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성기사로 살아가기 8화
루미넌 백작가(2)
“알렉스 사제께선 과묵하신 분이시구려. 다른 사제들은 보통 쉴 새 없이 교리를 설파하며 귀를 아프게 하는데 말이오. 앗차! 존귀하신 그분의 말씀이 듣기 싫다는 소리는 아니오. 하하핫!”
“예, 뭐……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긴 합니다.”
조슈앙과 함께 빠르게 말을 달려 이동한 알렉스는, 해가 지기 전에 루미넌 백작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소란스럽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을까 하던 예상과 달리, 조슈앙은 그와 단둘이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답이 아니라 수다를 떨 상대가 필요해 데려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궁금하지도 않은 가정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장남과 장녀와는 꽤나 서먹한 사이고, 백작의 둘째 부인에게서 난 삼남과는 굉장히 관계가 안 좋다는 둥.
부친에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어, 매일같이 사냥을 다니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둥.
사람이 타고나길 좀 어수룩한 건지, 본인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별 주의 없이 흘려놓는다.
‘아들이 손님을 데려왔으니 분명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찾지 않는 걸 봐서는 확실히 내놓은 자식 취급받는 모양이군. 집에선 무시당하고 마땅한 친구도 없다면, 이런 대화가 고플 만하긴 하겠어.’
조금만 물꼬를 터도 술술 이야기를 뱉어내기에, 은근슬쩍 이것저것 물어보기는 편하긴 했다.
“루미넌 백작께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뭐 원래도 날 잘 찾지 않으셨지만, 최근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요. 승계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 사실상 형님이 가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나 했는데, 몸이 불편하시면 알현을 청하지 않는 편이 낫겠군요.”
“아, 미안하오. 은인을 모셔놓고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건 역시 그러니…… 내 가서 부친께 기별을 올리겠소.”
“아닙니다! 괜히 결례이기도 하고, 저는 조슈앙 님과 이렇게 담소를 나누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군요.”
“오오! 그렇게 생각하시오?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구려!”
괜히 귀족들에게 얼굴을 팔리고 싶진 않기에 조슈앙를 붙잡았다.
청탁을 넣어보려던 첫 계획대로라면 모를까, 지금은 차라리 조슈앙과 대화나 나누다가 조용히 떠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자꾸 제게 사제라 칭하시지만, 저는 아직 서품을 받은 몸이 아닙니다.”
“엇? 그냥 겸양의 말이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정식 사제가 아니신 거요? 그럼 아직 부제(사제를 보좌하는 품계)이신가?”
“정확히 말하면 교단에 속한 신분조차 아닙니다.”
알렉스는 조슈앙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꾸며서 전달했다.
정보를 누설하고 싶진 않지만 이미 이렇게 관계가 생겼으니, 나중에 교단 측에 자신의 이름을 대며 찾으려 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괜히 사제 사칭범으로 교단에 알려질 바에야, 지금 미리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해 둬야 한다.
“이럴 수가! 그럼 마수와 싸우다가 신성력을 다루게 되었단 말이오?”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순간, 제 몸속을 타고 흐르는 그분의 빛을 느꼈습니다. 예루스 님의 은혜를 받은 거지요.”
“정말 놀랍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군!”
적당히 둘러댄 끝에.
신실한 신앙을 가진 알렉스는 기사의 종자였다가, 마수와의 전투에서 극적으로 신성력을 깨우친 인물로 포장이 되었다.
교단의 사제조차 신성력을 쉬이 다룰 수 없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 신성력을 품는 이가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닌지라, 조슈앙은 알렉스의 말에 별다른 의혹을 품지 않았다.
이미 치료를 경험했으니 거짓을 의심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럼 이제 교단에 알리고 정식으로 성직에 입문하겠구려! 이미 그분의 가호를 입었으니 금방 정식 서품을 받게 되겠군. 아, 아니지. 어쩌면 팔라딘으로 서임을 받으시려나?”
팔라딘.
성기사를 지칭하는 단어에, 알렉스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게임에 속한 것이었으나 현실이 되어버린 그의 직업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그분을 따르는 종이기는 하나 이전까진 성직에 대해 고려해 본적이 없기에, 교단의 사정에 대해선 많이 무지한 편입니다. 혹시 팔라딘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아! 하긴 팔라딘은 수가 적고 만나기 어려운 자들이니, 잘 모른다 하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나도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들뿐이긴 하네만.”
귀족이란 평민이 접할 수 없는 지식을 독점하는 자들.
알렉스는 조슈앙의 입을 통해, 성기사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직업 선택이 자유로웠던 게임에서야 성기사가 쉽게 볼 수 있는 클래스였지만, 이곳에서의 성기사는 극히 희귀한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직업이다.
교단은 무력이 필요한 일이 발생하면 재력과 명분을 움직여 얼마든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세력이지만,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런 상황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력을 갖춘 성직자인 팔라딘.
그리고 그냥 레벨 올리고 스킬 찍으면 되는 게임 유저와 달리, 이곳의 성기사가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하겠지.’
교단의 은밀한 일들을 맡겨야 하니 어릴 때부터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고, 기사 못지않은 훈련을 통해 전투능력을 갖춰야 한다.
거기에 정식 사제들도 다루기 어려운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재능까지 있어야 하니, 성기사 한 사람을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할만했다.
“물론 교단에 몸담지 않은 귀하가 바로 성기사로 임명될 순 없겠지만…… 가끔 명예 팔라딘으로 서임되는 외부인사들도 있는 것을 보면, 경께서도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경이라니,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제게 과분한 호칭입니다.”
