나 이런 퀘스트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하긴 게임과 이곳이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니, 내가 모르는 게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만.’
어쨌거나 내용대로 비밀세력의 존재에 대해 알아내려면,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저 목걸이를 선물해 줬다는 조슈앙의 누이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좋다.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할 순 없으니 허가하지. 하지만 당분간 네 녀석의 외부 활동을 금지하겠다.”
“윽…….”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갑자기 개방된 퀘스트 쪽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야기가 잘 풀렸는지, 조슈앙은 무기고의 열쇠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된 모양인데, 알렉스의 입장에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다.
물론 대놓고 그런 티를 낼 순 없기에, 적당히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곤욕을 겪게 된 것이 아닌지…….”
“아, 아니오. 마땅히 해야 할 보답을 위한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당연히 신경 안 쓰지. 그래 봐야 외출 금지 정도인데 별로 미안하지도 않네.’
속마음을 숨기며 알렉스는 웃음을 머금고 조슈앙의 뒤를 따랐다.
퀘스트에 대한 조사도 해야 하지만, 일단은 상태가 나쁜 장비들부터 갈아치우는 게 먼저였다.
* * *
“끝내주는군요.”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오.”
“정말 감사합니다.”
새로 얻은 장비를 걸치고 가볍게 몸을 움직여본 알렉스는, 동작에 불편함이 없음을 확인하고 조슈앙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툼한 갬비슨을 덮은 잘 만든 체인메일, 그 위에 걸친 서코트까지.
리넨을 여러 번 겹쳐 만든 천 갑옷인 갬비슨은 날붙이에 대해 의외로 높은 방어력을 가져, 병사나 용병들이 애용하는 방어구다.
그 위에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품질 좋은 사슬갑옷이 더해지고, 튼튼한 외투인 서코트까지 걸치니 더할 나위 없는 무장이라 할 만했다.
‘판금갑옷을 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방어무장의 최고봉인 플레이트 아머는, 지휘관급 상위기사조차 연봉을 꼬박 모아야 구할 수 있는 고액의 장비.
어디 전쟁터에서 백작의 목숨을 구하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차남인 조슈앙을 구슬린 정도로는 언감생심 욕심을 낼 수도 없는 물품이다.
그래도 이런 갑옷들에 그리브(Greave)와 스파울러(Spaulder), 유려한 형태의 질 좋은 롱소드까지 한 자루까지 받아냈다.
정강이 보호대인 그리브와 어깨를 덮는 관절형 방어구인 스파울러.
일체형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추지 못한 기사들이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기병들이 선택하는 방호구들로, 이것들 역시 돈 주고 사려면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들이다.
‘나는 써먹지도 못할 멧돼지 엄니 한 쌍 준 것 치고는, 이 정도면 꽤 이득을 본 거래라고 할 수 있겠지. 칼이 생겼으니 공격력도 더 올랐고.’
메이스도 써먹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스터리 레벨이 더 높은 롱소드가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긴 할 터다.
어쨌거나 옷이 날개라고 하더니, 장비를 다 갖추고 나니까 전도유망한 젊은 기사처럼 보인다.
볼일을 마친 알렉스는 이제 다른 용건으로 넘어가야 했다고 생각하며, 조슈앙에게 백작의 장녀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아까 전에 클레인 공자께서 착용하고 있던 그 아티팩트 말입니다.”
“음? 헬리나 누님이 선물했다는 그거 말인가?”
“아, 영애께선 헬리나라는 이름을 쓰시군요. 아무튼,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가족분들에게 전부 선물을 돌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나만 빼고 말일세.”
혼자만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을 상기한 조슈앙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헬리나 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 나만큼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골칫거리 중 하나지. 파혼을 두 번이나 당했거든.”
“파혼…… 입니까? 귀족가에선 드문 경력이군요.”
“그러게 말일세. 첫 번째는 광산개발로 한몫 단단히 잡은 자작가문의 장남이었는데, 남편이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고 말았지.”
워낙 떠들기 좋아하는 친구라 그런지, 조슈앙은 자세히 캐묻지 않아도 바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풀어놓았다.
참 이용해 먹기 좋은 인물이다.
“그래도 거기서 잘 버티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파혼을 선언하고 가문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아버지가 꽤 노발대발했던 기억이 나는군.”
‘돈을 보고 정략혼을 한 건데, 얻은 게 없다면 그렇겠군.’
남편이 죽으면 그가 가진 재산의 권리는 배우자에게 넘어간다.
돈 많은 가문의 적장자라면 상속권이 상당했을 텐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후계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면 백작의 속이 뒤집힐 만도 했을 터.
“두 번째는 재혼이다 보니 좋은 자리를 구하진 못했고. 전공을 세워 작위 봉작이 논의되고 있던 유능한 기사와 혼인을 맺었다네.”
“음. 혹시……?”
“그래. 그 양반도 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상에서 앓다가 사망했네. 지병이 있던 이들도 아닌데 둘씩이나 그렇게 가버려서, 누님은 다시 혼처를 찾지도 못하고 영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되었다네. 바깥을 싸돌아다니는 나와는 정반대지.”
건강한 새신랑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연달아 두 번.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꺼림칙하게 여길 만한 사건이다.
‘냄새가 나는군.’
물론 우연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알렉스는 그 사건들이 어떤 모종의 단체와 헬리나가 연관되며 벌어진 일이라 확신했다.
목걸이를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 문양을 본 이상 의심하지 않을 여지가 없었다.
성기사나 사제의 직업 퀘스트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수차례 부딪히게 되는 단체가 있다.
타락한 기사, 마녀, 흑마법사 등.
떳떳하지 못한 범죄자들이 모이는 안식처.
‘갑작스러운 퀘스트에 뭔가 싶었더니, 여기서 이리 엮이게 될 줄이야.’
지역이나 분야의 차이에 따라 지칭하는 이름이 여러 가지 있긴 했으나, 가장 보편적으로 불리는 그곳의 명칭은 ‘암흑교단’이었다.
알렉스가 본 목걸이에 새겨진 문양을 표식으로 삼는 집단의 이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