“내 직접 몸으로 이적을 받아들였거늘, 어찌 귀하의 앞날을 의심하겠소? 하하! 분명 크게 이름이 알려질 분이 되실 게요.”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지 은근히 친한 척을 해오는 조슈앙에게 대충 호응해 주며, 알렉스는 속으로 자신의 입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레어한 직업이라니 뿌듯하긴 하다만, 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엔 무의미한 이야기기도 하네.’
말을 들어보니 이대로 조금만 성장해도 팔라딘 신분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긴 하겠는데, 문제는 아직 자신이 이교도로 배척당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교단의 사람이 아닌 조슈앙에게 확인할 방법도 없을 테고, 민감한 주제라 의심을 사지 않게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결국, 원점인가. 이대로는 일단 교단과 접촉해선 안 되겠지. 어디 으슥한 곳으로 사제 한 사람을 납치하든가 해서, 얼굴을 감추고 자세한 판별을 받아봐야 할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내일 날이 밝으면 함께 교단으로 가봅시다! 내가 귀하의 신원을 보증하고 대사제님…… 은 몰라도, 주임 사제분과 면담을 주선해 보겠소!”
잠시 생각에 빠져 있자니 조슈앙이 큰일 날 소리를 내뱉었다.
알렉스는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잘 골라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아직은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분의 선택을 저버릴 마음은 아니지만, 교단에 귀의하는 건 신중히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으음, 그렇소? 그게 그렇게 고민해야 할 일인가 싶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눈초리로 말을 흐리는 조슈앙에게, 알렉스는 논점을 바꾸기 위해 다른 주제를 언급했다.
“사냥을 즐기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마수를 사냥해 본 적 있으십니까?”
“언제고 꼭 경험해 보고 싶지만 아직은 없소. 몬스터야 자기들끼리 새끼를 깐다지만, 변이된 마수는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특이한 물품을 소지하고 계셨던 듯한데?”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한 알렉스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맷돼지의 엄니를 천으로 덮은 채 끈으로 묶어두었지만, 부피도 있고 전부 가리지 못했으니 눈에 띄었을 것이다.
“제가 잡은 마수의 부산물입니다. 한번 자세히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보면서 마수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들려드리죠.”
“좋소! 마침 식사도 다 끝나가니 잘되었군!”
짐은 하인을 시켜 손님방에 가져다 두었기에,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불러 이리로 가지고 와도 되겠지만, 마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인 조슈앙은 조금이라도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하루 묵어가기로 배정받은 방에서, 알렉스는 꾸러미를 풀어 마수의 부산물을 조슈앙에게 공개했다.
더불어 적당히 놈과의 전투에 대해 경험담을 늘어놓자, 조슈앙은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며 그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모험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 하는 행색은 철부지 도련님 같네. 하긴 남자는 나이가 몇이던 관심사가 나오면 애처럼 굴 수도 있지.’
상당히 좋아하는 조슈앙의 태도를 보며, 알렉스는 그를 이용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원래는 백작에게 진상품으로 바치고 뭔가를 얻어 내보려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고, 이런 걸 도시에서 처분하는 것도 눈에 띌 수 있으니.’
조슈앙이 가문에서 별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재력을 행사할 순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눈앞의 인물은 귀족의 자제이다.
그것도 각하(Excellency) 소리를 듣는 고위 귀족인 백작가의 차남.
마침 마수에게 관심도 많은 듯하니, 그를 통해 부산물을 처분하고 대가를 받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마수 부산물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건데. 뭐…… 돈보다는 당장 필요한 물품을 받는 것도 좋겠지.’
머리를 굴리던 알렉스는 무엇을 어떻게 얻어내면 좋을지 생각하고는, 엄니를 만지작거리는 조슈앙에게 적당히 운을 떼었다.
“저희의 만남과 우정을 기념하는 증거로써, 조슈앙 님께 그 물건을 선물로 드리고 싶군요.”
“헙! 이런 귀한 것을 나에게 말이오?”
만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아 우정을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조슈앙은 천성이 순박한 건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뛸 듯이 기뻐했다.
“아, 하지만 치료를 받은 보답도 아직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는데. 이런 선물까지 받는 것은 너무 몰염치한 게 아닌지…….”
“하핫!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선물이란 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딱딱하게 이것저것 재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래도 정 부담이 되신다면-”
말꼬리를 늘린 알렉스는 은근슬쩍 자신의 장비 상태가 잘 보이도록 자세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찢겨진 부위를 대충 꿰매둔 패딩 아머와, 그 안으로 보이는 구멍 난 체인 메일.
이렇게 눈치를 주는데 뜻을 못 알아먹진 않을 것이다.
“-마침 마수와 싸우며 장비에 손상을 좀 입은 터이긴 한데…….”
“이런! 그러고 보니 상태가 썩 좋지 않구려. 쓰던 검도 부러졌다고 했었지? 생각해 보니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소!”
기대했던 반응에 알렉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슈앙의 호위 기사였던 다르온이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는 걸 이미 봤었다.
백작가씩이나 되는 곳이니 기사가 한 사람뿐일 리도 없고, 쓸 만한 무구를 어느 정도는 예비로 보유하고 있을 터.
‘판금갑옷까진 당연히 무리겠지만…… 사슬갑옷만 질 좋은 놈으로 교체할 수 있어도 좋겠네. 혹시 잘 단조된 칼 한 자루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써먹지도 못할 엄니를 주고 괜찮은 무구를 받을 수 있다면, 지금 상황에선 충분히 남는 장사라 여겼다.